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눈치보느라 영업 뒷전, 경쟁력 약화 … “시장 자율에 맡겨라” 목소리 높아

‘이대로 가면 80%는 실패한다’ ‘사용자 공급자 모두 피해를 볼 수 있다’ ‘자칫 ERP 시장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산업자원부 산하 중소기업청이 추진하고 있는 ‘1만개 중소기업 ERP 구축 사업’에 대한 업계의 불만섞인 목소리다. 이런 불만은 또다른 사업에서도 터져 나오고 있다. 바로 ‘11개 업종 B2B 컨소시엄 지원 사업’이다. 이 사업은 산자부가 직접 챙기고 있다. 이 사업에 대해선 ‘민간자율에 맡겨라’ ‘경쟁력 제고는 없고 혼란만 생긴다’ 등 말들이 많다.올 초부터 업계를 뜨겁게 달궜던 정부 주도 양대 정보화 사업이 출발부터 삐걱거리고 있다. 이들 사업에 정부가 올해 지원하는 자금은 1만개 중소기업 ERP(전사적자원관리) 구축 사업 1백33억원, 업종별 B2B 컨소시엄 지원사업 60억원이다.정보통신업계에서는 중기청과 산자부가 주관하는 중기 정보화 사업에 대해 시장을 왜곡, 위축시킬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그런데 요즘 이 사업에 대해 업계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들이 있다.두 사업에 대한 업계의 공통된 불만은 정부가 사업을 주도하면서 시장을 왜곡, 위축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중소기업 ERP 구축사업에 참여한 업체 관계자는 “ERP 솔루션 업체로서 참여할 수밖에 없다”며 “정부 프로젝트에도 끼지 못하는 업체, 솔루션이라고 낙인이 찍히면 비즈니스는 더 이상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B2B 컨소시엄 사업도 마찬가지다. 컨소시엄에 참여한 한 업체 관계자는 “당장 수익도 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경쟁력을 올리는 것도 아닌데 참여하는 이유는 빠지면 시장에서 왕따 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모두 참여하는데 의의가 있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 잘못된 심사로 해당 사업에 끼지 못할 경우 업체의 불만은 한층 강할 수밖에 없다. 양대 사업의 문제점을 짚어본다.중기청, 1만개 중소기업 ERP구축 사업“이 프로젝트 때문에 지난 2개월간 사업을 제대로 못했어요. 사업에 참가하기 위해 인력과 시간을 투여한 것은 물론 계약단계까지 간 사이트들이 정부 지원금을 받기 위해 계약을 미루는 등 영업에 막대한 지장을 받고 있습니다.” ERP 솔루션 업체 A사 K사장의 불만이다.또다른 ERP 솔루션 업체 L사장은 “정부가 기본형 ERP, 고급형 ERP로 등급을 정하는 과정에서 ERP 솔루션 업체의 능력이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중기청은 기본형ERP는 재고, 생산, 영업, 구매관리 등을 지원하는 것으로 고급형은 기본형에 기준생산계획, 전자상거래 등을 지원하는 솔루션으로 구분했다.중기청은 4월초 1만개 중소기업 ERP 구축사업(이하 ERP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ERP 솔루션 업체 2백70개를 1차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중기청은 학계, 유관기관 등에서 전문가 50명을 구성해 뽑은 결과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업계에 ERP 솔루션 업체로 정평이 나 있는 몇몇 업체가 탈락하는 이변(?)이 발생하자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사업자 선정에 떨어진 H사와 D사 대표들은 소프트웨어산업협회 산하 ERP협의회 이름으로 중기청에 해명을 요구하고 나섰다. 업체 대표들은 “사업자 선정에 문제가 있다”며 “재심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 업체는 4월16일까지 중기청의 답변을 받은 후 17일쯤 향후 대응책에 대해 공식입장을 발표할 예정이다.이에 대해 중기청 정보화지원과 유지석 서기관은 “고급형 ERP 부문에서 1차로 선정된 50개 업체에 대해 실사한 뒤 4월말 최종 확정할 계획”이라며 “탈락한 업체에 대해선 그 이후에 재심을 할 것인지 아닌지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유서기관은 구체적으로 무엇 때문에 탈락했는지에 대해선 답변을 회피했다. 이같은 문제가 발생하자 업계에선 ERP사업 본질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나타내면서 탈락 업체는 정부에 미움을 받아 그런 불상사가 생겼다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다. 업체 관계자는 “ERP 솔루션이 워드프로세서처럼 쉽게 구축되는 것이 아니다. 기업의 전산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때문에 경영진의 변화에 대한 마인드가 필요하다”며 “제대로 된 솔루션과 인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실패할 공산이 크다”고 말했다.사업이 실패하면 사용자와 공급업체 양측이 모두 피해자라는 데 문제가 있다. ERP 솔루션 구축에 실패한 기업은 정부의 정보화 정책에 강한 불신감을 갖게 될 것이고, 다른 사업까지 미뤄가며 매달렸던 ERP 솔루션 업체는 사업에 큰 타격을 입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중기청의 올해 ERP사업은 3천개 기업에 회계 등 단순 소프트웨어를 무료로 설치해주고 8백개 기업에 대해선 기본형 ERP를, 2백개 기업엔 고급형 ERP를 구축한다는 방침이다. 정부의 지원금액은 한 기업당 1천만원에서 2천만원이다.산자부, 업종별 B2B 컨소시엄 지원사업“시계, 공구라는 업종도 있나요? 정부가 어떤 기준으로 선정했는지 모르지만 업종이 아니라 품목에 해당하는 컨소시엄을 선정해 놓아 이것이 정말 업종별 경쟁력을 강화시키려는 의도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이번 11개 업종 B2B 컨소시엄 선정에 대한 업계의 공통된 지적이다.산자부는 지난 4월10일 기존 9개 업종별 B2B컨소시엄에 이어 11개의 업종별 B2B 컨소시엄(이하 B2B컨소시엄)을 선정했다. 그 결과 시계, 산업용파스너, 공구, 농축산물, 건설, 정밀화학, 금형, 석유제품, 골판지, 가구·목재, 물류 등이 나왔다. 업종과 품목이 뒤섞여 있는 모양이다.또 한개의 컨소시엄에 너무 많은 업체가 참여한 것도 문제라는 지적도 나왔다. 선정된 컨소시엄은 적게는 27개에서 많게는 95개 기업이 참여했다. 이점에 대해 그 동안 중복, 산재돼 있는 B2B 사업을 주요 업종별로 묶어 글로벌 스탠더드 수준으로 올려보겠다는 정부의 의도가 무색해졌다고 업계는 입을 모은다. 지금처럼 컨소시엄을 구성할 경우 ‘팬티 컨소시엄’도 나올 수 있다고 업계는 꼬집기도 한다.이처럼 참여업체가 대폭 늘어난 것에는 그만한 배경이 있다. 컨소시엄 선정 막판에 수 십개의 컨소시엄들을 통합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물류 업종에 선정된 한국통합물류컨소시엄에는 (주)한진, KTNet, 아이비젠, 이알하우스 등이 참여했는데 이들 업체는 각각 컨소시엄을 구성해 경합을 벌였던 업체들이다. 그런데 선정 막바지에 각각의 컨소시엄을 해체하고 한곳으로 모인 것이다. 일단 선정되고 보자는 마음이 강했다는 얘기다.이에 대해 업계에서는 ‘ERP사업’과 마찬가지로 B2B 컨소시엄도 참여하지 못하면 시장에서 ‘왕따’당한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 업체 관계자는 “사업자 선정 일정이 나오면서 대부분의 업체들이 컨소시엄에 끼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업체들의 참여 노력이 컨소시엄을 통해 수익을 올리거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참여하지 못해 당하는 불이익을 없애기 위한 목적이 컸다”고 말했다.B2B 컨소시엄의 앞날을 더욱 어둡게 만드는 것은 기존 9개 컨소시엄의 현재 상태다. 자동차, 조선, 섬유 등 9개 업종 B2B 컨소시엄은 출범한지 수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답보상태다. 그나마 글로벌 경쟁력이 있다는 조선 업종의 경우 최근에 와서야 CEO를 선정하는 등 진통을 겪어왔다. 나머지 업종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업계의 공통된 시각이다.업계에서는 B2B 컨소시엄이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참여업체간 협조체제 구축, 기존 거래관행 제거, 결제시스템 완비 등 선결해야 한다고 지적한다.B2B 컨소시엄은 앞으로 3년간 업종별로 전자상거래에 필요한 인프라를 정부로부터 연 평균 7억원씩 받아 구축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