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궁합’이란 말이 있다. 함께 곁들여 먹으면 몸에 더욱 좋고 맛과 즐거움도 더 커진다는 뜻이다. 고기를 상추에 싸 먹거나 불고기감을 장만할 때 배즙을 넣어 육질을 연하게 만드는 것은 조상들이 전해 준 음식궁합의 살아있는 지혜다.다른 상품도 비슷하지만 음식은 특히 선입견에 크게 좌우된다. 냉면은 당연히 찬 육수에 말아 먹는 것이고, 생선회는 초장이나 와사비에 찍어 먹는다는 것 등은 자연스럽게 문화적 등식으로 뿌리내렸다. 따라서 궁합과 선입견의 룰을 외면한 상품이 식품 시장에서 성공하기란 좀처럼 기대하기 어렵다.신제품이 줄기차게 쏟아지는 일본 인스턴트 식품 시장에서 올 한햇 동안 별난 존재로 주목받았던 상품 중 하나가 ‘차가운 카레’다. 카레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식품이 지천으로 깔린 시장에서 오츠카식품이 내놓은 ‘차가운 카레’는 역발상 제품이라는 점에서 잔잔한 화제가 됐다. 지난 3월부터 판매, 7월까지 2백만개가 팔려 주위의 예상을 뒤엎고 가능성을 인정받았다.이 제품의 개발과정은 이렇다. 이 회사의 오츠카 유지 사장은 5년 전 어느날 관념을 뒤짚는 역발상의 제품들이 시장에서 대박을 터뜨린 사례가 적지 않은 데 착안했다. 그리고 주력 제품인 레토르트식 인스턴트 카레에 모험을 걸어 보기로 작정했다.그는 제품개발 담당자들에게 차갑게 먹는 카레를 만들도록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담당자들의 고민은 엄청났다. 모든 사람이 뜨겁게 해서 먹어야 맛있다는 카레를 어떻게 차가운 상태에서 먹도록 만든다는 말인가.실무자 중 한 사람이었던 하야미 히로시씨는 더운 것과 차가운 것이 함께 어울릴 때 더 절묘한 맛을 내는 음식을 찾기 위해 일본의 향토 음식을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는 뜨거운 밥에 찬 된장국을 부어 먹는 미야자키 지방의 음식 ‘히야시 시루’(히야시는 차다는 뜻, 시루는 국이라는 의미의 일본어임)를 주목하게 됐다. 그는 미야자키를 찾아가 이 음식을 맛보며 밥과 국의 혼합 비율, 가장 좋은 맛을 낼 때의 온도 등을 꼼꼼히 체크했다. 차가운 카레 개발에 응용하기 위해서임은 물론이었다.개발 팀 내부에서는 실무자간의 이견도 적지 않아 어떤 형태의 제품을 만들어야 할지 컨셉조차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하야미씨가 미야자키를 돌고 온 후 ‘더운 밥+차가운 카레’로 방향이 정해졌다. 99년 가을의 일이었다.야채·과일 페이스트로 응고현상 없애가닥이 잡혔어도 개발 과정은 험난했다. 레토르트 포장의 카레는 차가운 상태가 되면 내용물로 들어 있는 동물성유지와 소맥분이 딱딱하게 굳어진다. 내용물이 뭉쳐지면 밥 위에서 골고루 퍼지지 않고 식감도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카레 고유의 향도 제대로 살아나지 않는다. 개발팀은 이런 난제들을 해결하는데 총력을 쏟았다. 결국 마지막으로 찾아낸 열쇠는 재료와 혼합 비율에 있었다. 실무자들은 동물성유지와 소맥분 대신 야채와 과일의 페이스트를 사용하고 향신료를 일반 것보다 1.3~1.5배 더 넣는 것으로 수수께끼를 풀어냈다.고생 끝에 탄생시킨 제품이지만 반대의 벽은 회사 내부에서부터 있었다. 판매 시작전 열린 사내 품평회에서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러나 개발팀은 물러서지 않았다. 영업팀을 설득해 시식행사를 벌이기로 했다. 대형 수퍼와 편의점을 보온밥통을 들고 돌면서 소비자들을 맨 투 맨으로 공략해 나갔다.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차가운 생선회를 뜨거운 밥과 같이 먹을 때의 느낌’ ‘입안에서 절묘한 조화가 생겨나는 것 같다’는 등의 호평이 잇달았다. 자신을 얻은 직원들은 차가운 카레도 일본인의 입맛에 잘 맞는 상품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판로를 쑥쑥 넓혀 나갔다. 판매 거점은 도쿄였지만 입소문이 퍼지면서 전국 각지에서 주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역발상의 제품도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로 시장을 개척한 직원들의 땀방울이 낳은 열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