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에 알려진 일본의 좋은 이미지 중 하나는 ‘독서대국’이다. 거리 어디를 가든 책방이 하나쯤은 반드시 버티고 서 있고 책방 안은 책을 고르고 사는 사람들로 온종일 붐빈다. 그러나 밖으로 비쳐진 모습과 달리 일본 출판계는 냉가슴을 앓고 있다. 국민들의 독서열이 갈수록 시들해지면서 책이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출판계의 불황은 생생한 정보를 24시간 캐낼 수 있는 인터넷의 보급에도 뿌리를 두고 있다.일본 출판과학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2000년 출판 경기는 92년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시장규모는 2조3천9백66억엔으로 99년보다 2.6%가 줄어 들었다. 불황은 올들어서도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으며 최근에는 미국 동시테러 영향까지 겹쳐 연말까지 별다른 특수가 보이지 않는다는 비관론이 여기 저기서 고개를 들고 있다. 내리막길을 벗어나려는 일본 출판계의 자구 노력이 가속화되면서 출판 시장에서는 전에 없던 새로운 트렌드가 하나 둘씩 생겨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움직임은 책을 적게 찍어내는 ‘소부수’와 보급형 저가책 판매에 주력하는 ‘저가전략’이다.단행본 만화책 시장 가격파괴 경쟁저가전략은 단행본 만화책 시장에서 특히 돋보이고 있다. 출판사들은 인기작가의 신간을 종전 판매가보다 크게 낮춘 권당 3백~4백엔대에 내놓고 있다. 쇼가쿠간의 에가미 히데키 편집장은 “독자들의 가격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있다”며 “싼 값에 내놓지 않으면 아예 팔리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물론 저가로 책을 내놓는다고 해서 출판사들이 수익개념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책의 판매 루트로 일반 서점보다 편의점을 중시하는 전략을 펴고 있다. 공짜 손님을 막기 위해 책의 겉 표면을 묶었던 비닐을 없애고 누구나 자유롭게 내용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했다. 저가로 가격을 끌어 내리면서 고객이 부담없이 알맹이를 구경한 후 마음에 들면 사라는 상술을 동원한 것이다. 저가 전략은 일단 성공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에가미 편집장은 “판매가를 1천엔으로 책정하고 2만~3만부를 찍을 경우 85% 이상 팔리지 않으면 수지타산이 맞지 않지만 3백80엔으로 낮추고 16만부를 발간할 경우는 절반만 팔려도 적자를 면한다”고 털어 놓고 있다. 일본 출판계 관계자들은 “베스트셀러 작품들을 재편집해서 저가 보급판으로 재발행한 시도는 몇차례 있었지만 신간을 몽땅 값싸게 내놓는 것은 최근의 일”이라며 “이같은 전략이 들어맞을 경우 중고책방으로 발길을 돌렸던 고객들을 상당수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점치고 있다.책을 조금씩만 찍어내는 ‘소부수’ 전략은 출판불황이 재판매가격 유지제도와 반품제 등 구조적 문제점에서 비롯됐다는 반성에서 출발하고 있다. 시장 상황과 독자들의 기호 등 주변여건은 감안치 않고 무조건 많이 찍어낸 후 일정한 값에만 팔라고 주문하거나 반품을 허용해온 비합리적 관행이 불황의 씨앗을 키웠다는 분석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형 출판사인 카도가와서점이 중견인쇄회사와 손잡고 세운 ‘이-북 매뉴팩처링’은 일본 출판계의 낡은 껍질을 벗기는 데 앞장섰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이 회사는 인쇄 제본 배송을 수요처의 주문에 따라 일관되게 처리하는 이른바 ‘온 디맨드(On Demand)’ 사업 방식을 펴나가고 있다. 도매상과 서점의 주문에 맞춰 단행본 2백권, 문고본 5백~1천권씩으로 단위를 세분화해 책을 찍어내고 있다. 이 결과 종전에는 납품까지 보통 1주일 이상 걸렸던 추가주문도 이제는 3~5일씩 밖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상당한 시간단축 효과를 얻게 됐다.소부수 전략은 고단샤 쇼가쿠간 등 다른 출판사들에서도 불황을 이겨낼 틈새 사업전략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 언론은 출판 관계자들의 말을 인용, 온 디맨드 방식이야말로 저가전략과 함께 출판시장의 불황 극복에 기폭제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