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지금이다.”국내 보험사들이 역마진 우려로 구조조정을 실시하고 보험료를 올리는 등 대책 마련에 분주한 요즘, 외국계 보험사들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안정적인 자산 운용의 위력’을 맘껏 자랑할 좋은 기회가 온 것이다. 그중에서도 지난 2000 회계연도(2000년 4월∼2001년 3월)에 자산 투자수익률 1백26.1%로 1위, 수입보험료 신장률 1위 등을 기록한 한국 ING생명은 표정관리에 바쁘다. 이를 진두지휘한 인물이 사장취임 1년째를 맞는 요스트 케네만스(38) 사장.케네만스 사장은 네덜란드 ING은행에서 국제금융서비스 책임자로 일하다 지난해 2월 옛 주택은행 기술고문으로 한국에 왔다. 얼마 되지 않아 ING그룹 본사가 한국 ING생명의 사장을 맡아줄 것을 제의했다. ING그룹은 ‘현지법인 사장은 가급적 현지인으로 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가 사장이 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한국 ING생명을 보는 ING그룹 차원의 시각과 전략에 변화가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봐도 좋다”고 그는 말했다.“ING그룹은 한국 ING생명이 보다 선진적으로 운영되고,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회사로 발전해 나가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한국인이 아닌 사장을 지명하게 됐구요.”하지만 ‘현지밀착경영’을 자나깨나 염두에 둔 걸까, 그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논하면서도 “ING생명이 확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한국 ING생명은 한국 회사입니다. 제가 물러난 다음에는 한국인이 사장을 맡게 될 것입니다”라고 강조했다.케네만스 사장은 부임하자마자 임원의 임금을 동결하고, 직원들의 보수는 올렸다. 단순한 인상이라기보다는 제대로 된 성과급 체계를 자리잡게 하려는 시도였다고. 최고 22%나 연봉이 오른 직원도 있었다. “일 잘하는 사람은 확실히 밀어준다는 원칙의 소유자” 라고 경영지원팀 노구미 차장은 말한다. 사장으로 부임한 1년 동안 그가 제일 열심히 한 일은 위계질서에 익숙한 사고를 없애기 위한 장치들을 마련하고, 능력에 따른 성과급제를 정비하는 등 회사 문화를 바꾸는 것이었다. “문화라는 게 쉽게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직원들의 신뢰를 얻었기 때문에 성공적인 기간이었다고 생각한다”고 케네만스 사장은 자평했다.내년부터 ‘3개년 계획’ 추진내년부터 한국 ING생명은 더욱 공격적으로 확장에 나설 방침이다. 케네만스 사장은 ‘3개년 계획’을 의욕적으로 공개했다. 첫째는 ‘다이렉트 채널’이라 불리는 새로운 판매 경로의 개발이다. 보험 모집인을 거치지 않고 회사와 고객이 직접 보험 상품을 사고 파는 것을 말한다. 자세히는 인터넷 편지 전화 등으로 상품판매하는 것을 뜻하는데, 유통 단계에서 모집인을 건너뛰기 때문에 수익성이 좋다.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회사들이 이 틈새시장을 개척해 짭짤한 수익을 거두고 있다. 둘째는 다이렉트 채널로 판매할 다양한 상품을 내놓겠다는 것. 대개 외국계 보험사들은 수익성 좋은 종신보험만을 취급한다. 케네만스 사장은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지시하는 각종 규제들 때문에 다양한 상품을 내놓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면서도 “ING그룹의 세계적인 노하우를 활용해 고객에게 가급적이면 많은 선택의 기회를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마지막 계획은 공격적으로 회사 인지도를 높이는데 나서겠다는 것이다. “시장에서 비교적 조용한 회사였던 ING생명이지만 내년부터는 달라질 것”이라고 단언했다.ING그룹은 특히 은행에서의 보험 판매, 즉 방카슈랑스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지난달 정부가 방카슈랑스 도입 시기를 앞당긴다고 했다가 이를 번복한 데 대해 케네만스 사장은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그는 “소비자들은 점점 똑똑해지고 요구도 다양해지는데 규제를 만드는 사람들은 시장을 잘못 읽고 있는 것 같다”면서 “그러나 시장의 추세를 거스를 수는 없을 것이므로 지금처럼 상품을 일일이 규제하는 이런 구도가 오래 갈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며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최근 ING생명이 더욱 주목을 받는 것은 초대형 국민은행과의 관계 때문이기도 하다. ING 그룹은 옛 주택은행 지분 10%를 보유하고 있으며, (국민은행과의 합병으로 지분 4%가 됨) 합병 국민은행은 한국 ING생명 지분의 20%를 갖고 있는 상호출자 관계다. 국민은행이 국내 1위의 초대형 은행인만큼 한국ING생명의 빠른 확장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국민은행의 지분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느냐는 질문에 케네만스 사장은 “규제 때문에 앞으로도 당분간 방카슈랑스 시장 활성화가 어려울 것으로 보이므로 지금 추가 투자는 무의미하다”는 대답으로 대신했다. 하지만 “국민은행과는 지금도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협력할 부분은 점점 많아질 것”이라고 덧붙여 여운을 남겼다.17세 때부터 은행 창구직원으로 첫발케네만스 사장은 이색적인 경력의 소유자다. 미혼의 38세 사장인 그에게 사람들은 “젊은 나이에 출세한 사람”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경력 나이’로 따지면 무려 20년이나 됐다. ‘학교에서 더 이상 배울 게 없다’고 생각한 열일곱살의 케네만스 소년은 부모에게 학업 중단을 선언했고 그의 부모는 “그렇다면 더 이상 지원은 없다”고 못박았다. 그래서 은행 창구직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후에 직장생활을 하면서 야간 대학을 다녀 오늘날의 자리에까지 오른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암로은행 무역부문 프로젝트 매니저, 소프트웨어 개발사인 인터그램 매니저, 파리바 은행 IT총괄 매니저로 일하는 등 IT분야와 금융분야에 두루 경험이 있다.“처음 사장으로 왔을 때 보험사 경험이 없다고 사람들이 놀라더라구요. 하지만 지금은 은행, 보험간의 영역 구분이 의미가 없는 종합금융서비스가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저는 오히려 제 자신이 이런 시대에 딱 맞는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케네만스 사장의 자평이다.케네만스 사장은 종종 공식적인 연설을 우리말로 해 직원들을 즐겁게 해 주기도 한다. 한 직원은 “우리말을 못하는 듯 하지만 웬만한 건 다 알아듣는 눈치”라고 귀띔했다. 모국어인 네덜란드어 외에도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도 수준급이다. 케네만스 사장은 “1년만에 한국어를 완전히 깨우칠 줄 알았는데 어렵다”면서 “내년에는 실력을 보여주겠다”고 했다.인터뷰 후기케네만스 사장의 방에 들어가니 벽면 한가득, 마흔 장은 족히 넘어 보이는 사진들이 붙어 있다. 모두 직원들과 찍은 것이다. 친구처럼 어깨 동무를 한 사진, 잔뜩 폼을 잡고 찍은 것, 물에 빠진 모습 등. 그는 이렇게 직원들과 격의 없이 어울려 지내는 데 가장 신경을 쓰고 있다고 했다. 평소 그 단어를 얼마나 자주 들었는지, 인터뷰 도중 그는 ‘외국사람 사장’이라는 우리말을 몇 번이나 정확하게 발음했다. 거부감이나 이질감을 최소화하고 토착 경영을 하겠다는 의지의 역설적인 표현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모든 직원들에게 영어를 쓰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한국 ING생명의 고객들이 영어를 사용하지는 않으니까요.”“21년 전인 열일곱살 때 은행 창구직원으로 일하면서 보험 상품을 팔곤 했습니다. 지금 한국 ING생명 사장으로 부임해 한국에서 방카슈랑스 도입이 논쟁거리가 되는 걸 지켜보니 감회가 남다르네요.”인터뷰 중 케네만스 사장이 무심코 던진 얘기다. 지금 우리에게 외국기업은 어떤 의미일까. 듣기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을 케네만스 사장의 이같은 발언은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시장이 완전히 개방된 후 변화의 속도는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빠르다. ‘외국기업’이라는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질 날이 멀지 않은 듯하다.케네만스 사장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이들 ‘외국기업’은 한국 시장에서 그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