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주재하는 외국관광청들이나 대사관 또는 여행사에선 종종 새로운 여행지를 개발하고 소개하기 위해 언론사나 여행사 사람들을 상대로 팸트립(Familiarization Trip)을 실시한다. 언젠가 모 여행사에서 주최한 팸트립에 언론사 기자들과 여행사 사람들이 모처럼 대규모로 여행을 떠났을 때 일이다. 장소는 타히티. 워낙 특이한 목적지이기도 하지만 열대의 낙원이란 명성과 고갱의 작품 배경이었던 까닭에 함께 출발하는 사람들의 기분은 공항에서부터 들떠 있었다. 출장길에 맡은 일이라곤 하지만 기자들의 입장에선 관광을 하고 그 후일담을 적는 여행이기 때문에 부담이 없고 여행사 직원들의 경우엔 모처럼 현장을 벗어나 손님의 입장으로 여행지를 돌아보는 일이니 피차 즐거운 출발이었다.그런 기분들은 현지에까지 이어져서 각각 호텔방에 들어가 휴식을 취한 후 다음날부터 일정이 시작된다는 인솔자의 설명에 더더욱 즐거운 기분이 됐다.모 일간지의 정치부 기자. 출입처가 국회인 까닭에 날마다 그 복마전같은 정치 기사에 시달리다 모처럼 기회가 닿아 이번 출장길에 올랐다. 얼마나 좋았던지 호텔방에 들어서자마자 땀에 달라붙은 옷을 전부 벗어버리고 샤워를 했다. 물기를 닦을 새도 없이 냉장고에서 시원한 흑맥주캔을 하나 꺼내 베란다로 나섰다.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방이어서 테라스에 있는 데크체어에 앉아 아름다운 석양의 태평양을 음미하며 맥주를 마셨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한참 후 점점 사위가 어두워지고 이젠 저녁을 먹으러 나가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문이 열리지 않았다. 한번 나오면 저절로 닫히는 슬라이딩 도어! 맨몸인 채 테라스에 갇힌 꼴이었다.설상가상으로 열대지방에 있다는 스콜 영향으로 바람과 함께 때 아닌 소나기가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뿔싸, 손에 든 것은 고작 흑맥주 빈 깡통 뿐. 그는 너무나 추워서 옆 객실의 테라스(약 1m 정도 떨어진 거리)로 목숨 건 비행을 시도했다. 팸트립 일행과 함께 같은 층의 방을 배정해준 것을 떠올렸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 덤볐던 것. 하지만 열려 있던 그 객실에선 마침 허니문 여행을 온 유럽 부부가 묵고 있었다. 남자는 샤워중. 여자는 침대에 누워 새신랑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쿵하는 소리와 함께 베란다에서 들어온 사람은 신랑이 아니라 웬 나체의 동양남자. 당연히 여자의 비명이 이어졌고 샤워중인 신랑이 뛰어들고…. 당황해서 영어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남자기자의 궁색한 변명이 계속되고. 다행히 사태를 깨달은 신랑이 수건을 건네줬고 그것으로 몸을 가린 기자가 항의전화와 함께 불려온 인솔자, 지배인과 함께 자신의 방으로 다시 돌아온 시간은 저녁 9시. 더군다나 입실할 때 확실하게 잠근다고 쇠 걸쇠까지 걸었기 때문에 기계를 동원해서 문짝을 뜯어내야 할 정도였다.자존심이 상한 그 기자는 다음날 투어를 포기하고 짐을 싸 돌아가버렸다. 문을 고치는 데 드는 수리비만 무려 3백달러. 워낙 고급 호텔이어서 그랬다나 어쨌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