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국제통화 질서에서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변화 중 하나가 이미 도입된 공동화폐는 제 역할을 찾아가면서 다른 지역의 공동화폐 도입논의를 촉진시키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물론 시간을 갖고 평가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움직임은 앞으로 국제통화 질서와 환율결정 메카니즘에 커다란 변화를 예고하는 대목이다.무엇보다 미 달러화가 공식화폐 채택 여부와 관계 없이 불안감이 고조되고 있는 중남미를 중심으로 사용 비중이 크게 늘고 있다. 최근 아르헨티나는 1달러=1페소를 포기하고 페소화 가치를 40% 평가절하하자곧바로 당초 우려했던 대로 물가가 급등하고 환투기의 집중적인 대상이 되면서 외화예금,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대규모 엑소더스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갈수록 아르헨티나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최종 수단으로 한동안 수면 아래로 잠복했던 달러라이제이션(dollarization)이 다시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이미 미국 달러화를 공식화폐로 채택한 나라는 파나마, 에콰도르 등 중남미를 중심으로 10여개국에 이른다.지난해의 경우 페소화를 달러화와 유로화에 고정시키는 태환법안을 채택한 아르헨티나를 비롯해 캐나다, 멕시코, 칠레 등에서도 달러라이제이션을 검토해 왔다. 외환위기 직후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 논의가 제기됐던 우리도 지난해에 미 하버드 대학의 로버트 베로 교수가 위기방지 차원에서 원화를 포기하고 달러화를 공식통화로 삼을 것을 제안한 바 있었다.일반적으로 달러라이제이션은 두 가지 의미로 혼용돼 왔다. 하나는 국내 통화수요에서 달러화 사용 비중이 늘어나다가 마지막에 가서 해당국 통화를 대체하는 현상을 말한다. 과거 높은 물가에 시달려온 중남미 지역에서 달러화 대체현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났고, 구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에서도 이런 현상이 심화됐다.다른 하나는 미국과 완전한 통화동맹을 결성, 달러화를 법화(legal tender)로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파나마 등 중남미 국가들의 달러라이제이션은 대부분 이런 의미에서 추진돼 왔다. 물론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통화동맹 결성 이전에 달러화 사용 비중이 매우 높은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어떤 국가가 달러라이제이션을 도입하면 사실상 독자적인 화폐발행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물가와 통화가치가 안정된다. 자연히 투기적인 요인이 줄어들면서 경제 전반의 안정성과 대외신인도가 제고되는 효과가 있다. 특히 개도국들은 글로벌 추세에 적극 부응하고 국제사회에 다시 고개를 내밀면서 외자도입이 유리해지는 이점도 기대된다.이에 비해 정치·경제적으로 미국에 예속돼 정체성(Identity) 논란이 빚어질 가능성이 높다. 독자적인 화폐발행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일종의 조세수입으로 간주할 수 있는 화폐발행차익(Seigniorage)이 소멸되면서 재정수지가 악화된다.동시에 중앙은행의 최종대부자 기능이 상실됨에 따라 은행 스스로 파산위험에 대비해야 한다. 만약 충분한 유동성을 확보하지 못해 은행이 파산하게 되면 중앙은행의 구제(Bail Out)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금융시스템이 불안해지는 부정적 측면이 있다.달러라이제이션이 될 경우 실질적인 중앙은행 노릇을 하는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어떤 입장을 보이냐도 중요한 문제다. 지금까지 FRB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개도국들도 달러화를 공식화폐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관련법 개정, 국민저항 축소 등 많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세뇨리지 효과 소멸국제통화 질서에도 큰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그중 단일통화 도입논의를 촉진시킬 가능성이 높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스탠리 피셔 부총재는 “어느 한 국가가 달러라이제이션을 채택하면 소수 통화에 대한 집중과 통화동맹의 확대현상(Fewer currencies and more currency unions)이 가속화될 것”으로 예상했다.현재 중남미 국가에서는 달러화 사용이 보편화돼 있다. 아르헨티나 등 중남미 국가의 경우 모든 예금의 60% 이상을 달러화가 차지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아르헨티나 사태로 불암감이 높아지면서 달러화 사용 비중이 빨라지고 있고, 동남아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도 달러화 사용 비중이 꾸준히 높아지는 추세다.미 달러화 사용 비중이 늘어나는 것과 함께 올 1월 1일부터 일상생활에서 유로화가 사용된 지도 한 달이 다 돼간다. 오늘 3월 1일부터는 공식적인 법화로서 유로화만 통용되고 기존의 회원국 통화인 마르크화라든가 프랑화 등은 퇴장하는 일정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태다.현재까지 나타난 상태로 파악해 본다면 유로화 사용시 비용절감이 이루어짐에 따라 유로랜드 국민들 사이에 인식이 좋아져 빠른 속도로 기존 회원국 통화를 대체해 나가고 있다. 대부분 회원국에서는 유로화 사용 비중이 50% 이상 웃도는 가운데 프랑스, 독일 등 유로랜드의 중심 국가에서는 그 비중이 60%에 이르고 있는 상태다.이런 점을 감안하면 유로화의 일상생활 통용은 일단 ‘성공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동안 우려했던 유로화 가치도 최근 들어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한때 0.80달러대까지 떨어져 2류 통화로 전락할 위기에 몰렸던 유로화 가치도 최근에는 0.88∼0.90달러대로 안정을 되찾고 있는 상태다.유로화의 일상생활 통용 이후 당초 예상과 달리 빠르게 정착됨에 따라 그동안 미온적이었던 영국, 스웨덴, 덴마크도 당초 계획보다 앞당겨 유로랜드에 가입할 의사를 비추고 있다. 특히 최근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영국 국민들이 영국의 유로랜드 가입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지 않고 있는 점이 향후 유로랜드에 상당한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더욱이 현재 EU 가입을 위해 폴란드, 체코, 헝가리와 진행되고 있는 정부간 협의(IGC)도 빠르게 진전되고 있어 주목된다. 올해 안에는 그 결과가 확정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후 유로랜드는 러시아 일부 지역, 북부 아프리카로 유로랜드의 권역이 확대되면서 ‘범(汎) 유럽경제권’으로 발전될 것으로 보는 시각이 늘고 있다.미 달러화의 사용 비중이 늘어나고 유로화가 빠르게 정착됨에 따라 이에 크게 자극을 받은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공동화폐 도입 논의가 촉진되고 있다. 최근 서울에서 열린 ASEM 고베 프로젝트 회의에서 동아시아의 금융협력을 주도할 공동기구를 설립하자는 데 합의했다. 이 기구를 통해 그동안 논의 차원에 그쳤던 공동화폐를 도입하는 방안을 구체화시킨다는 계획이다.앞으로 동아시아 지역내에 설립될 싱크탱크를 통해 동아시아 지역에 단일통화가 도입될 경우 유로화 경로를 걸을 가능성이 높다. 아시아 단일통화 도입 전단계로 아시아통화제도(AMS)에 따라 각 나라간 통화가치를 일정 범위내로 수렴시킨 뒤 아시아중앙은행(ACB)을 설립해 경제여건이 비슷한 국가부터 단일통화를 우선적으로 도입·확대시키는 방안이 검토될 것으로 예상된다.결국 올해 들어 국제통화질서에서 나타나는 움직임을 보면 미 달러화와 유로화, 아시아 단일통화간의 3극 통화체제가 구체화되는 분위기다. 엔화 가치가 급격히 약세를 보이는 것도 이런 과정에서 나타나는 불가피한 현상으로 이해하는 시각도 있다. 국제통화 질서가 3극 통화체제로 굳어질 경우 환율결정은 이들 통화간의 환율 움직임에 상하 변동폭이 설정되는 ‘목표환율대(Target Zone)’가 부각될 가능성이 높다.우리나라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중간자라는 독특한 위상을 갖고 있다. 이 지위를 잘 활용해 동아시아 지역의 각종 협력 프로젝트를 구체화시켜야 미 달러화 사용 확대와 유로화 도입 성공으로 급변하는 국제통화 질서와, 갈수록 중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심화되고 있는 동아시아 지역의 주도권 싸움 과정에서 우려되는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또 우리 경제의 안정성을 보장받을 수도 있지 않나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