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전야의 고요함이다.”한 증권사 사장은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물밑에서는 생존을 위한 눈치싸움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는 현재의 증권업계를 두고 이렇게 표현했다.사실 증권업계는 그동안 구조조정에서 상당히 비껴 서 있었다. 지난 98년 사상 처음으로 5개 은행이 퇴출된 이후 은행업계는 ‘뽕나무밭이 변해서 바다가 됐다’고 할 정도로 완전히 바뀌었고 보험업계 역시 98년 5개, 99년 6개, 2001년 2개 등 모두 13개 회사가 사라졌다. 이에 비해 증권업계에서는 97년 IMF 직전 동서·고려 증권이 부도를 맞았지만 오히려 회사 수는 늘어났다.이렇게 조용한 증권업계에 최근 구조조정의 바람이 서서히 불고 있다. 물론 증권업계의 구조조정은 은행권처럼 정부가 직접 나서서 지휘하고 있지는 않다. 금융감독원은 전면에 나서지 않아도 말 그대로 ‘시장원리’에 따라 정리될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다. 금감원의 이같은 ‘여유’는 증권업계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이해가 된다.현재 외형만 보면 증권업계에 구조조정이 일어날 이유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지난 2001년 9월말 현재(반기) 국내 45개 증권사들의 당기순이익은 4,843억원. 적자를 본 회사는 한 군데도 없다.그러나 내용을 좀더 들여다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본지가 증권사의 주요 수입원인 각종 수수료 수입에 따른 순이익과 일반 판매비·관리비 현황을 분석해본 결과, 대부분 증권사들이 수수료 수입보다 관리비지출이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표 참조). 전환증권사 등을 제외한 기존 29개 증권사 가운데 수수료 순이익을 판매비·관리비로 나눈 수치가 ‘1’을 넘는 회사는 삼성, 현대, 하나 등 3곳뿐이다.물론 이들 3개 증권사도 외국계 증권사의 평균인 1.65에는 훨씬 못 미치고 있다. 이 수치가 ‘1’을 밑도는 나머지 26개 증권사는 수수료 수입으로 일반 관리비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전체 증권업계의 영업수익 중 각종 수수료 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이 80%를 넘나드는 상황에서 ‘수수료 수입으로 관리비도 감당하지 못하는 회사가 시황이 급변할 경우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한마디로 ‘미래가 없는 회사가 수두룩하다’는 것이다.사이버거래가 급증하고 있는 것도 구조조정을 촉진시키는 원인이다. 지난 연말 현재 국내 증권업계의 사이버거래 비중은 70%. 지점 영업직원이 거의 필요없는 수준까지 온 것이다. 이런 현실을 반영, 일은증권이 최근 벌였던 2주 이상의 파업도 아무런 소득 없이 막을 내렸다(박스기사 참조).미국의 경우 수수료 자율화가 증권업계 재편의 신호탄이었다면 우리나라는 사이버거래가 그 역할을 해주고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한 증권사 임원은 “현재 각 증권사 지점의 20%만 있어도 전체 영업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금융감독원 이영호 부원장보는 “결국 올해 안에 어떤 방식으로든 미래를 개척하지 못하는 증권사는 다른 증권사에 흡수 합병되거나 간판을 내릴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이부원장보의 이같은 지적은 ‘금감원이 나서서 교통정리를 해주지 않아도 자기들끼리 알아서 살 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말로 바꿀 수 있다.증권업계의 구조조정은 크게 두 가지로 진행되고 있다. 하나는 단순한 ‘수수료 따먹기’ 영업에서 자산관리회사로 방향을 트는 것이고, 또 하나는 ‘덩치 키우기’다. 삼성과 LG는 앞 케이스의 대표적 회사로 꼽히고 있다.삼성은 지난해 ‘FN아너스클럽’ 출시를 기점으로 자산관리회사라는 이미지를 심으려 노력 중이다. LG는 프라이빗뱅킹 부문에서 먼저 치고 나갔다. 현대와 대우가 매각 문제로 구심점을 잃고 흔들리는 동안 두 회사가 약진하고 있는 것이다.선두그룹 중 대우와 현대는 매각작업이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 운명이 갈릴 전망이다. 심지어는 지금은 선두그룹에 속하는 D증권마저 다른 증권사와의 합병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다른 금융기관의 자회사로 들어가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장은 쌓아놓은 명성으로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지만 새로운 수익원을 창출해 내기 어렵기 때문에 국민은행에까지 의사타진을 하고 있는 것.이와는 대조적으로 6위권 이하의 중견 증권사들은 합병이나 피합병을 통해 살 길을 모색하고 있다. 이 중 한화증권은 그룹이 대한생명을 인수할 경우의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며 일단 한 발 물러서 있다. 신한은 금융지주회사의 자회사로 편입돼 한시름 놓은 편이다.중견 D증권사는 대형 투자은행으로 발전을 시도하기 위해 서울은행 인수를 고려하고 있지만, 정부의 의지가 중요한 부분이어서 결과를 낙관하기는 어렵다. 그밖의 증권사들 중 B, H, K 사 등은 이미 합병시장에 매물로 나온 지 오래됐다.올해 안에 우리 증권업계도 미국의 80년대처럼 △4∼5개의 대형증권사와 △온라인 전문증권사 △높은 수수료를 받는 지점형 증권사 등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높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일은증권 파업 뒷 얘기사이버거래가 파업 ‘잠재웠다’최근 일은증권에서 발생했던 파업은 앞으로 구조조정이 진행될 때 노조가 얼마나 위축될 수 있을지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일은증권 노조원들은 증권업계 사상 처음으로 3주 가까이 파업을 했지만 고객들은 거의 불편한 점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이미 국내 주식거래의 70% 이상이 사이버거래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었다.사실상 파업은 실패한 셈이다. 일은증권의 유일한 대주주인 SWKOL은 지난해 이맘때도 리젠트증권과 합병을 시도하다 노조의 저항으로 일단 경영진 교체에만 만족하고 물러섰다. 하지만 SWKOL은 지난 연말 전격적으로 주주총회를 열어 SWKOL이 역시 대주주로 있는 리젠트증권과 일은증권을 합병, 브릿지증권으로 확대하는 안을 결의했고 지난 1월 18일 금감위의 허가를 받았다.일은증권 사태에 비춰볼 때 앞으로 증권사간 합병이 갑자기 진행되더라도 노조가 별로 저항할 방법이 없을 것이란 유추가 가능하다. 사이버거래 비중 증가로 증권업계 구조조정은 예상 밖으로 빨리 진행될 수도 있다. 즉 이번 일은증권 사태에서도 드러나듯이 대주주만 결단을 내리면 큰 잡음 없이 회사 몇 개를 합병할 수도 있는 것이다. 비록 일은증권의 파업이 금융시장의 큰 이슈로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증권업계 내부에서는 ‘폭우를 몰고 올 조각구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