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미국 헤드헌터 사무실에는 전직 닷컴 CEO(최고경영자)들의 이력서가 쌓이고 있다. 신경제(New Economy) 호황을 만끽했던 이들이 거품이 꺼지자 구경제(Old Economy)쪽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는 것.하지만 닷컴 경험만 적혀 있는 이력서에는 먼지만 수북이 쌓이고 있다. 닷컴세계에 들어가기 전에 구경제쪽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잘 팔리는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이른바 ‘구경제와 신경제를 모두 경험한 CEO’들의 주가가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최근 들어 미국 CEO시장에 뚜렷한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유명한 헤드헌터인 스펜서 스튜어트의 실리콘밸리담당임원인 스콧 고든은 “불과 9개월만에 가장 바람직한 CEO의 모습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한다. 닷컴버블이 꺼지기 전인 지난해 봄까지만 해도 ‘젊고 능력있는 CEO’나 ‘인터넷관련기업에서 판매와 마케팅을 경험한 CEO’가 이상적인 모델이었다. 닷컴업체에 들어오기전에 무엇을 했는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은 달라졌다. ‘구경제 기업에서 15년 가량 근무한 뒤 닷컴업체로 와서 1~`2년 동안 경험을 쌓은 사람’이 가장 이상적인 CEO로 부각되고 있다.미국에선 지금 이런 ‘이상’을 현실화한 사람이 화제다. 올해 42살인 조셉 갈리 주니어(Joseph Galli Jr). 올해초 실리콘밸리의 잘나가는 B2B웹사이트 운영회사인 버티컬넷(Vertical Net)의 CEO 자리를 박차고 나와 구경제기업인 뉴웰 러버메이드(Newell Rubbermaid) CEO가 된 인물이다. 일리노이주 프리포트에 본사를 두고 있는 뉴웰 러버메이드는 ‘러버메이드’ 상표로 유명한 플라스틱용기를 비롯, 유리제품과 장난감등을 생산하고 있다. 버티컬넷과 뉴웰 러버메이드가 각각 신경제와 구경제를 대표하는 기업중 하나이고 조셉 갈리 주니어 또한 유명 경영인이어서 이 ‘사건’은 이례적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월스트리트저널의 경우 배경설명에 한페이지 이상을 할애했을 정도다.조셉 갈리가 직장생활을 시작한 곳은 세계적인 가전회사인 블랙&데커(Black&Decker). 입사 19년만에 전기기구와 전기보조제품담당 사장이 된 그에겐 두가지 욕망이 있었다. 하나는 회사의 CEO가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때 한창 붐이 일던 닷컴업체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CEO인 놀란 마치발드는 좀처럼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돈줄 끊기면서 줄줄이 ‘구경제기업’ 기웃조셉 갈리는 99년6월 아마존닷컴으로 옮겼다. 13개월간 사장 겸 COO로 있던 그는 다시 지난해 7월 버티컬넷의 CEO로 자리를 바꿨다. 구경제기업을 떠난 후 1년8개월간의 닷컴유랑이었다.그의 구경제 컴백은 과거같으면 철새 CEO라는 비난을 받을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구경제와 신경제의 경험을 두루 갖춘 인물‘이라고 각광을 받는다. “각종 위험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커지고 기업의 사업영역을 한단계 높일 수 있는 힘이 있다”(커네티컷에 있는 CEO전문 채용회사인 리소스시스템그룹의 볼 다베사 사장)는 평가까지 받는다.조셉 갈리 말고도 ‘구경제-신경제-구경제’의 길을 밟는 CEO가 많아지고 있다. 38세의 대니얼 콘(Daniel Korn)도 그중 한명이다. 보석도매회사의 CEO였던 그는 지난봄 Gazoontite.com이라는 의료품 온라인조달회사의 CEO가 됐다. 신경제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회사를 옮기자 마자 닷컴세계로 흐르던 돈줄이 갑자기 끊어졌다. 결국 신경제입문 몇개월만인 지난해 가을 종업원 1백명의 회사는 파산신청을 내야했다. 그는 “닷컴회사들에 중요한 것은 스피드였다. 기술을 상품화하는 전략이 아니라 빨리 회사를 만들어 증권시장에 상장시켜 자금을 모으는 것이 경영의 전부였다”며 닷컴기업의 잘못된 경영스타일을 꼬집었다.틀 갖춰진 회사에서 e비즈 시작 유리하버드 MBA출신인 그는 다시 구경제 기업으로 돌아왔다. 고급 백화점인 니만마르쿠스(Neiman Marcus)그룹에서 온라인 소매파트를 이끌고 있는 그는 그러나 “구경제의 전통기업들에도 웹사이트 구축 등 닷컴의 경험이 필요하며 실제 여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한다.제너럴일렉트릭(GE) 산업시스템파트의 e비즈니스담당임원인 스튜어트 스콧(Stuart Scott)은 닷컴으로 갔다가 다시 원위치한 케이스다. 99년 GE를 떠나 온라인 도매상인 Webvan의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 지난해 6월 컴백한 그는 “GE가 닷컴보다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며 “닷컴기업의 경우 많은 시간을 상부구조를 구축하는데 소비하지만 GE같은 구경제 회사는 이미 상부구조가 확립되어 있다”고 말한다. 틀이 갖춰진 회사 내부에서 e비즈니스를 시작하는게 더 빠를 수 있다는 설명이다.실제 많은 닷컴기업의 CEO들은 구경제회사의 최고경영자들이 갖고 있는 경험이 부족한게 사실이다. 물론 그들도 알고 있다. 웹 네비게이터인 Backflip.com을 창업하고 CEO를 지냈던 팀 힉맥(30)은 “상당수의 닷컴기업인들이 다소 비현실적인 사업목표에 포커스를 두었다”며 “그래서 닷컴세계가 붕괴했지만 닷컴의 경험도 소중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강조한다.하지만 ‘신경제-구경제-신경제’ CEO가 탄생하기에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이상적인 CEO모델 / 조셉 갈리“신경제와 구경제, 완벽한 조화 이루겠다”조셉 갈리는 지난 9일 뉴웰 러버메이드 CEO로 선임된 뒤 가진 첫 인터뷰에서 “꿈에 그리던 자리에 왔다”며 “신경제와 구경제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아직 물건을 파는데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는 기존 기업들도 고객들에게서 뭔가를 배우기 위해서는 인터넷을 사용해야 한다”며 “고객들에게 인터넷에 접근할 기회를 준다면 그들이 각종 아이디어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 구경제 기업들도 좋은 웹사이트를 만들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다.그는 “구경제 기업들도 비용을 절감하고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인터넷의 이점을 살릴 수 있다”고 강조한다. 또 “현재 러버메이드는 아마존닷컴 등 인터넷망을 통해 판매되는 상품에도 객장에 장식하는 것처럼 비싸고 예쁜 포장을 하고 있으나 그것은 비용낭비”라며 “앞으로 인터넷소매상을 통해 상품을 팔 때는 싸고 평범한 박스로 상품을 포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노스캐롤라이나대학을 졸업하고 로욜라칼리지에서 MBA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