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1천원에 판다는 염가균일 판매점이 수년전 한국에서 성행한 적이 있었다. ‘1천냥 하우스’ ‘1천원숍’ 등 내건 간판은 달랐지만 이들 점포의 기세는 한동안 대단했었다.당장이라도 대박을 터뜨릴 것처럼 체인점을 늘리기 바빴고 사업주들은 곧 큰 부자가 될 꿈에 부풀었었다. 매스컴에서는 뉴 비즈니스의 탄생이라며 뜨거운 관심을 기울였다. 소비자들은 소비자들대로 어떤 장사를 하는 곳인가 하는 호기심에 줄지어 매장을 찾았다.그러나 이들 점포가 한계를 드러내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불과 수개월이 지나면서부터 소리없이 문을 닫는 곳이 늘어났고 지금은 거의 기억 속에서조차 사라지고 말았다.시장전문가들은 한국에서 1천원짜리 균일 판매점이 조기퇴장하게 된 원인을 놓고 여러 각도에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염가상품에 대한 인식 부족과 점포 임대료 등 각종 비용을 커버하기도 힘들 만큼 낮은 수익성, 그리고 미흡한 내부관리체제와 열악한 점포환경 등이 그것이다.하지만 세계 최고수준의 고물가국 일본에서는 이와 정반대의 엄청난 변화가 펼쳐지고 있다. 한국돈 1천원의 가치, 구매력과 별반 차이가 없는 1백엔의 혁명이다.1백엔으로 일본에서 살 수 있는 물건은 그야말로 눈을 크게 뜨고 찾아봐야 한다. 물 한병도 1백10엔 이상을 줘야 하니 산술적으로 본다면 1백엔은 돈 구실을 제대로 못한다.1백엔숍 매장 앞에 선 야노 히로다케 사장.그렇지만 다이소산교(大創産業)(사장 야노 히로다케·57)가 운영하는 ‘1백엔숍 더 다이소’의 매장만 들어서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수천가지 상품이 모두 1백엔 동전 하나면 오케이다. 라면, 통조림, 우유 등의 먹거리에서 넥타이, 내의 등 내구소비재까지 안되는게 없다. 물건 값이 싸다고 매장시설이 그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크기나 내외관에서 백화점, 할인점 등 대형 유통업체들에 비해 크게 뒤지지 않는다.이러니 고객이 몰리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일본 전역에 1천7백여개의 점포를 열어 놓고 있는 다이소의 99년 매출은 98년보다 무려 75%가 늘어난 1천4백34억엔에 달했다. 회사측은 정확한 숫자를 공개하지 않지만 2000년 매출이 2천억엔은 족히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재계 거물들 줄줄이 벤치마킹모든 상품가격이 1백엔이라는 점을 계산에 넣으면 한해동안 줄잡아 약 20억점의 상품이 다이소의 매장을 통해 퍼져 나간 셈이다.매장을 찾는 사람들은 물건을 사러 오는 고객들만이 아니다. 1백엔짜리로 신화를 만들어 낸다는 평판이 퍼지자 대형백화점, 은행, 종합상사등 일본 초일류 기업의 최고 경영자들이 체면을 마다 않고 다이소를 찾고 있다. 도쿄에서 신칸센 열차로도 5시간은 족히 걸리는 동히로시마의 후미진 곳까지 재계 거물들이 무언가 배울 것을 찾아 달려 오고 있다.다른 기업들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다이소의 성공신화 비결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야노사장의 독특한 장사수완과 인생 스토리를 알지 않으면 안된다.야노사장은 히로시마의 의사 집안에서 5남3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유복한 가정에서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다. 고교 때는 복싱에 빠져 도쿄올림픽 후보선수로까지 뽑혀 강화훈련에 참가했다. 주오대학 이공학부 4학년 때 지금의 부인을 만나 결혼하면서 구리하라인 원래 성을 처가를 따라 야노로 바꿨다.그러나 그의 인생항로는 결혼 후 수차례 험난한 파도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양식업을 하던 처가의 권유로 신혼 때 뭐가 뭔지도 모르고 양식업에 발을 들여놓게 된 그는 곧 중노동과 경험미숙으로 형들로부터 빌린 창업자금 7백만엔을 들어먹게 됐다. 돈을 더 쏟아 부어야만 되는 결단의 순간을 맞게 되자 그는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그 길은 부인과 어린 자식을 데리고 야반도주하는 것이었다.무작정 도쿄로 올라온 그는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백과사전 세일즈에 나섰다. 하지만 3개월간 단 한질도 팔지 못한채 걷어 치우고 헌종이 수집상으로 하루 하루를 연명했다.2t 트럭 떠돌이 행상이 다이소 모태말 그대로의 밑바닥 삶을 살았던 그는 부친의 권유로 노인들 집에 양자로 들어가 뒤를 돌보아 주고 눈치 밥을 얻어 먹기도 했다.야노 사장의 인생항로에 최대 전기가 찾아온 것은 바로 이때였다. 이렇게는 더 이상 못살겠다고 생각한 그에게 빈공터나 슈퍼마켓 앞에 좌판을 벌여 놓고 하는 장사가 괜찮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바로 떠돌이 행상이었다.그는 귀가 번쩍 뜨였다. 다른 사업은 실패했어도 이 일만은 성공할 것 같은 자신이 들었다. 그래서 가장 잘 나간다는 행상을 제발로 찾아갔다. 그리고 그 밑에서 함께 숙식을 하며 장사요령 등을 익힌 후 72년 2t 트럭을 하나 장만해 부인과 떠돌이 행상에 나섰다.이때 붙인 상호가 ‘야노상점’이었다. 떠돌이 행상이 몰고 다니던 소형트럭이 21세기 가격파괴의 최선두주자로 부각된 다이소산교의 모태가 된 셈이었다. 야노상점의 장사는 비교적 순탄했다. 그러나 창고겸 자택으로 쓰던 건물에 불이 나면서 큰 손해를 입기도 했다. 사명을 주식회사 다이소로 바꾸고 1백엔짜리 장사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서였다. 1백엔짜리 장사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차남이 태어난 직후 상품을 일일이 체크하고 정리할 시간이 없어 아예 단일가격 상품을 취급하는게 낫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형들로부터 다시 돈을 빌려 재기에 도전한 그는 87년 오늘날 1백엔 숍 점포를 늘리는 일에 본격 뛰어들었다. 때마침 버블 경제가 주저앉으면서 다이소 1백엔 숍은 순탄한 성장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야노 사장의 사업수완이 진가를 발휘하고 상품, 영업전략 등에서 회사가 체계적 면모를 갖추자 최근 2, 3년 전부터 급속도로 탄력이 붙게 됐다.야노 사장의 장사수완은 독특하다. 수천, 수만가지 상품을 취급하지만 상품 하나 하나의 원가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전체 장사에서 이익이 나기만 하면 개별 상품의 손해는 문제가 될게 없다는 식이다.상품을 1백엔에 팔려면 매입원가가 70엔을 넘으면 곤란하다는게 일본 유통업체들의 일반적 관념이다. 하지만 야노사장은 전혀 이에 개의치 않는다. 원가 1백엔짜리도 서슴없이 들여 놓고 1백엔에 판다.찾는 손님이 늘어나면 자연 주문량이 많아지고 주문이 늘어나면 매입원가도 낮출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익이 나는 상품만 고집하다 보면 취급상품의 종류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손님이 찾는 물건을 갖다 놓을 수 없다는게 그의 지론이다. 1백엔짜리 가위 한 품목에서만도 무려 85가지를 구비해 놓는 다이소의 상품전략은 전적으로 야노사장의 이같은 ‘평균주의적 사고’에 뿌리를 두고 있다.다이소의 또 다른 강점은 판매관리비등 중간 코스트를 최대한 압축한다는 것이다.전국에 1천7백개를 넘는 점포가 널려 있어도 직원은 3백50여명밖에 안될 정도로 직원 한명 한명을 단품관리의 ‘도사’로 만든 것이 다이소의 드러나지 않은 잠재력이다.“나는 회계장부의 숫자를 보지 않습니다. 매장에 쇼핑나온 고객들의 눈을 봅니다. 고객들이 무언가 좋은 것을 챙겼다는 눈빛으로 돌아가는지 아니면 실망한 표정인지 그것만 살핍니다.”야노사장은 자전거, 화장품, 사전에서 전기제품에 이르기까지 더 다양한 상품을 1백엔짜리로 채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