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달금리 하락 등 인하요인 생겼으나 시간끌기로 일관…'배짱 영업'에 소비자 직접 행동 움직임
“아직 결정된 바 없습니다.”(LG캐피탈)“향후 어떻게 할지 검토중입니다.”(삼성카드)카드사들은 지나치게 높은 현금서비스 수수료·연체이자율로 공정위의 철퇴를 맞았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를 조정한 카드사는아직 한 군데도 없다. 어떻게 조치할 계획인가를 묻는 질문에 카드사들은 마치 짠 것처럼 같은 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3월14일 BC카드 및 12개 회원은행, LG캐피탈, 삼성카드 등에 대해 수수료율 조정 명령을 내렸다. 신용카드업시장 실태를 조사한 결과 지난 98년1∼2월 금리인상 등을 이유로 현금서비스수수료율, 연체이자율 등을 대폭 인상한 후 이제는 조달금리가 하락했음에도 이를 부당하게 유지했다는 것이 명령의 골자. 공정위는 각 사가 시정명령을 담은 심결서를 발부받은 날로부터 60일 이내에 조치해 그 결과 보고를 주문하고 있다.공정위가 카드사에 조정명령을 내린다는 사실을 언론에 공표한 것은 3월14일. 심결서는 이로부터 2주가 지난 28일 발부됐다. 그간 카드사들은 이 시차를 이용, ‘공문도 받지 않았는데 대응 방향 운운할 때냐’고 버텨오다가 심결서가 도착한 28일 이후부터는 ‘지금 논의중이다’라고 말만 바꿨을 뿐 여전히 눈치보기와 문제 회피로 일관하고 있다. 금융계 주변에서는 일단 최대한 시간을 끈 다음 시정명령에 대해 이의 신청이나 행정소송을 제기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는 얘기가 나온다.“수익내는 게 잘못됐나” 되레 항변그렇다면 여론의 뭇매를 맞으면서도 카드사들은 왜 이렇게 버티고 있을까. ‘맷집’이 좋아서? 물론 수익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1% 인하해 봐야 여론은 만족하지 않을 것이고 생색도 안난다. 하지만 카드사 입장에선 1%면 6천억원이 눈앞에서 사라진다. 버티지 않을 기업이 어디 있겠는가”(여신금융협회 박세동 이사)라는 것이 카드사들의 항변이다. 각사들도 비슷한 속내를 털어놓는다. “억울하다. 지난해 수익이 좋았다고 수수료를 깎으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기업이 수익을 내는 것이 잘못된 일인가.”(삼성카드 고영호 과장)그러나 BC카드 12개 회원은행은 현금서비스 평균 수수료율을 금리 상승과 리스크 증가 등을 이유로 종전 20.3% 에서 97년 11월에 21.6%로, 98년 2월 22.9%, 99년 10월 23.4%로 비슷한 시점에 거의 같은 요율로 인상했다. LG캐피탈과 삼성카드 역시 각각 99년4월 28.1%, 99년 3월 28.16%로 인상한 후 현재까지 이를 유지하고 있다.(표 1참조) 할부이자율, 연체이자율도 이와 비슷하다. 반면 자금조달금리는 98년 1분기 12.6%(LG캐피탈), 15.18%(삼성카드) 에서 2000년 4분기에는 각각 9.4%와 9.82%로 낮아졌다. 같은 시기 연체율 감소폭도 무려 74%, 86%에 달했다. (표2참조) 비용요인이 발생하면 지체없이 수수료를 올리고 비용절감 요인이 생겼을 때는 이를 슬쩍 외면한 것이다.인상요인은 즉각 반영, 인하는 ‘나몰라라’카드사들의 논리대로 수수료율을 시장자율에 맡기는 것은 시장경제의 원칙. 그러나 카드사들은 담합이라는 행위로 이같은 자율경쟁의 원칙을 스스로 위반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담합에 대해 삼성카드 고영호 과장은 “상위 3개사의 시장점유율 합계가 지난해말 기준으로 75%가 안된다. 그런데 과점시장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또 12개 은행들이 독자적으로 영업하는데 BC카드를 단일업체로 볼 수 없다”며 반발했다.그러나 담합이라는 불공정행위의 증거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급팽창하는 카드시장에서 시장점유율을 조금이라도 더 높이기 위해 카드사들은 지난해부터 치열한 마케팅 전쟁을 펼쳤다. 고객층을 특화한 카드 등 신상품이 쏟아졌고 다채로운 서비스 개발과 이벤트 개최 등이 줄을 이었다. 그런데 유독 최우선 경쟁수단인 가격차별화만은 일어나지 않아 평균적으로 높은 수수료율이 유지됐다. 또한 신용카드시장은 이제까지 제도적 진입장벽이 있어 95년 이후 새로 사업에 진출한 회사가 없었다. 기존 카드사간에 안정적인 시장구조가 존재해 온 것이다.겉으로는 ‘얘기할 것이 없다’는 카드사들도 현재 내심 이만저만 고민이 아니다. 최근 카드사들의 대응을 보면 ‘물타기’를 통해 수수료 문제를 흐지부지 넘기려 할 가능성도 엿보인다. 높은 수수료가 사회적으로 질타를 받자 최근 각 카드사는 “이미 지난해부터 고객별 신용등급을 평가, 스코어링 시스템에 따라 신용 한도를 정하고 수수료를 차등화 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녹색소비자연대 신용경제팀 박진성 팀장은 “이같은 금리차등화를 통해 얼마나 많은 수의 고객에게 얼마나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갈지는 미지수”라고 반박했다.고객 신용도따라 차등금리 적용 ‘물타기’카드사들에 여론이나 감독기관보다 더 무서운 것이 수익성 악화. 모 카드사의 한 임원은 “최근 기업이미지가 크게 나빠져 고객이 떨어져 나갈까봐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이들은 지금 수수료를 인하함으로써 잃게 되는 수익과 여론을 거스름으로써 잃게 되는 수익을 양쪽에 놓고 열심히 저울질해보고 있다.이같은 시간 끌기가 가능한 것과 관련, 공정위의 명령이 과연 철퇴였는가 솜방망이에 그칠 것인가를 두고도 끊임없이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시정명령에는 수수료 인하 가이드라인이 없고 부과한 과징금도 모두 80억원으로 크지 않은 금액이다. 공정위 독점정책과 김성근 사무관은 “수수료 인하폭을 심결서에 제시하는 일 자체가 불공정거래행위인데 공정위가 그런 일을 한다는 게 말이 안된다. 앞으로 2개월 이내에 각사들이 보고하는 내용을 검토해 적정한지 판단, 이에 적당한 조치를 취하게 될 것”이라는 원칙만 확인했다. 카드사들이 시간 끌기를 계속하고 앞으로도 행정소송 등으로 이의를 제기할 경우 당분간 수수료 인하는 요원한 일이 될 가능성도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금융감독원의 감독 태도도 신용카드사들의 배짱 영업에 한 몫 했다는 지적이다. 비단 수수료 문제 뿐 아니라 카드업은 발급 방법, 채권추심, 부정사용에 대한 과실책임 등 소비자들의 민원 및 고발이 가장 많은 업종이고 이는 여전히 줄지 않고 있다. 작년 한햇동안 금감원 소비자보호실에 접수된 신용카드 관련 민원은 모두 1천33건으로 99년의 6백49건에 비해 60%나 늘어났다. 그럼에도 금감원의 감독은 곳곳에서 허술함을 드러내고 있다.한 예로 지난 2월27일 신용카드 회원 유치 과당경쟁을 방지하고 감독을 강화한다는 방안을 발표했다. 카드사가 본인 확인 의무와 회원 자격 심사를 철저하게 이행하도록 감독 검사를 강화하겠다는 것이었다.그러나 이로부터 한 달 후인 3월26일 녹색소비자연대가 ‘신용카드 남발 실태’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카드 거리모집에서 불거지는 문제점들은 별로 개선되지 않았다. 서울시내 24개 지역 신용카드 가두판매대 41곳 중 95%가 신분증을 확인하지 않고 신용카드 발급 신청을 받고 있어 명의 도용이 가능했고 신청 후에도 본인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이럴 경우 지불능력이 없는 청소년 등이 형제나 부모 몰래 카드를 발급받아 후에 독촉을 받게 되거나 주민등록번호나 남의 신분증을 훔쳐 카드를 발급받는 등의 문제가 발생한다.뿐만 아니라 이같은 마구잡이 발급은 신용불량자를 양산하고 각종 비용의 낭비를 초래한다. 2000년말 기준 발급된 카드 중 휴면카드가 3분의 1이나 된다. 신규회원 모집에 쏟아부은 2천억원의 비용이 소비자에게 높은 수수료로 되돌아 오는 것이다.정보 공개로 카드사끼리 경쟁 유도해야녹색소비자연대 박팀장은 카드사의 횡포를 견제할 수 있는 방안으로 정보 공개에 대해 거론했다. 현재 카드사들이 제공하는 각종 서비스, 금리 등이 지나치게 복잡해 카드사별로 일목 요연한 비교가 어렵기 때문에 우위에 있는 상품을 선택할 수 있는 소비자의 선택권이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카드사끼리 경쟁을 시켜 더 저렴한 가격에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유도하겠다는 의견. 소극적이긴 하지만 녹색소비자연대가 추진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이다.카드사측의 무리한 채권 추심에 피해를 입고 안티LG카드 사이트를 운영하게 된 박응식씨는 이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그는 카드사뿐 아니라 불공정한 행위를 강력하게 제재하지 못하거나 또는 의지가 의심스러운 감독당국, 소비자 및 시민운동 단체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불만을 표시했다. “굳이 새로운 규정을 만들 필요도 없다. 카드사들의 횡포를 막을 수 있는 각종 법적 근거가 마련돼 있는데도 이를 강력하게 집행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카드사들은 ‘작년에 수익 좀 났다고 수수료를 문제삼는다’고 볼멘소리를 하기 전에 어느 안티신용카드 사이트에 한 네티즌이 올려 놓은 글을 통해 소비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는 것은 어떨까. “외국의 기업들이 새로 시장을 개척할 때 큰 돈을 들여 이미지 광고를 내보내고 이익 사회환원 프로그램을 가동하는 건 기업주의 선량함 때문이 아니라 장기적인 이익을 기대하는 투자 차원이다. 국내 카드사들에 이런 현명함과 긴 안목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인가.”인터뷰 / 박응식 안티LG카드 사이트 운영자“자성 노력없으니 소비자가 나설 수밖에”“당장 갚지 않으면 신용불량자로 등록하고 사기죄로 고소합니다.” ‘법 운운’하는 채권추심담당직원의 이 한마디가 꾹 참고 있던 그를 자극했다. ‘나에게 법을 들먹여?’ 박응식씨(36)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고 대기업 법무 파트에서 근무했으며 현재 ‘차이나시스’라는 중국투자 법률 컨설팅사를 경영하고 있다. 서민들은 지식이 없어 ‘법’만 거론하면 덜컥 겁을 집어먹는 게 보통. 이런 약점을 교묘히 이용하는 카드사들의 방식에 분노가 폭발했다.연체한 사용대금이 겨우 10여만원, 보름 남짓 지났을 뿐인데도 카드 사용 대금 갚기를 독촉하는 직원의 한마디 한마디가 고압적이고 불손하기 짝이 없어 잔뜩 화가 나 있던 터였다.이같은 일을 몇 차례에 걸쳐 반복적으로 당한 그는 감정 대응을 넘어선 행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됐고 인터넷의 안티 사이트들을 뒤져보고 이에 만족하지 못해 올해 2월 스스로 안티LG카드 사이트(www.xlgcard.com)를 만들었다.욕설로 도배되기 쉬운 여느 안티사이트와 다른 점은 처음부터 법적 대응을 염두에 두고 사이트를 열었다는 것이다. 카드사의 부당한 횡포에 법적 제재를 가해 선례를 남긴다면 다른 이들이 앞으로 입을 수 있는 피해를 방지하거나 훨씬 쉽게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재 사이트를 통해 원고를 모집, 이들과 함께 소송을 준비하는 중이다. 2명의 변호사와 법대 교수 1명 등으로 자문위원단도 구성하는 등 그는 체계적으로 준비해 나가고 있다.박씨는 카드사의 횡포가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하기 때문에 끊이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사측은 일부 직원의 개인 자질 탓으로 돌려 본질을 흐리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회수율 실적으로 직원들을 몹시 다그쳐 무리한 추심을 할 수밖에 없도록 유도하는 회사 시스템 자체의 문제로 바라봐야만 합니다.” 일단 협박이나 인격을 훼손하는 무리한 채권 추심 등 불법행위를 한 LG캐피탈 및 미래신용정보의 직원을 대상으로 소송이 준비되고 있다. 그는 이 문제뿐 아니라 본인확인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부정발급으로 인한 피해 등 다양한 불만이 많기 때문에 계속해 2차, 3차 소송도 할 수 있다며 강한 의지를 표현했다. “기업이 자성 노력도 보이지 않고 감독 당국도 솜방망이라면 소비자가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죠.” 일이 너무 커져서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그는 ‘법 공부한 사람으로서 보람있는 일’이라 믿고 있다.©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