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이 들어선 후 분위기가 다소 호전되긴 했지만 일본경제를 보는 서방선진국들의 시각은 아직 부정적이다. 세계 최강의 경제대국이긴 하지만 일본이 앓고 있는 중병이 하도 많아 언제 어떻게 병석에 눕게 될지 모른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저명 이코노미스트들과 서방 선진국 정부가 공통으로 지적하는 일본 경제의 뿌리 깊은 환부중 하나는 ‘꽁꽁 얼어붙은 소비’다. 소비는 투자와 함께 기업의 생산활동을 뒷받침하는 원동력이다. 아무리 잘 만든 제품이라 해도 시장에서 소비자들이 사주지 않으면 기업은 그것으로 끝장이다. 더 이상 공장을 돌리지 못하고 문닫을 수밖에 없다. 위축된 생산활동은 근로자들의 가계 소득 감소로 이어지고 이는 또 다시 소비 부진의 원인이 된다. 궁극적으로 말하자면 나라 경제의 활력을 갉아 먹는 악순환의 시발점이 되는 것이다.루이 뷔통·샤넬 매장 등 ‘북새통‘원인이 어디 있건 소비 부진은 부인할 수 없는 일본의 중병이다. 민간 소비지출이 수년째 뒷걸음질치고 소폭이긴 하지만 물가가 내리막길을 걷는 현상은 다른 나라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광경이다. 꽉 다물어진 소비자들의 지갑 때문에 나라와 기업의 근심이 태산처럼 쌓이고 경제활력이 다른 나라들의 걱정거리가 될 정도라면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그러나 일본이 소리소문 없이 서방선진국들의 구세주 역할을 하는 분야가 하나 있다. 초고가 명품브랜드 시장에서의 ‘큰손’ 역할이다.지난해 연말 한때 도쿄 최고 번화가로 손꼽히는 긴자 거리 일대는 ‘루이 뷔통’ 브랜드의 쇼핑백을 들고 다니는 여성들로 뒤덮였다. 마쓰자카 백화점 긴자점이 지난해 11월말 루이 뷔통 매장을 열고 본격적으로 장사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일본인, 특히 일본 여성들이 가장 갖고 싶어하는 명품 브랜드중 하나로 정평 나 있는 루이 뷔통의 이 매장은 고객들로 연일 북새통을 이루면서 단 하루 매출이 5천만엔을 훌쩍 넘어섰다. 이는 이 백화점내 다른 매장들의 하루 매출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수치다. 루이 뷔통 매장에는 개점 초 3일간 무려 1만5천여명의 인파가 한꺼번에 몰려 백화점측이 입점 인원을 제한할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졌다.매장을 내는 곳마다 대성황을 이루자 일본 백화점가에서는 루이 뷔통 재팬의 지난해 매출이 1천억엔대(약 1조1천억원)로 올라섰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99년에 비해 최소 10% 이상 늘어난 것이다. 루이 뷔통 재팬의 승승장구는 일본의 일반 유통업체들이 수년째 매출감소에 허덕이고 있는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일본 소비자들의 고가명품 짝사랑 열기를 짐작케 하고 있다.극진한 대접을 받는 것은 루이 뷔통뿐이 아니다. 루이 뷔통과 함께 명품시장의 견인차 기업 역할을 하고 있는 ‘샤넬’의 일본법인 샤넬 재팬은 지난해 매출이 12%나 늘어났다. 하지만 하반기만 놓고 보면 증가율이 30%는 족히 넘어섰을 것이라는 게 경쟁 업체 관계자들의 이구동성이다.도쿄에서 지난 1월17일 열린 샤넬 봄 신제품 컬렉션에는 샤넬 브랜드의 옷과 액세서리로 몸을 휘감은 일본 여성들이 구름처럼 몰렸다는 것이 패션가의 공공연한 소문이다. 일본인들의 고가 명품 브랜드 사랑은 보석, 액세서리에서 더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고 있다.프랑스 브랜드인 ‘카르티에’의 지난해 매출은 99년보다 무려 50%가 늘었고 ‘티파니’ 역시 두자리수의 증가율을 기록했다. 일본이 버블경제의 거품 속에서 흥청댔던 80년대 말 일본사회에서는 20~30대의 젊은 고객들이 연인에게 줄 성탄절 선물로 너도 나도 티파니 보석을 사가 ‘티파니현상’이라는 용어까지 탄생시켰었다. 그러나 티파니 재팬측은 과거와 달리 최근에는 중노년으로까지 고객층이 넓어졌다고 말해 고가 보석 선호현상이 특정 연령층에만 한정된 것이 아님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에 따라 세계 명품 시장에서는 “일본이 고가 브랜드 메이커들을 모두 먹여 살린다”며 “일본인들이 지갑을 닫아 버리면 큰일 날 것”이라는 농담까지 나오고 있다. 전세계 명품 시장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매출비중은 3분의1 정도로 알려져 있으나 절반 또는 3분의2는 너끈히 될 것이라는 게 일본 수입업체 관계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명품업체 도쿄 매장확보전도 치열일본 명품 수입업체들의 매출규모는 버블 경제 후의 10년 장기불황 속에서도 해마다 약진을 거듭하면서 버블 경제 당시보다 수배까지 늘어났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샤넬 재팬의 코러스 사장은 “일본이 불황이라지만 일본인들의 가처분 소득이 감소한 것은 결코 아니다”며 “일본에서의 수입명품 비즈니스는 성장산업”이라고 자신할 정도다.일본인들이 수입명품에 절대적 지지를 보내자 구미의 일류 브랜드 업체들은 경쟁적으로 대형매장을 오픈하면서 도쿄의 입지 선점 싸움에서도 치열한 격전을 치르고 있다.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2월초 마루노우치에 점포를 낸 것을 비롯, 루이뷔통과 프라다는 패션의 거리 오모테산도에 매머드 매장을 설치했다. 업체들의 이같은 움직임은 땅값 하락으로 일본에서의 점포망 확장이 손쉬워진데다 은행 등 금융기관의 잇단 점포폐쇄로 빈 공간이 늘어나면서 좋은 목잡기가 수월해진데 그 배경을 두고 있다.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은 색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서구 명품브랜드 메이커들의 또 다른 대형 시장인 미국이 침체에 빠지자 업체들이 일본을 마지막 타깃으로 정하고 도쿄로 영업력을 집중시키고 있다는 분석이다. 명품업체들은 지난 90년대의 경우 대호황을 구가했던 미국시장을 겨냥해 통합, 재편 및 자금력 확충에 드라이브를 걸면서 패션산업 성장에 앞장서 왔으나 이제 미국 경기가 가라 앉자 일본 시장으로 일제히 눈길을 돌렸다는 것이다.수입명품을 선호하는 이유에 대해 핵심고객층인 일본의 젊은 여성들은 “핸드백 같은 물건은 오래 사용하기 때문에 값이 비싸도 터무니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직장 여성들도 비록 월급 봉투는 얇을지언정 명품 한 두가지는 바깥 나들이의 액세서리로 갖춘다는 게 불문율처럼 굳어 있다. 샤넬 재팬의 한 직원은 “명품 브랜드의 이미지는 경기에 좌우되지 않으며 불황일수록 비싸도 가치있는 것을 찾는 소비자가 오히려 많아진 것 같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오래 두고 쓴다는 것은 핑계일 뿐 남과 같은 것을 가지려는 ‘미 투(Me Too)’ 현상이 80년대보다 훨씬 심해졌기 때문”이라고 꼬집고 있다. 이토추 상사 패션시스템 사업부 가와시마 요코씨는 “남이 가진 것을 자신도 갖지 않으면 불안해 하는 동류의식이 문제”라며 “줏대없는 구매 행동이 고가 명품브랜드 선호를 부추길 뿐”이라고 비판하고 있다.젊은 세대들의 행동양식 변화와 관련지어 해석을 내리는 전문가도 있다. 시장분석가 오기하라 히로코씨는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최근 돈을 꼭 써야 할 곳과 절약할 곳을 철저히 양분해 가리는 현상이 뿌리내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1엔 한푼을 헛되이 쓰지 않는 젊은이중에도 핸드백, 신발 같은 고가 상품 한 두개를 꼭 가지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며 “이런 상품을 갖고 있지 않으면 불안해 하는 것이야말로 병”이라고 비판했다.일본 의류, 패션시장에서는 유니쿠로를 대표로 하는 염가제품들이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소비자들의 열광적 지지를 받고 있다. 또 고가의 수입 명품브랜드 열기가 갈수록 뜨거워지면서 염가제품과 함께 소비 양극화를 주도하자 중간 성격의 의류, 잡화 메이커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안 그래도 불황으로 퇴출위기가 가까워지는 판에 이같은 추세가 계속되면 설 자리가 급속도로 좁아진다는 개탄이다.지갑을 꽉 묶어둔 채 세계 경제의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는 일본 소비자들이 명품 브랜드만을 유독 짝사랑하는 것은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 외에는 일체 관심을 주지 않는’ 일본인 특유의 외곬행동에 다름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