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했던 사람을 잃어본 경험이 있다면 그 사람이 사라진 순간이야말로 사랑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이해할지도 모른다. 묻혀져 있던 수많은 기억들을 끄집어내고 또 짜내려 간 기억들을 다시 박제시키고 이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아직까지 그 사랑을 잊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그 기억들이 하나 둘 완전히 묻혀져 이제는 되새기기조차 힘들어지면, 아니 아예 그 기억조차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상실감은 이루 표현할 길이 없다. 영화 <파이란 designtimesp=20974>은 이 기억의 창고조차 텅 비어 버려 너무도 힘든 사랑을 시작하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다.양아치 건달인 강재(최민식)는 오기도 없고 마음도 여려 여기저기에서 무시만 당하는 ‘3류 인생’. 뒷골목 동기인 용식은 자신이 속한 조직의 어엿한 보스가 됐지만 그는 기껏 동네 비디오가게에서 포르노 테이프를 빌려주는 일이나 하고 있을 뿐이다. 그마저도 단속에 걸려 구류를 살고 나온 강재는 용식과 술을 마시던 중 살인사건에 휘말리고 살인죄를 뒤집어쓰는 대가로 평생의 꿈인 배 한척과 인생을 맞바꾸는 거래를 하게 된다.그런 그에게 파이란(장백지)이라는 기억 저편의 여인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국내 비자를 얻기 위해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강재와 결혼했던 중국여인 파이란. 강재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편 노릇을 하기 위해 이미 세상을 떠난 그녀를 찾아간다.감독은 어줍잖게 폼 잡는 데는 도사지만 후배들에게조차 ‘강재씨’라 불리는 말 그대로 ‘국가대표 호구’ 인생인 강재의 모습을 처절하리만큼 정밀하게 담아내고 있다. 그래서인지 파이란의 흔적에서 사랑을 시작하는 강재의 모습은 그 누구보다 아름답다. 이미 죽어버린 파이란의 이름이 새겨진 그의 주민등록등본에서, 촌스럽기 그지없지만 파이란이 그토록 소중하게 간직하던 그의 ‘빨간 마후라’에서, 그리고 초등학생보다 못한 필체로 써 내려간 그녀의 편지 속에서, 3류 깡패 강재는 생전 처음으로 사랑을 경험한다.영화는 파이란의 흔적을 쫓는 강재의 모습과 파이란이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교차시키면서 눈물샘 공략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하지만 서서히 파이란의 존재를 체감해 가는 강재의 정서나 죽음을 앞에 둔 외로운 순간까지 만나보지도 못한 남편 강재에게 수줍은 러브 레터를 쓰는 파이란의 초상은 억지 눈물로 일관하는 기존 멜로 영화와는 차원이 다르다. 데뷔작 <카라 designtimesp=20983>로 심드렁한 평가를 받았던 송해성 감독은 일본 영화 <철도원 designtimesp=20984>의 원작으로 유명한 아사다 지로의 탄탄한 이야기 구성을 바탕으로 감정의 완급을 훌륭하게 조절하는 솜씨를 보여준다.하지만 <파이란 designtimesp=20987>의 감성을 완성시키는 것은 무엇보다도 최민식의 물 오른 연기. 3류 양아치의 모습을 넉살맞게 표현해 내는 동시에 서서히 고조되는 정서의 흐름을 포착해 내는 그의 표정은 최민식이 아니고서는 해 낼 수 없는 일종의 아우라(광휘)를 보여줄 정도다. 창백하리만큼 차분한 연기를 보여주는 ‘제2의 장만옥’ 홍콩 스타 장백지 역시 넓은 정서의 폭을 강렬하게 표현해 내는 최민식과 조화를 이루면서 톡톡히 제 몫을 해 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