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세계 증시가 동반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주말까지 미국의 나스닥 지수는 연초에 비해 40% 하락했고 여타 국가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벌써부터 미국을 비롯한 일부 국가에서는 증시부양론이 심심치않게 거론되고 있다. 물론 이번 세계경기의 특징을 감안하면 증시부양은 그 어느 때보다도 경기부양의 성격이 짙다. 차기 부시 정부 출범 이후 2001년1월말 연준리 회의에 전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돼 있는 것도 이런 연유다.지난해 9월 이후 미국 증시가 하락되는 과정에서 예의주시해야 할 대목은 미국의 경제주체들이 시장의 힘을 믿고 스스로 시장을 조성해 나가면서 시장이 보내는 신호에 철저히 순응하고 있는 점이다.무엇보다 증시와 경제가 침체될 조짐을 보일수록 더욱 신중해지는 정책당국자들의 처신이다. 그린스펀 의장을 비롯한 어떤 정책당국자도 나서서 시장에 영향을 줄만한 발언과 행동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다. 오히려 시장현실을 읽는데 주력해 시장참여자들이 정확한 안목을 지닐 수 있도록 노력하는 흔적이 역력하다.시장참여자들도 정책당국자의 말을 믿고 시장안정을 위해 노력한다. 최근 들어 2001년도 미국증시 전망을 발표하고 있는 월가의 전문가들은 대체로 낙관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 이면에는 연준리가 금리인하를 통해 유동성을 공급해 줄 것이라는 점을 근거로 삼고 있다.기업들도 시장에서 보내는 신호에 신속하게 대응하고 있다. 2000년 3/4분기 이후 실적이 악화됨에 따라 대부분 미국 기업들은 신속하게 구조조정에 임하고 있다.미, 시장흐름 존중하면서 증시 안정 도모우리나라는 어떤가. 세계 어느 국가보다 미국 증시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국내증시가 좀처럼 침체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함에 따라 증시부양론이 고개를 든지 오래다.문제는 경제주체들의 시장행동에 있어서는 미국과 비교할 때 크게 차이가 난다는 점이다.우리 정책당국자의 태도를 보자. 일단 시장과 시장참여자들을 판단하는 발언을 너무 자주한다. 동시에 시장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줄만한 발언과 정책을 강연회와 같은 사전에 예고되지 않은 장소에서 쉽게 발표한다. 최근 들어서는 한건 올려야 된다는 강박관념에서 그런지 말을 바꾸는 사례도 목격되고 있다.특히 우려되는 것은 정책당국자들의 시장판단과 발표된 정책이 시장현실과 너무 동떨어지거나 아마추어 냄새가 난다는 점이다. 그 결과 최근 들어서는 정책당국자의 발언과 정책당국이 내놓은 정책에 대해 정책수용층들이 반응하지 않는 ‘신뢰상실의 단계’까지 와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기업과 투자자들은 항상 피해자라는 인식에 젖을 수밖에 없다.물론 이럴 때 국민들의 고통이 증가해 경제심리가 위축되는 것이 관례다. 실제로 2001년도 우리 국민들의 고통은 크게 높아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고통지수(Misery Index)란 경제통계중 국민생활에 밀접한 소비자물가상승률에 실업률을 더한 후 소득증가율을 차감해 산출한다.원래 이 지수는 미국 국민들이 선거를 앞두고 집권당의 경제성과를 파악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최근 들어서는 세계 각국 국민들의 체감경기를 파악하는 지표로 가장 많이 활용되고 있다.세계 양대 예측기관인 와튼계량경제연구소(WEFA)와 데이터 리소시스 인스티튜트(DRI)가 최근에 수정 발표한 전망치(우리나라는 한국은행 자료)를 토대로 세계 47개국(IMD 기준) 국민들의 고통지수를 산출한 결과, 2001년에 우리 국민들의 고통지수가 2000년에 비해 가장 높아질 것으로 예상됐다.우리 국민들의 고통지수는 2000년에 마이너스 2.9에서 2001년에는 2.7로 5.6 포인트 악화될 것으로 예상됐다. 우리에 이어 대만이 2.4 포인트, 일본이 2.0 포인트, 말레이시아 1.3가 포인트 악화돼 전반적으로 아시아 국민들의 고통지수가 높아지는 점이 눈에 띄는 대목이다.반면 유럽은 2001년에도 견실한 성장세가 예상되는 데다, 그동안 고용정책의 효과가 가시화되면서 유럽인들의 고통지수가 2000년에 비해 0.5∼1.6 포인트 정도 줄어들 것으로 예상돼 동아시아 국민들과 대조가 되고 있다. 지난 10년간 장기호황에 따라 지속적으로 개선돼온 미국 국민들의 고통지수는 2001년에 성장률이 크게 둔화됨에 따라 2000년에 비해 0.6포인트 정도 올라갈 것으로 예상됐다.정책 무반응 ‘신뢰상실 단계’까지 와이 상황에서 2001년 들어 우리 국민들의 고통이 더욱 늘어날 경우 지표경기와 체감경기간에 괴리가 심해져 정책당국과 정책에 대한 신뢰상실 문제까지 제기될 가능성이 높다.특히 고통지수가 높아질 경우 국민들의 경제심리가 크게 위축돼 민간소비가 더욱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현재 민간소비의 국민소득(GDP)에 대한 기여도가 60%에 달하고 있고, 과거 일본의 사례를 감안한다면 민간소비가 줄어들 경우 우리 경제가 장기불황에 빠지고 증시가 더욱 침체될 우려가 높다는 점이다.결국 이런 점을 감안하면 2001년도 경제정책 운영은 국민들의 고통지수를 낮춰 체감경기를 안정시키는데 중점을 둬야 경제와 증시안정을 도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이를 위해 무엇보다 정책당국과 정책에 대한 신뢰회복이 전제된 상태에서 우리 경제 미래에 대한 확실한 비전이 제시돼야 한다. 동시에 정치권, 노조, 시민단체가 집단의 이해를 넘어선 타협을 통해 국민화합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우리 국민들의 경제심리가 안정되면서 민간소비가 줄어드는 현상을 방지할 수 있다.최근에 제기되고 있는 경기부양 논의도 그렇다. 일단 무엇보다 정책수단이 제한돼 있다. 우리 경제구조상 최근처럼 금리와 투자와의 관계가 ‘비탄력적’인 상황에서는 금리를 인하하더라도 기업들의 투자가 늘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다.동시에 재정적자가 지속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경기부양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설사 재원을 마련해 경기부양책을 추진한다 하더라도 우리처럼 소규모 개방국가에서는 부양효과가 해외로 누수돼 효과가 크게 제한된다.이런 상황에서 경제심리 위축에 따른 장기불황을 우려해 서둘러 부양책을 썼다가는 자칫 잘못하면 성장률 급락하에 물가만 급등하는 ‘스테그플레이션’ 국면에 빠질 우려가 있다.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구조조정을 통해 성장잠재력을 배양하는 정공법을 택하는 방안이 바람직해 보인다.결국 한 나라의 증시와 경제가 안정될 수 있느냐 여부는 경제주체들이 얼마나 시장을 신뢰하고 시장을 조성해 나가면서 시장이 보내는 신호에 순응하느냐에 달려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시장에 반하는 발언을 자주하는 사람일수록 궁지에 몰리면 ‘시장’을 더 찾는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