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스닥거품이 꺼지면서 미국의 닷컴업체들이 최악의 상황이다. 한창 뻗어나갈 것 같던 e비즈니스도 멈칫하고 있다. 그러나 다 죽으라는 법은 없다. 닷컴들의 공동묘지속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성장하는게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새 생명은 흘러간 산업으로 여겨졌던 제조업의 뿌리에서 돋아나고 있다.WWW(World Wide Web)의 시대가 오기전에 기업들은 대부분 물건을 직접 만들었다. 그러나 WWW시대에선 물건을 직접 만드는 작업은 돈도 되지 않고 촌스러운 일로 여겨졌다. 그래서 아웃소싱산업이 발달했다. 거품 붕괴로 닷컴업체들은 비틀거리지만 공장을 두고 직접 제조하는 아웃소싱업체들은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플렉스트로닉스, 에릭슨과 계약 ‘주목’플렉스트로닉스(Flextronics)-. 지난해까지 개인용 컴퓨터나 일반 가전제품을 조립해주는 그저 그런 회사로 별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새해들어 스웨덴의 통신 거인인 에릭슨과의 계약이 발표되면서 일약 스타가 됐다. 핸드폰으로 유명한 에릭슨이 자신의 공장과 공장 운영을 모두 플렉스트로닉스에 넘겨 핸드폰을 생산한다는 발표다. 무려 연간 50억달러에 이르는 규모의 계약이다.플렉스트로닉스가 언론의 주목을 받은 것은 물론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마이크로소프트와 계약을 맺을 때도 잠깐 비쳤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소니 닌텐도 등 일본의 거대 게임기업체들과 경쟁하기 위해 올 가을 출시 예정인 X-박스 비디오게임기 생산업체로 선정됐을 때였다.하지만 당시는 닷컴업계가 잘 나갈 때인데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게임기산업 진출이 워낙 화제가 된 터여서 플렉스트로닉스는 ‘엑스트라’급에 불과했다.지금 플렉스트로닉스를 이끌고 있는 마이클 E.마크스 회장 겸 CEO가 지난 93년 이 회사를 인수했을 때는 미국내 전자제품조립업체중 매출 순위 22위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7년 조금 지난 지금은 솔렉트론(Solectron)에 이어 당당히 2위를 차지하고 있다.전세계 27개국 1백50개의 공장에서 7만명이 넘는 종업원들이 일하고 있다. 요즘엔 마이크로소프트의 X-박스 게임기를 생산할 대형 공장을 멕시코 과달라하라와 헝가리의 탭에 세우고 있다. 이 두 공장의 16개 조립라인에서는 올 가을부터 대당 4백달러짜리 게임기가 2백만개 쏟아져 나올 예정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게임박스와 에릭슨의 핸드폰은 지난해 1백20억달러였던 이 회사의 매출을 올해 67% 늘어난 2백억달러로 끌어 올릴 것으로 전망된다.WWW시대의 아웃소싱은 마크스회장의 아이디어가 아니다. ‘머리’만 사용해 돈을 벌고 ‘손발(제조업)’을 쓰는 일은 하지 않으려는 닷컴들이 부상하면서 생긴 결과물이다. 반도체회사들은 디자인에만 초점을 맞추고 아웃소싱을 통해 칩을 생산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 됐다.결국 많은 반도체업체들이 값싼 노동력을 찾아 해외로 공장을 옮겼고 컴퓨터메이커들도 그 길을 따라 나섰다.플렉트로닉스는 에릭슨과의 계약이 발표되면서 일약 스타기업이 됐다.플렉스트로닉스의 마크스회장이 다른 점은 생산공정 전체를 책임지는 ‘오퍼레이션 매뉴팩처링’을 한다는 점이다. 주문이 떨어지면 원료구매부터 배달까지 모든 과정을 책임지는 식이다. 인텔의 칩이 컴퓨터 속에 있다고 했서 ‘인텔 인사이드’라고 불리는 것처럼 플렉스트로닉스는 겉에 붙은 상표를 빼면 모두 플렉스트로닉스제품인 ‘플렉스트로닉스 인사이드’라는 애칭을 얻기도 했다.그러나 플렉스트로닉스의 결정적인 특징은 유연(Flexible)이란 단어에서 회사 이름을 따왔을 정도로 빠르고 유연한 변화에 있다. 출근길에 운전대를 돌리듯 회사를 바꿀 정도로 빠르게 변하는 사회에서 한 상품만 고집해서는 곤란하다. 어떤 주문도 빠른 시간내에 소화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제조라인의 변화를 매우 쉽게 하는 것은 물론 부품 공급 과정을 아주 짧게 해야 한다. 결국 1주일 이상 걸리던 제조시간을 하루 이내로 줄였을 정도다. 새로 짓는 과달라하라공장에는 부품 생산라인 바로 옆에 최종 조립라인이 있을 정도다.현재 이 회사의 가장 큰 매출은 통신부문으로 전체 매출의 34%를 차지한다. 그러나 다른 부문을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 지난 봄 마이크로소프트의 게임기 박스를 수주한 것을 계기로 다양한 제품 수주와 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환경수립에 골몰하고 있다. 이를 위해 전자제품을 디자인하고 사후관리까지 담당하는 그룹을 인수한 것과 팔로 알토 프로덕트(Palo Alto Products)의 매입은 그 일환이다.팔로 알토 프로덕트의 창업주이자 CEO였던 짐 새커만은 지금 수석부사장으로 플렉스트로닉스의 회장실 옆에서 마케팅 부문을 이끌고 있다. 그의 주된 임무중 하나는 서비스의 다양화이다. 최근 철저한 아웃소싱 옹호론자인 시스코시스템스의 존 챔버스회장과 함께 시스코의 고객이 인터넷으로 주문을 하면 곧바로 인터넷을 통해 플렉스트로닉스의 공장에서 오더가 내려가 생산에 들어가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일반고객-인터넷업체-생산공장을 리얼타임으로 연결하는 시스템인 셈이다.모토로라 공장 해외 이전 등 전망밝아유연한 경영을 위해 마크스회장은 제조공장에도 실리콘밸리의 문화를 적용했다. 관료주의를 없애기 위해 회의를 거의 하지 않는다. 여러 시간 함께 토론하는 것보다 매니저들에게 의사결정권을 분명히 주고 책임껏 일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해 준다.하지만 이런 아웃소싱에 문제점이 없는 것도 아니다. 직접 경쟁업체들의 제품을 생산하게 될 경우 계약 당사자들이 우려를 많이 한다. 예를 들어, 에릭슨과의 계약은 경쟁업체인 모토로라와 3천만달러어치의 5년 계약을 한뒤 1년도 못되어 이뤄졌다. 일부에서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비난하기도 한다.그러나 플렉스트로닉스측은 서로 넘볼 수 없는 장벽인 ‘화이어 월’을 세울 능력이 충분히 있다고 말한다. 경쟁사들이 서로 정보를 누출하지 않을 수 있는 완벽한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다는 설명이다.이같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아웃소싱산업은 앞으로 더욱 각광받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모토로라가 모든 제조공장을 해외로 이전할 것이라고 발표한 것은 아웃소싱산업의 전망을 더욱 밝게 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