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무슨 책을 읽으십니까?”‘CEO들이 자주 받는 질문 베스트 3’라도 뽑으라면 어김없이 순위에 들 질문이다. 기업을 주로 취재하는 기자 중에는 CEO의 책상에 무슨 책이 놓였는지 점검하는 게 습관인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이 읽는 책이 뭔지를 아는 건,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디지털 시대에도 책은 여전히, 사람의 생각과 아이디어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몫을 하고 있다. 그래서 김영사 고세규 편집팀장(32)은 ‘전통 제조업으로 분류되는 출판이야말로 첨단 정보산업’이며, ‘부모가 자녀에게 “너 그렇게 공부 안해서 어떻게 출판사에 취직할래”라고 잔소리하는 시대가 와야 한다’고 믿는다.경력 4년의 이 젊은 편집자는 요즘 출판계에서 매우 주목받는 존재다. 김영사에 입사한 지 2년 만에 초고속 승진, 편집팀장 자리에 앉았다. 이유가 무엇일까.고세규 팀장은 ‘인간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속도’라 회자될 정도로 빨리 책을 만드는 괴력의 편집·기획자로 유명하다.“한 권 완성하는 데 최소 이틀에서 두 달까지 걸립니다.”김영사에서 3년 반 동안 이렇게 만들어낸 책이 80여권을 넘는다. 경제 경영, 학습, 인문서 등 가리는 장르도 없다. 깨알 같은 글씨가 적혀 있는 수첩을 열어 보여주는데, 현재 동시에 기획이 진행되고 있는 책이 70종에 이른다. 이런 그를 가리켜 한 출판 관계자는 ‘시간의 속도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편집자’라 부르기도 했다.속도뿐이 아니다. 몇 년에 한 번씩 히트작을 만들어내기도 녹록한 일이 아닌데, 그는 해마다 무서운 기세로 ‘연타석 홈런’을 쳐내고 있다. <토익, 답이 보인다 designtimesp=21940> 시리즈(50만부) (8만부)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 designtimesp=21942>(5만 5,000부) <우리는 기적이라 말하지 않는다 designtimesp=21943>(5만 7,000부) <원칙 중심의 리더십 designtimesp=21944>(9만부) 등이 2001년 한 해 동안 낸 베스트셀러.“새벽 1시, 못다한 일이 생각나면 잠자리에 누웠다가도 벌떡 일어나 회사로 달려와 ‘세콤’에 문 열어달라고 청하기도 했어요.”이런 성실함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음은 자명하다. 이에 더해, 나직하게 털어놓는 자신의 생각들에서 고팀장에게는 남다른 기획 감각과 마케팅 노하우가 있음을 엿볼 수 있다.우선 가장 중요한 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계열 금융사에 들어갔지만 1년 후인 97년말 그만두고 작은 출판사에 취직했다. 연봉이 반으로 줄어드는 것을 기꺼이 감수했다. 김영사에 입사한 것은 98년 7월. IMF 위기로 출판사가 줄줄이 쓰러지는 상황인데다, 박은주 사장이 유학으로 오래 자리를 비웠다 막 복귀한 상태여서 회사 사정이 좋지 못했다.하지만 그는 편집자가 하고 싶은 걸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 있다는 데 만족하고, 회사 분위기와는 반대로 신바람 나서 닥치는 대로 부지런히 만들었다. 엄청난 속도로 책을 만들어내는 장기는 이때 생겼다.두 번째 비법이라면 ‘지금’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고 ‘3개월 뒤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를 상상하는 습관이다. 3개월이라는 기한은 책 한 권의 평균 제작 기간을 기준으로 나온 것. 이런 식으로 나온 히트작이 <도전받는 오리엔탈리즘 designtimesp=21954>이다.미증유의 테러가 일어난 9월 11일 밤.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경악하며 내내 TV 화면을 응시하던 고팀장은 버릇처럼 ‘다음엔 무슨 일이 일어날까’를 궁리하기 시작했다. ‘일단 당했으니 미국의 응징이 이어지겠군.’ ‘미국이 세게 나오면 어떤 형태로든 반작용도 있을 것이다.’ ‘그럼 미국에 대한 비판이 곳곳서 나오겠네. 이런 관점에서 쓴 글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겠다.’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곧바로 이에 맞는 글을 찾아나섰고, 미국의 저명한 사회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를 추천받았다. 미국에 직접 연락, 그의 글을 편집해 책으로 펴냈다. 지금까지 9,000부쯤 팔린 이 책은 대형 베스트셀러는 아니지만 인문 서적인데다 광고도 하지 않았던 점을 감안하면 짭짤한 장사였다.자기 내면의 욕구가 무엇인지 들여다보는 것도 유용한 방법이다. 예컨대 그가 만든 책 중 가장 많이 팔린 <토익 답이 보인다 designtimesp=21961> 시리즈(40만부)는 고팀장 자신이 읽고 싶었던 책을 만든 것이다. 10년 넘게 공부했으나 말도 제대로 못하는 지긋지긋한 영어, 평소에 ‘그냥 스르룩 넘겨보기만 하면 해결되는 그런 책 없나’ 하고 바랐던 대로 기획했다.고팀장은 마케팅을 책 만드는 것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한다. 평소 어느 기업의 경영자가 어떤 주제에 관심이 있는지 점검하고, 궁합이 맞는 책이 나오면 그를 위한 ‘맞춤형’자료를 만들어 보낸다. 언론 매체가 선호하는 서평자인 교수나 전문가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책 판매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언론사에 보낼 보도자료 만드는 노하우도 중요하다. 다양한 매체의 특성에 맞춰 여러 버전의 보도자료를 준비하거나, 서평자로 적합한 사람을 추천하고 그의 연락처까지 기재하기, 저자와 대담을 원하는 매체를 위해 ‘대담자로는 누가 맞춤하다’는 정보제공하기, 이 정도는 기본에 속한다.잠재 독자 대접에도 소홀할 수 없다. ‘책으로 내자’며 책상에 쌓이는 원고가 한 달 평균 70여개. 이 중 90%는 돌려보내야 하는 형편이다. 그는 아예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매뉴얼을 작성해 일일이 편지를 쓴다. 또 ‘이런 분야의 책은 이 출판사가 뛰어나다’면서 다른 출판사의 연락처와 담당자 전화번호까지 알려주기도 한다. “이분들도 모두 우리 독자니까요.”그는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것 중 2001년 최고의 책으로 <블루 데이 북 designtimesp=21968>과 최인호 소설 <상도 designtimesp=21969>를 꼽았다.“제가 책을 만드는 궁극적인 목표는 행복해지는 것이에요. 그런데 <블루 데이 북 designtimesp=21971>은 여기에 너무 잘 들어맞았어요. 책을 펴들자마자 순식간에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잖아요. <상도 designtimesp=21972>는 한동안 개인의 내면으로만 침잠해 가던 한국 소설의 저변 확대에 기여했다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