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러 가기 겁난다는 말은 10년 전에도 했다지만 요즘엔 정말 그래요. 할인점, 재래시장 할 것 없이 ‘왜 이렇게 비싸요’ 라는 말부터 나온다니까요.” 지난 3월3일 주말 오후 서울 성동구 L할인점 식품매장에서 만난 전업주부 박은영씨(28)는 “공과금부터 식료품 가격까지 모든 게 너무 올라 가계부만 보면 속이 답답하다”고 말했다. 임신 8개월째인 박씨는 “아기가 태어나면 생활비가 더 들텐데”라며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체감 물가가 큰 폭으로 뛰고 있다. 올해 들어 전국 각지에서 도시가스 사용료(2000년2월 대비 22.6%), LPG가스 가격(30.8%), 시내버스료(18.6%), 상수도료(8.1%) 등이 일제히 올랐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공공서비스 부문이 13.6%, 공업제품이 3.8%, 개인서비스는 2.8%가 올라 작년 이맘때보다 전체적으로 4.2%의 소비자물가가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대부분의 가정이 매달 지출해야 하는 ‘고정비용’이 크게 올라 서민경제 기반이 흔들린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실제로 고정비용 가운데 대표적인 부식류 가격은 상승폭이 엄청 나다. 고등어(49%), 마른 멸치(63.8%), 밀감(32.1%), 달걀(25.7%), 양파(22.8%) 등은 ‘폭등’이라고 할 정도여서 주부들의 장바구니를 가볍게 만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의약분업 시행으로 투약 및 주사료가 76.9%나 올랐고 진찰료(43.3%), 분만료(31.4%) 등도 크게 올랐다.“저축은커녕 생활비도 빠듯”고공 행진을 계속하는 물가 때문에 장기간 적자를 면치 못하는 도시근로자 가정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올해로 결혼 2년째인 박씨는 “저축은 꿈도 못 꾼다”고 털어놓는다.중소 건설업체에서 주임으로 일하는 남편 김영호씨(가명·29)가 받는 봉급은 한달 평균 1백20만원 정도. 서울 성동구 금호동의 15평짜리 다세대주택에 세들어 살고 있는 이들은 대출금 이자, 자동차 할부금, 휘발유값 등이 가장 큰 부담이다. 99년 10월 결혼할 때 시중은행에서 2천만원의 전세자금을 대출받아 올 10월까지 매달 16만원 안팎의 이자를 물어야 한다. 박봉에 ‘생돈’이 나가는 것 같아 아깝기 그지없지만 원금을 상환할 능력이 없어 계약을 연장해야 할 형편이다.남편이 결혼 전에 구입한 소형 자동차 할부금도 올 7월까지 계속 내야 한다. 매달 할부금 25만원에 휘발유값이 15만∼20만원. 곧 돌아오는 자동차보험 재계약도 걱정이다. 얼마전 남편의 회사가 시 외곽으로 이전해 자동차를 쓰지 않을 수도 없다.임신한 후로는 병원비가 만만찮게 들어가고 있다. 정기검진 때마다 3만원 선의 진료비가 드는 데다 의료보험 혜택이 없는 ‘필수 검사’를 받으려면 ‘목돈’이 필요하다. 얼마 전에는 태아에 이상징후가 발견된다고 해 12만8천원을 들여 특수 초음파검사를 했지만 결과는 ‘이상없음’으로 나왔다.도시가스료, 상수도료, 통신비, 경조사비 등이 평균 17만원 선, 남편 용돈 20만원에 부식비 20만원까지 합하면 월 고정 지출만 1백20만원 안팎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적어도 월 20만 이상 더 필요하다는데 저축해 둔 건 없고 물가는 오르고….” 마이너스 숫자만 잔뜩 찍힌 통장을 바라보는 박씨 눈가에 걱정이 가득했다.초등학생 사교육비에 허리 휘어학생을 둔 가정은 교육비가 ‘주적’이다. 올해 초등학교 2학년이 된 쌍둥이 딸 아빠인 H그룹 강지석(가명·36)과장.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간 지난해부터 ‘적자 순환’이 무엇인지 피부로 느끼고 있다.월 평균 2백40만원의 봉급을 받는 강씨는 봉급의 40% 가까운 금액인 92만원을 교육비 명목으로 지출하고 있다. 바이올린, 피아노, 태권도, 미술, 영어, 글쓰기, 신문활용교육 등 7가지가 두 딸이 받는 사교육 내용. 부인 정아라씨(34)는 “그래도 이웃 아이들보다 두 가지 정도 덜 하는 셈”이라고 말한다. 수영, 발레, 학습지까지 합쳐 줄잡아 8가지 이상 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는 얘기다. 그나마 신문활용교육과 영어교습은 ‘시세’의 절반 비용으로 가르치고 있다. 구청에서 운영하는 강좌에 신청하기 위해 새벽부터 나가 기다린 덕분이다. 나머지 교습비는 지난해보다 5천∼2만원이 오른 수준이다.지난달엔 아이들 충치를 치료하러 갔다가 혼이 났다. 썩은 부분을 긁어내고 덧씌우는 치료에 총 44만원이 들어갔기 때문. 의사는 “영구치인데 좋은 걸로 해 주라”며 가장 비싼 재료를 쓰라고 권했다. 물론 의료보험 혜택은 받지 못했다.지난 2월 강씨 가족의 총 지출은 2백44만원. 변변한 외식 한번 한 것도 아닌데 적자가 났다. 강씨는 “아이들이 입학한 다음부터 ‘짠돌이’라는 별명을 얻었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한달 30만원의 용돈으로는 점심값과 담배값, 교통비도 빠듯해 예전처럼 ‘술 한잔 사는 일’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외국으로 떠나지 않는 한 현실이 바뀌진 않는다”는 게 강씨의 마지막 변론이었다.물가오름세 계속 ‘한숨만’지난 3월1일 저녁 김대중대통령은 ‘국민과의 대화’에서 “올 물가인상폭을 3% 이내로 억제하겠다”고 말했다. 또 “상반기 중 공공요금 인상은 더 이상 없도록 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1∼2월 소비자물가지수는 이미 전년대비 4%대를 넘어섰다. 98년11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게다가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공공요금 인상률이 7.09%에 달해 물가상승 압력의 가장 큰 요인이었던 것으로 분석됐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4월부터 시내전화 기본료를 48% 올리고 서울 지하철의 부채를 줄이기 위해 2007년까지 매 2년마다 구간요금을 1백원씩 올리기로 결정했다. 하반기에는 공공요금 인상 요인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는 풍문도 들린다. 강씨는 “일반인에겐 물가가 매달 하늘을 향해 치솟는 것처럼 느껴진다. 정부가 말하는 물가와 도시 근로자의 물가는 서로 다른 개념인 모양”이라고 꼬집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