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품질로 외국산 밀어낸 일등공신, 해외서 주문 폭증 … 디자인 향상이 과제
이야기 하나. 지난 1월말 독일 프랑크푸르트. 26일부터 31일까지 세계 최대의 문구박람회인 프랑크푸르트메세가 열렸다. 세계 각국의 유명한 문구관련업체들이 저마다 제품을 갖고 나와 선을 보이고 거래상담을 하는 자리다.여기에 참가했던 동아연필의 윤창봉상무는 당시 맛본 쾌감에 요즘 하루하루가 즐겁다. “박람회에 참가한 국내외의 다른 업체들과 달리 선풍적인 인기였죠. 하루 평균 25개사에서 1백여명 이상이 매일(동아연필의)부스를 방문했으며 주문이 이어졌죠. 특히 한국상품가격에 비해 30%정도의 저가로 공세를 펼친 중국업체들보다 방문자수가 더 많았을 정도니까요. 올해에도 상당한 금액의 수출계약이 기대됩니다.”이야기 둘. 대형문구상들이 몰려 있는 서울 남대문시장. 신학기를 앞두고 필기구 화구 노트 등 각종 문구류를 구입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다. 이곳에서 파는 수천여종의 문구상품들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리는 것은 단연 필기구. 하지만 최근 2∼3년 사이에 과거와 달리 필기구 판매에 변화가 있다는 것이 아톰문구센터 이정섭차장의 말이다. “몇년전만 해도 수입 필기구가 주로 팔렸지만 최근 2∼3년 사이에 상황이 바뀌어 지금은 국산대 외국산이 7대 3의 비율로 국산이 잘 팔립니다.”국산대 외국산 판매비율 7대3몇년전만 해도 우리나라 필기구시장은 수입개방이후에 공격적인 외국업체들의 시장공략에 밀려 한동안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국내 필기구시장의 70% 이상을 수입품들이 차지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수출도 마찬가지였다. 기껏해야 동구나 아프리카 중동 남미 등으로 선적될 뿐 미국 유럽 등 선진국시장은 OEM수출외에는 거의 드물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국내 문구업체 가운데 세계시장에서 널리 알려졌던 마이크로를 비롯해 몇몇 대형필기구업체들이 부도로 문닫을 정도로 경영여건이 악화되면서 사양산업으로 거론되기도 했다.그러나 최근 필기구업체들이 다시금 기지개를 켜고 있다. 동아연필의 사례처럼 수출주문이 줄을 잇는가 하면 국내시장에서도 판매량이 외국산 필기구를 앞지르고 있다. 이러한 기지개를 켜도록 만든 ‘봄바람’이 바로 중성펜이다. 세계시장에서 외국업체들과 대등한 경쟁을 펼치는 수출효자상품으로 떠올랐으며, 수입제품이 장악했던 필기구 내수시장에서도 외국제품을 젖히는데 일등공신의 역할을 한 제품이다.단적으로 수출을 예로 들 수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 문구업체들의 필기구 수출실적은 12월말 기준으로 모두 1억5천8백만달러. 이는 99년과 비교해 약 40% 이상 늘어난 실적이다. 이러한 “필기구 수출실적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필기구가 중성펜”이라는 것이 한국문구공업협동조합 김수철상무의 말이다. 문구업체별로 보면 모나미의 경우 지난해 3천만달러의 수출실적 가운데 절반 이상을 중성펜 수출로 거뒀다. 동아연필도 지난해 2천2백만달러어치를 수출했으며 거의 대부분이 중성펜을 수출한 금액이다. “올해는 약 3천만달러어치를 수출할 계획이며 현재 주문이 밀려들지만 캐파(생산능력)가 달려 주문을 거절해야 할 정도”라는 것이 권국용전무의 말이다.이처럼 중성펜 수출이 늘어나는 것에 대해 한국문구공업협동조합 김상무는 “필기구는 모든 산업에 소요되는 원부자재들이 들어가고 제조에 축적된 기술이 있어야 가능한 소비재”라며 “중성펜의 개발국으로 지금 세계시장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일본제품과 대등하게 경쟁할 정도로 우리나라 중성펜의 품질이 뛰어난 반면 가격경쟁력이 높아 주문이 늘어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가장 큰 필기구시장인 미국에 중성펜을 만드는 문구업체가 없어 우리나라 업체들이 진출하는데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것이 김상무의 말이다.중성펜이 유성·수성펜시장 대체동아연필 디자인실내수도 마찬가지다. 중성펜의 사용이 늘면서 유성펜과 수성펜이 장악했던 필기구시장을 중성펜이 대체하고 있다. 아톰문구의 이차장은 “중성펜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전체 필기구 매출의 약 70%를 차지할 정도로 많이 팔리고 있다”고 말했다. 필기구 생산업체들도 같은 시각이다. 모나미 마케팅팀 허천회팀장은 “학생뿐만 아니라 성인용 필기구도 중성펜이 대세”라고 말했다. 일본산 수입제품에 비해 품질이 뒤지지 않는 반면 가격은 일본제품에 비해 저렴하니 소비자들로부터 반응이 좋다는 것이다. 여기에 덧보태 우리나라 필기구시장만이 가진 독특함도 중성펜이 시장을 장악하는데 일조했다.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대부분의 외국제품처럼 1mm에 가까운 굵은 펜보다 0.4∼0.7mm의 가는 펜을 선호해 외국업체들이 국내시장에서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 허부장의 말이다.중성펜을 중심으로 필기구시장이 되살아나면서 각 필기구 제조업체들도 경쟁적으로 중성펜생산에 뛰어들고 있다. 모나미 동아연필 문화 에벤에셀 자바 비탑 등 크고 작은 10여개 업체들이 중성펜을 생산하고 있다. 덕분에 중성펜은 약 5천억원으로 추산되는 우리나라 필기구시장에서 단일품목으로 가장 큰 매출을 올리는 상품이 됐다. “중성펜이 처음 선보였을 때 10대용 팬시용품이라는 시각으로 (문구업체들이)생산을 꺼렸던 분위기에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라는게 허부장의 말이다. 국내만이 아니다. 팬시용 필기구에 강점을 가진 대만, 저임을 무기로 한 저가의 필기구로 공세를 펴는 중국 등도 중성펜시장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각축을 벌이고 있다.이처럼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필기구업체들은 새로운 제품을 내놓는 등 시장에서의 몫을 더 키우기 위한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모나미는 반짝이는 젤잉크를 이용한 중성펜과 같은 여러 종류의 신제품과 팬시상품화를 통한 시장공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아울러 대형할인점을 통한 문구매출이 늘면서 할인매장을 전담하는 별도의 영업조직을 만들기도 했다.“할인점을 통한 매출이 매년 2배 이상 증가하고 금액도 전체매출액의 10%를 차지할 정도로 커져 할인점 문구코너를 중점적으로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 허부장의 말이다.동아연필은 기능을 보강한 신제품 개발과 함께 자체보유한 20여명의 디자인 인력과 아웃소싱을 하는 해외 유명 디자이너를 연계해 디자인수준을 높인 제품 개발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품질이 비슷한 만큼 디자인이 좋아야 경쟁력이 있다. 디자인이 뛰어난 만큼 스태틀러 로트링 에이버리 등의 세계적인 문구업체들이 독점 판매권을 달라고 요구할 정도가 됐다”는 것이 유창봉상무의 말이다.한편 이처럼 중성펜이 필기구시장에 훈풍을 불어넣고 있지만 아직 우리나라 문구업체들이 넘어야 할 과제들이 많이 있다는 지적도 일부에서 나오고 있다. 가장 많이 거론되는 내용은 디자인. 미국과 유럽의 환경 안전 등에 관한 까다로운 요구를 충족시키려면 기능과 디자인을 접목시키는 고도의 노하우가 필요한데다 필기구의 디자인이 매장에서의 구매와 연결되는 경향이 많기 때문이다.한국문구공업협동조합의 김상무는 “필기구는 산업수준의 척도”라며 “일본산을 100이라 했을 때 잉크의 경우 우리나라가 95정도지만 디자인은 그보다 못하다”며 디자인개발이 필요함을 지적했다. 아톰문구의 이차장도 “일본제품에 비해 디자인이 약간 처질 뿐 품질 가격 등에 있어서는 대등하다”고 평가했다. 이차장은 또 “캐릭터제품의 경우 항상 일본보다 늦으며 일본제품을 모방한 제품들이 많다”고 말했다.10대 필기구 구매행태 조사 / 두툼해진 필통 … 품질·디자인 가장 중시우리나라 필기구업체들이 중성펜을 무기로 국내외시장에서 다시 활력을 되찾는 것과 관련해 우리나라 필기구에 관련한 간략한 조사를 실시했다. 조사대상은 10대 학생으로 한정했다. 대량구매로 문구산업을 지탱해주던 기업체들이 사무자동화로 필기구소비가 줄어드는 반면 학생들의 필기구 구매는 여전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10대들은 필기만이 목적이 아닌 팬시용품으로 필기구를 챙기는 경우도 많아 디자인 등 필기구에 대한 다각적인 평가가 가능하다. 조사는 지난 5일부터 8일까지 서울시내 전역에서 10대 학생 1백명을 대상으로 한 대면설문조사로 이뤄졌다.먼저 주로 필기구를 구매하는 장소로는 학교앞이나 동네의 문방구점이 가장 많은 64%의 응답을 얻었다. 대형할인매장의 문구코너나 대형문구매장은 33%로 2위로 나타났다. “필요할 때마다 가까운 곳에 가서 사는게 편하다”는 것이 학생들이 설명한 이유다. 그러나 인터넷쇼핑몰을 통해 구입한다는 답은 하나도 없어 눈길을 끌었다.10대들이 평소 갖고 다니는 필기구의 숫자는 3개 이하가 가장 많았지만 10개 이상을 갖고 다니는 학생들도 44%나 됐으며 20개 이상을 지니고 다니는 학생도 9%나 됐다. 필통이 두툼해진 것이다.“색깔별로 구입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며, 몇몇 은 수집하듯 여러 개의 필기구를 갖고다닌다”는 것이 육근희(정원여중 1년)양의 말이다. 또 필기구 가운데 10대들의 필통을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것은 볼펜류였으며 연필류 마킹펜류가 뒤를 이었다. 볼펜류의 대부분은 중성펜이었다.또 10대들은 필기구 구입시 품질을 가장 중요시하며, 디자인 가격도 매우 꼼꼼히 따져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필기구 브랜드나 어느나라 제품이냐는 그리 따지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어느 나라의 필기구를 주로 구입하느냐는 질문에서도 가장 많은 대답이 국산(39%)으로 33%의 답을 얻은 일본을 앞질렀다. 하지만 “일제가 국산에 비해 필기감이 부드럽고 잘 써지는 것은 대다수 학생들이 인정하는 일”이라는 이명(명지중 1년)군의 말처럼 학생들 사이에서는 일본 필기구에 대한 평가가 높다.외산과 비교해 국산 필기구를 평가하는 질문에서 학생들은 품질이 비슷하다는 답이 가장 많았으며 전체적으로 품질이 좋다는 응답이 나쁘다는 응답보다 많이 나왔다. 가격도 외국산에 비해 싸다는 답이 많았다. 그러나 디자인(포장)에 있어서는 외국산에 비해 뒤진다는 평가가 많았으며, 기능(성능)에서도 수입제품들이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결국 품질과 가격에서는 국산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지만 디자인과 기능(성능)면에서는 아직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 10대들의 평가다.★ 중성펜 / 수성·유성펜 장점만 쏘옥~필기구는 흔히 연필류(연필 샤프펜슬 색연필 등) 볼펜류(유성펜 수성펜 중성펜) 마킹펜류(형광펜 매직펜 사인펜 등) 등 3가지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중성펜은 필기구 끝의 볼을 타고 나온 젤타입의 잉크가 종이에 스며드는 볼펜의 일종. 수성잉크를 사용하는 펜과 유성잉크를 쓰는 펜의 중간이라고 해서 중성펜이라 불린다. 수성잉크펜의 경우 필기감이 부드러운 대신 물에 번지거나 뚜껑을 닫지 않으면 증발해 수명이 짧아지는 단점이 있으며 유성잉크펜은 물로 인한 번짐이나 증발이 없지만 잉크찌꺼기가 나오거나 필기감이 수성만 못한 단점이 있다. 이러한 수성펜과 유성펜의 장점만을 취합한게 중성펜이다. 젤타입의 잉크를 사용한다고 해서 ‘젤펜’으로도 불린다. 지난 90년대 초반 일본업체들이 처음 개발해 제품을 내놓았으며, 국내업체들은 이보다 1∼2년 가량 늦게 중성펜을 개발했다.©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