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블(거품)경제가 무너진 후 일본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들은 단연 주식투자자와 부동산 부자들이다. 주식의 경우 89년 12월말 3만 8,900엔을 넘어섰던 닛케이평균주가가 2002년 2월 1일 9,800엔 밑으로 추락했을 정도니 손실이 얼마나 컸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산술적으로 어림한다 치더라도 주식에 투자했던 돈의 4분의 3이 불과 10년 남짓한 기간 동안 허공으로 날아가버린 셈이다.이처럼 호되게 혼이 난 바람에 일본인들은 주식투자를 잘 하지 않는다. 시가 총액 300조엔을 넘나드는 도쿄증시는 규모면으로 볼 때 세계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가지만 일본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뜻밖에도 크지 않다. 투자 비중을 기준으로 해볼 때 도쿄증시의 가장 큰 손은 외국계 기관투자가들(약 50%)이고, 그 다음이 일본계 은행이다. 개인투자자들은 20%에도 훨씬 못 미치며 3위에 머물러 있다. 한번 덴 물에는 다시 손을 담그지 않으려는 일본인들의 조심스런 투자 패턴을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하지만 부동산은 다르다. 집값이 바닥까지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개인들이 늘어났음을 보여주듯 소규모 주택은 거래가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도심 한복판에 들어서는 초고층맨션도 인기를 몰고 다니며 만원사례로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그러나 현재 일본 부동산 시장의 관심은 온통 도쿄 심장부에 쏠려 있다. 하늘을 찌를 듯이 치고 올라가는 초고층 오피스 빌딩이 하나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 빌딩은 하나같이 완공시기가 2003년 쯤으로 거의 같아 사무용 오피스 수급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엄청날 것으로 시장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죽을 쑤고 있는 경제 상황과 맞물릴 경우 자칫 텅 빈 사무실을 봇물처럼 쏟아낼지 모른다는 불안이 이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일본 최대의 부동산업체인 ‘모리 빌딩’에 따르면 도쿄도 23구에 2003년 이후 완공되는 초고층빌딩은 모두 32동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연면적으로는 약 200만m2(약 66만평)다. 이는 모리 빌딩이 조사를 시작한 지난 86년 이후 최대 규모일 뿐 아니라 버블 후유증이 기승을 부렸던 94년의 183만m2를 크게 웃도는 것이다.초고층빌딩은 특히 도쿄도에서도 금싸라기 중 금싸라기 땅으로 불리는 시나가와, 롯폰기 일대에 집중돼 있다. 따라서 이들 지역에서만 약 30개동이 내년 중 완전한 모습을 드러낼 예정으로 알려졌다.롯본기 힐즈·덴쯔 본사 사옥 ‘관심집중’건축 중인 초고층빌딩 중 가장 화려한 조명을 받는 것은 롯폰기의 ‘롯폰기 힐즈’와 도쿄역 인근에 광고대행사 덴쯔가 짓고 있는 본사 사옥이다. 이들 건물은 모두 외관에서부터 주위를 압도한다. 모리 빌딩이 재개발 형식으로 세우는 롯폰기 힐즈는 높이도 높이(238m, 54층)지만 덩치가 발군이다.4개의 타워가 복합형태로 들어서는 이곳의 연면적은 73만m2(약 22만평)로 일본 최대급이다. 사무실 용도로 지어지지만 840호의 주택 외에 미술관, 극장, 녹지 등도 다양하게 들어선다. 덴쯔 본사는 높이가 215미터, 연면적은 31만m2(약 10만평)로 면적만 놓고 보면 야구장으로 쓰이고 있는 도쿄 돔의 7배나 된다.일본 부동산 전문가들은 10년이 넘도록 불황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서도 초고층빌딩이 소리없이 신축되고 있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첫째 철도가 민영화되면서 과거 정부가 갖고 있던 대규모 부지가 97년을 전후해 대량으로 쏟아져 나왔고, 이같은 과정에서 사무용 빌딩에 적합한 땅이 민간 기업들 손에 하나둘씩 넘어갔다는 것이다.둘째 땅값 하락 때문에 미뤄왔던 도심 저층밀집지의 재개발, 재건축 작업이 한데 몰리다 보니 신축 빌딩의 완공시기가 겹치게 됐다는 분석이다.전문가들은 초고층빌딩이 한꺼번에 입주고객을 맞아들이게 됨에 따라 오피스 시장 판도에도 엄청난 변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사무실 공간이 남아도는 것과 이로 인한 임대료 하락, 그리고 경쟁력이 뒤지는 노후빌딩의 도태 등이다.부동산 관련조사업체인 이코마데이터 서비스시스템에 따르면 도쿄 23구의 주요 빌딩 평균 공실률은 2000년 12월 이후 3%대를 유지, 균형상태의 잣대가 되는 5%를 여유있게 밑돌아왔다. 그러나 이 비율은 2001년 12월말 4.3%로 껑충 뛰어 건물관계자들을 바짝 긴장시켰다.이코마데이터는 내년 이후 이같은 현상이 부쩍 더 심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경기가 풀리지 않고 지금과 같이 계속 바닥을 긴다면 새로 들어설 빌딩도 고객잡기에 팔을 걷어붙일 수밖에 없어 공실률이 수직 상승할 수밖에 없다는 관측이다.이코마데이터가 점치는 또 하나의 현상은 사무실 임대료 하락이다. 23구 주요 빌딩의 평균임대료는 92년의 평당 2만8,000엔대를 절정으로 미끄럼을 타 99년 1만4,000엔대까지 내려온 후 3년간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임대료는 하지만 공실률 상승을 배경으로 앞으로 더 추락할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고 회사측은 보고 있다.신축 빌딩들이 호조건을 제시하면서 기존 입주고객을 빼가려 할 경우 이를 막을 수단은 임대료 인하밖에 더 있겠느냐는 것이다. 일본발 공황설까지 그럴싸하게 나돌 정도로 일본경제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오피스 시장은 수요부족에 직면할 것이 뻔하고 이는 필연적으로 사무실파동을 초래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따라서 2003년이야말로 부동산시장에 엄청난 충격이 몰아닥칠 것이라며 위기설까지도 조심스럽게 제기하고 있다.그러나 빌딩건축을 주도하는 업계 입장에서는 색다른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도쿄야말로 평지는 과밀하면서도 공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 입체적인 도시건설에 실패했다며 더 늦기 전에 도시재생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다. 일본 총리의 자문기구인 경제재생전략회의 멤버이기도 한 모리 빌딩의 모리 다케시 사장이 이같은 주장을 펴는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이대로 가면 도쿄는 세계 대도시들 중에서도 후진 그룹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며 “도쿄의 도시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일본은 쓰러지고 만다”고 역설하고 있다.모리 빌딩은 무려 17년이나 걸려 진행해온 롯폰기 힐즈의 건립 과정에서 뉴욕 맨해튼을 표본으로 삼고 있다. 단순히 사무만 보고 밤에는 모두 교외의 집으로 돌아가 도심이 텅텅비는 식의 개발이 아니라 직장과 집이 밀접하게 붙어 있는 ‘직주인접’의 생활형 도시공간 창조를 목표로 했다는 것이다. 모리 사장은 “직장과 주거의 분리는 공업화시대의 유물”이라며 “일하는 시간을 뺀 나머지를 수면과 통근 따위에 몽땅 뺏기기만 해서는 도시와 지역사회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초고층 마천루의 증가는 도쿄의 스카이라인을 바꾸어놓는 한편 사무실 임대방식에도 상당한 변화를 몰고올 전망이다. 사무실을 획일적으로 똑같이 꾸며놓고 그 안에 고객회사를 집어넣는 방식 대신 내장 설계를 입주사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신방식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시장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모리 빌딩, 미쯔비시 부동산 등은 구미계 기업들에 인기가 높은 이같은 방식을 내년에 완공되는 신축 빌딩부터 적용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