일본은 한국에 비해 여성들의 경제활동이 활발한 편이다. 우선 기혼 여성들의 일할 기회가 한국보다 많다. 파트 타이머건 정규직이건 신분에 상관없이 주부들의 상당수가 취업전선에서 뛰고 있다.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살림살이가 빠듯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도 여성들의 왕성한 경제활동을 뒷받침하는 요인중 하나다.그러나 각도를 조금 좁혀 ‘재계’만 놓고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무엇보다 비즈니스 일선에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는 엘리트 여성기업인들이 많지 않다. 두둑한 배짱과 일에 대한 정열, 그리고 도전 정신으로 승부하는 인터넷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두각을 나타내는 젊은 사장들의 대다수는 남성이다.“아기가 태어난 후 나는 아이를 기르면서 직장 생활을 한다는 것이 일본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취업주부들이 육아에 신경쓰지 않고 일에 전념할 수 있게 받쳐 주는 인프라가 태부족했던 거지요. 그래서 미국으로 건너가기로 결심했던 겁니다.”일본 인터넷 벤처들의 파이어니어인 넷이어그룹(주)(www.netyear.net)의 이시구로 후지요(石黑不二代) 사장. 도쿄 시부야를 중심으로 한 비트밸리의 몇 안되는 여사장중 한명인 그녀는 놀랍게도 나고야 출생이다. 나고야는 일본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지역으로 손꼽히는 도시다. 가정도, 학교도, 직장도 옛문화와 예의범절을 중시한다. 비즈니스에서도 상식과 관념을 뛰어넘는 행동은 거의 통하지 않는다는게 나고야를 아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다.이같은 분위기에서 태어나고 대학(나고야대)까지 졸업했지만 이시구로 사장이 사회생활에서 걸어온 길은 ‘보수’와 정반대였다. 관념의 울타리를 뛰어넘는 용기와 도전으로 가득 채워져 왔다.대학졸업 후 부라더 산업에서 근무했던 그녀는 세일즈와 마케팅을 위해 여직원으로서는 최초로 해외에 파견나가는 기록을 수립했다. 해외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후에는 굴지의 대기업들로부터 스카우트 제의가 잇달았지만 유럽의 한 크리스탈 제조회사의 일본지사장을 맡았다. 일본 시장을 뚫기 위해 처음 설립된 지사의 책임자를 자원, 보이지 않는 벽에 도전한 것이다. 이시구로 사장의 나이는 이 당시 30세로 대다수 일본인 중간 간부들보다 열살 정도나 적었다.그러나 일과 가사를 병행하기에는 일본 사회의 지원 시스템이 열악하다고 느낀 그녀는 회사를 걷어치우고 미국의 10개 대학에 MBA코스 지원서를 보냈다. 9개 대학의 입학허가서가 떨어졌고 단숨에 태평양을 건너간 그녀는 스탠퍼드 대학원에서 MBA를 땄다. 졸업한뒤 실리콘 밸리에서 알파메트릭사를 설립, 운영하면서 또 다른 세계에 도전했다. 이 당시 고객회사 중에는 야후, 넷스케이프 등이 들어 있었으며 미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소니, 파나소닉 등 대기업들과도 탄탄한 거래관계를 맺었다.두둑한 배짱·열정 넘치는 나고야 출신의 엘리트이시구로 사장은 비트밸리의 태동을 주도한 소이케 사토시 넷이어그룹 창업자를 만난 후 인터넷 벤처 발전을 위해 일하기로 맘먹고 98년10월 넷이어그룹으로 옮겨 왔다. 넷이어그룹은 현재 일본 최초로 SIPS(Strategic Internet Professional Service)를 제공하며 벤처 파이어니어들로부터 주목받고 있다. 이는 비즈니스 전략, 테크놀러지, 정보 디자인 등을 하나로 통합한 솔루션으로 제공하는 것이다.지난 5월부터 넷이어그룹을 이끌고 있는 그녀는 인터넷 기업들의 주가가 미국과 일본에서 급락하고 있는 현상에 대해 “현재는 투자할 시기이지 이익을 논할 때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아울러 “한국도 일본도 증시가 인터넷기업들을 도와주지 않으면 디지털 경제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