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최대 PC 메이커인 롄샹(聯想) 직원인 왕샹(王像) 씨는 오늘도 같은 시간에 출근한다. 부모에게 인사하고, 딸 아이 볼에 입맞춤을 하고 돌아선다. 집을 나온 순간 그의 발길은 무거워진다. 갈 곳이 없어서이다. 그는 롄샹이 단행한 구조조정에 따라 지난해 말 해고되는 아픔을 맛봐야 했다. 가족들에게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 그 사실을 숨기고 있을 뿐이다.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지만 사무직 직원이었던 그에게 재취업이 쉽지만은 않다.롄샹이 인재우화(人才優化, 인력고급화) 정책을 실시한 것은 지난해 10월 말. 말이 인력고급화였지 실제는 구조조정과 다름없었다. 약 10%의 인원을 감축했다. 중국 PC 시장의 약 30%를 점유하고 있는 최고 정보기술(IT) 업체가 구조조정을 단행한다는 자체가 충격이었다. 지난 10여년간 중국 IT업계를 이끌며 승승장구하던 롄샹의 앞길에 노랑색 신호등이 켜진 것이다.롄샹은 ‘중국의 IBM’으로 불리는 종합 IT기업. 중국 컴퓨터 3대 중 1대에 ‘롄샹’ 브랜드가 붙어 있다. 외국기업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컴퓨터 시장을 지켜낸 ‘중국 IT의 자존심’으로 평가받고 있다.‘중국 컴퓨터 왕국’ 롄샹에 이상조짐이 나타난 것은 지난해 11월 홍콩에서였다. 솔로먼브라더스와 HSBC 등이 홍콩증시에 상장된 롄샹(레전드)의 목표주가를 잇따라 하향 조정한 것. 솔로먼브라더스는 11월 23일 롄샹의 목표주가를 2.4홍콩달러로 낮췄다. 당일 주가의 약 3분의 1 가격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롄샹의 컴퓨터시장 지배력 위축과 영업이익 저조가 이유였다.곧이어 발표된 롄샹의 2001년 2회계연도(7∼9월) 영업실적이 이를 뒷받침했다. 시장조사 기관인 IDC는 이 기간 롄샹의 PC 판매량이 66만대로 전년동기대비 6.9% 증가에 그쳤다고 발표했다. 이는 중국 전체 PC판매량 증가치와 비교하면 지극히 실망스런 수준. 이 기간 중국의 PC판매 대수는 227만대로 전년동기 대비 12.9%가 증가했다.그렇다면 나머지 시장은 누가 휩쓸어갔을까.미국 델(Dell) 컴퓨터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지난해 들어 중국 영업을 대폭 강화한 이 회사의 2001 3∼8월 PC 출하량은 전년동기대비 61%나 급증했다. 매출액은 31% 늘었다. 델 컴퓨터는 중국 PC 시장의 약 4%를 점유, 롄샹 베이다팡정(北大方正) IBM에 이은 제4위 업체 자리를 지키고 있다.주문생산 체제 영업망을 갖추고 있는 델은 지난해 5월 광둥(廣東)성 시아먼(廈門)에 새로운 생산공장을 설립했다. 이로써 델은 중국 내 데스크톱PC 및 노트북PC 생산량을 3배나 늘일 수 있게 됐다. 현재 델의 영업범위는 양쯔(揚子)강 이남의 동부지역에 집중된 상태. 이 회사는 이를 전국으로 확대, IBM을 추격한다는 계획이다. 델은 특히 5,000위안(1위안=약150원)이하 PC로 시장을 공략해 나가고 있다.중국 업체로는 제2위 PC 메이커인 베이다팡정이 급신장세를 보이고 있다. 이 회사의 지난해 상반기 PC 출하량은 전년동기 대비 약 70%가 늘어났다. 베이다팡정은 지난해 5월 광둥성 동관(東莞)에 연간 300만대를 생산할 수 있는 PC 공장을 신설했다. 이 회사는 중국 최대 PC 공장 준공을 계기로 롄샹 추격 작전에 들어갔다.신진 업체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전통적인 가전업체인 하이얼(海爾), TCL, 하이신(海信) 등이 그들. 이들 업체는 전국에 퍼진 기존 가전제품 유통망을 통해 고유 브랜드 PC를 뿌리고 있다. 특히 하이신의 경우 서부지역 공략을 강화, 지난해 상반기 이 지역에서 제3위 PC업체로 등장했다.중국 IT업계는 롄샹이 흔들리고 있는 가장 큰 이유로 ‘대기업 병’을 꼽는다. 롄샹이 종업원 1만여명의 매머드 기업으로 성장하면서 시장의 환경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중국 컴퓨터 사양을 주도하고 있던 이 회사는 펜티엄Ⅳ PC 출하에서 TCL에 뒤졌다. 기술의 주도권을 잃어버린 것이다.롄샹은 치열하게 전개된 가격경쟁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했다. 지난해 7월이 델이 5,000위안 PC를 내놓자 중국 PC 업체들은 치열한 가격인하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베이다팡정 역시 단순형 PC로 가격을 낮추었다. TCL, 하이얼 등 후발업체들은 시장 확보를 위해 저가로 PC를 밀어냈다. 이같은 경쟁 속에서도 롄샹은 “제 살 깎기식 가격경쟁에 뛰어들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 시장을 잠식당하는 아픔을 맛봐야 했다.롄샹의 부진은 세계무역기구(WTO) 가입과도 무관하지 않다. 델, IBM, 컴팩 등 세계 주요 PC 업체들의 중국 공세가 더욱 거세어졌기 때문이다. 이들 선진 외국업체들은 중국의 WTO 가입으로 시장 불투명성이 크게 개선될 것으로 판단, 공격적인 중국 마케팅에 나서고 있다.지난 1998년 중국 시장에 진출했던 델이 지난해 시장드라이브를 걸었던 게 이를 말해준다. 이는 곧 WTO 가입으로 중국기업과 외국기업간 경쟁이 심화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중국의 WTO 가입에 따른 시장 재편 움직임 한가운데 롄샹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