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값이 십수년 째 바닥을 모른 채 추락하는 곳, 65엔짜리 햄버거와 1천엔짜리 셔츠가 신흥 갑부 탄생의 신화를 낳은 곳, 장사가 안된다며 유명 백화점이 손들고 나간 자리에서 1백엔짜리 싸구려 상품이 대박을 터뜨리는 곳, 공원에는 집 없는 노숙자가 바글대고 샐러리맨들은 감원 공포에 사로 잡혀 어깨가 축 처져 있는 곳, 앞날이 불안하다며 부자들이 오히려 돈 지갑을 단속하는 곳….일본의 심장 ‘도쿄’는 겉으로만 본다면 맥빠진 도시다. 말이 좋아 경제대국의 수도지 부자 나라의 최대 도시다운 활기와 역동적 에너지는 찾아 보기 어렵다. 차량과 오가는 행인은 거리에 넘쳐 나지만 도시 전체를 덮고 있는 공기는 어둡고 무겁다. 쏟아져 나오는 뉴스는 암울한 내용 일색이고 시민과 상인들은 입만 열면 재미없다며 경제가 큰 일이라고 푸념이다.경제 걱정에만 매달리다 보니 서민들의 돈 씀씀이는 갈수록 오그라들고 거리에서는 여유와 고품격의 자취가 사라지고 있다. 초저가로 무장한 업체와 상품이 아니면 숨도 쉬지 못한 채 뒷골목으로 밀려나고 주요 대로변은 ‘가격’ 만을 앞세운 염가 상품이 도시의 활기를 근근히 떠받쳐 주고 있다. 재개발 사업이 한창인 도심에서는 초현대식 고층맨션과 사무용 빌딩이 쑥쑥 올라가지만 시민들은 “지금 상황에서는 누가 저렇게 좋은 곳에 들어가 (살거나) 장사를 할 수 있겠느냐”고 냉소적 반응을 감추지 않고 있다. 장기불황이 남긴 침체의 그늘 속에서 도쿄가 신음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오모테산도 땅값 두배 가까이 올라외견상으로는 전혀 틀림없는 이야기지만 그러나 도쿄에서는 지금 이같은 주장을 뒤엎는 ‘거리 혁명’이 하나 조용히 일어나고 있다. 도쿄의 거리 모습을 바꾸는 외국 명품브랜드들에 의한 혁명이다. 그리고 그 작업은 도쿄에서도 24시간 젊은이들이 많이 몰리기로 소문난 시부야 일대의 오모테산도 거리에 집중돼 있다.일본 도쿄에서 1등 상업지로 통하는 곳은 물론 긴자와 신주쿠 및 도쿄역 일대의 마루노우치 등이다. 불야성을 이루는 네온사인과 빽빽이 들어선 상점, 그리고 진열장을 가득 메운 상품과 넘쳐나는 인파는 이들 거리를 상징하는 특징이다. 일본을 처음 찾는 외국인 여행자들에게도 이들 거리는 화려한 쇼핑 명소로 첫 손가락에 꼽혔었다.이들 거리를 1등 상업지로 키운 것은 일본인과 그들이 갖고 있는 돈, 즉 일본 자본이었다. 따라서 외국 어디에나 이름이 알려져 있긴 했어도 긴자 등의 지역은 어디까지나 일본적 분위기가 짙은, 일본적 쇼핑 명소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뉴욕 파리 런던 밀라노 등 구미 선진국의 다른 대도시에 비하면 ‘글로벌화’에서 수준차를 절감한다는 것이 일본 전문가들의 지배적 견해였다.하지만 최근 1, 2년간 부쩍 가속화된 외국 명품브랜드들의 대공세는 도쿄 쇼핑 명소의 얼굴과 상권 지도를 바꿔 놓았다. 루이뷔통 샤넬 조르지오 아르마니 등 한국 소비자들에게도 친숙한 서구 명품업체들이 일본시장 공략에 고삐를 당기면서 오모테산도의 황금상권 노른자위 땅을 속속 삼키고 있기 때문이다.서구 고가 명품업체들의 공세를 가장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곳은 도쿄 내부를 순환선으로 달리는 야마노테선 전철 하라주쿠역 앞의 오모테산도 거리 주변이다. 이곳에서는 우선 홍콩 부동산 개발업체 ‘베록스 시티 인베스트먼트’가 오는 12월 완공을 목표로 4층 상업건물 건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오모테산도가 세계 최고 수준의 쇼핑거리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는 이 회사는 일본이 불황에 허덕이면서 부동산 값이 형편없이 떨어진 지금을 최고의 투자적기로 판단하고 있다. 이 회사는 이 건물에 여성의류를 중심으로 한 유럽 명품업체를 다수 입점시킬 계획이다.최근 도산한 대형 유통업체 ‘마이칼’이 매출 부진으로 폐쇄한 점포는 미쓰비시상사의 손을 거쳐 매장 재단장 작업을 끝낸 후 샤넬 입생로랑 구치 등 일류 브랜드의 거점으로 얼굴을 바꿨다. 미쓰비시상사는 점포 인수와 공사 등에 1백40억엔을 투자했지만 서구 명품업체들이 앞다퉈 입주를 희망하면서 투자원금을 간단히 회수했다.이런 현상과 관련, 미쓰비시상사 금융기획부 사토 히데유키씨는 “재작년까지만 해도 오모테산도가 외국 명품업체들로부터 이렇게 관심을 끌줄 몰랐다”며 “이곳 땅값이 오를 것으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라고 놀라움을 감추지 않고 있다. 그는 미쓰비시가 재작년 가을 마이칼 점포를 인수하면서 치른 땅값은 평당 2천2백만엔이었지만 이제는 그 액수로 오모테산도 어느 곳도 살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도쿄 부동산업계에서는 오모테산도 일대의 땅값이 평당 3천만엔은 족히 나갈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일본 전국의 땅값과 주택값이 내리막길을 걸은 가운데서도 오모테산도는 최근 수년간 적어도 두배 가까이 올랐다며 주요 원인 중 하나가 외국 명품업체들의 진출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다. 주변 상권 이미지와 고객의 질을 중시하는 명품업체들이 오모테산도를 최적 후보지로 보고 너도 나도 몰리면서 노른자위를 중심으로 임대료가 뛰기 시작했다는 분석이다.오모테산도의 얼굴을 변화시킨 외국 자본은 두 업체에만 그친 것이 아니다. 일본에 진출한 명품업체 중 최고의 실적을 올리고 있는 루이뷔통은 지난 2000년 90평과 1백80평 규모의 부지 두곳을 오모테산도에서 사들였다. 루이뷔통 재팬은 이중 한곳에 10층짜리 건물을 올려 세계 최대급 루이뷔통 매장을 건립한다는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다. 루이뷔통 재팬은 2002년 가을 완공을 목표로 공사를 서두르고 있으며 역시 오모테산도에서 리소과학공업이 신축중인 8층건물을 통째로 임차했다. 이에 따라 루이뷔통은 2003년이면 오모테산도에서만도 3개의 초대형 매장을 운영하면서 일본 명품시장에서 절대왕자의 위상을 더욱 탄탄히 굳힐 것이 분명해졌다. 이탈리아 명품업체 중 프라다 역시 오모테산도 거점 확보에 발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프라다는 오모테산도와 바로 인접한 미나미 아오야마 일대에서 한 은행이 갖고 있던 사원연수시설을 사들인 후 매장으로 다시 꾸며 지난 4월 오픈했다. 프라다는 이로써 오모테산도 일대의 매장을 모두 4개로 늘렸으며 명품업체들의 상권 선점경쟁에서도 수적 우위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이탈리아 브랜드 중 베네통은 이에 앞서 지난 98년 약 1백80평 부지를 사들인 후 지상 5층의 사무소겸 매장을 신축, 오모테산도 상권 공략의 교두보로 활용하고 있다.서구 명품업체들이 도쿄의 수많은 상업지 중에서도 오모테산도를 유독 선호하는 이유에 대해 업계관계자들은 거리 특유의 분위기와 환경을 우선 꼽고 있다. 샤넬 재팬의 리셜 코러스 사장은 “녹음이 풍부하고 인도가 넓어 파리의 몽테뉴거리와 비슷한 고급스런 인상을 풍긴다”고 말하고 있다.긴자 제치고 ‘쇼핑하고 싶은 거리’ 꼽혀베네통의 루치아노 사장은 “거리 여건도 뛰어난 데다 고가 상품을 파는 점포가 몰려 있다 보니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털어놓고 있다. 오모테산도는 최근 니혼게이자이신문이 20~30대 직장 여성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인터넷 설문조사에서도 긴자를 제치고 주말에 가장 쇼핑 나가고 싶은 거리로 꼽혀 업계의 설명이 근거 없는 것이 아님을 뒷받침했다. 여성 응답자들은 1백60그루나 되는 울창한 가로수와 폭 8m의 넓은 인도, 밀집한 명품 브랜드 점포 등을 매력으로 꼽고 그냥 쇼윈도만 쳐다 보아도 기분 좋은 곳이라고 말했다.명품업체들이 오모테산도를 도쿄의 신흥 1등 상업지로 키우고 있는 데 대해 일본 유통업계와 부동산업계에서는 부러움과 함께 반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자신들의 장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오히려 외국자본의 안목에 끌려 다니는 처지야말로 일본의 실력과 한계를 보여준 또 다른 증거가 아니냐는 것이다. 이들은 마루노우치 긴자 신주쿠 등 일본의 전통적 1등 상업지는 정부와 재벌의 담합이나 특혜에 의해 성장한 전력을 갖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행정당국의 집중적 지원을 등에 업고 신흥개발지로 부상하거나 교통요지에 자리잡은 후 황금상권으로 성장한 것이 일본의 1등 상업지가 걸어온 개발역사의 전형이라는 자아비판인 셈이다.극심한 불황 속에서도 서구 명품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파행적 소비패턴과 이를 틈탄 외국 자본들의 활기찬 일본시장 공략, 그리고 외국 명품 브랜드업체들이 보여준 고차원의 눈썰미 앞에서 일본 기업인들은 경탄과 한숨을 함께 몰아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