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도 대형은행에 속하는 은행중 하나였던 일본장기신용은행은 한때는 자산규모가 24조엔(국내 최대 은행인 국민은행 보다도 훨씬 더 큰 규모)에 달했던 금융기관이었다. 그러나 지난 98년 11월 부실채권의 누적과 보유하고 있던 유가증권 손실 등으로 인해서 사실상 도산했다.은행의 도산은 금융시스템 불안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채무초과 상태에 빠진 일본장기신용은행을 부실금융기관으로 지정한 이후 4조 3,000억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해 은행 경영의 정상화를 추진했다. 또 부실화된 은행의 주식을 일본 정부가 전부 사들여서 일시적으로 국유화한 뒤 99년 2월부터 일본 정부의 주도로 이 은행의 매각을 추진하기 시작했다.먼저 일본 정부에서는 은행의 매각을 주선해줄 재정주간사(Financial Advisor)로서 미국의 골드만삭스를 선정했다. 3개월 이내에 매각을 주선하도록 요청했고 만일 3개월 이내에 매각이 성사되면 성공보수를 지불하기로 골드만삭스와 계약을 체결했다.그러나 매각 작업은 아무런 진척도 없었고 실제로 이 은행이 매각된 것은 1년 후인 2000년 2월이었다. 이를 성사시킨 사람은 미국인 R과 그의 친구들이었다. 그는 투자조합을 구성해 4조 3,000억엔에 이르는 거액의 공적자금이 투입된 일본장기신용은행의 경영권을 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겨우 단돈 10억엔에 인수하는 수완을 발휘했다.투자조합은 소수의 개인투자가나 금융회사들이 투자한 돈으로 기업을 인수해 일정 기간 후 되팔아서 이익을 실현한 뒤에 투자가들에게 이익을 배분하는 일종의 사설 투자 펀드(Private Equity Fund)이다. 바로 이 펀드를 설립하고 관리하는 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R이었다.그는 과거에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었던 폴 볼커(Paul Volcker)를 앞세워서 일본 정부가 금융위기를 극복하려면 일본장기신용은행이 확실히 재건돼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의 국내은행들이 인수하는 것보다는 외국계 자본이 인수해야 한다는 점을 일본 정부에 주지시켰다.당시 미국의 재무장관은 일본 정부에 대해 일본이 부실채권문제와 금융위기를 ‘투명한 방법’으로 ‘확실한 의지’를 갖고 극복해줄 것을 요구했다. 또 일본 재무장관에게 일본장기신용은행을 외국에 매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직접적으로 전달했을 것이라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들도 난무했다.결국 일본 정부는 대내외에 부실채권의 정리와 금융위기의 해결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려는 듯 일본장기신용은행의 인수를 희망한 국내 금융회사들을 모두 배제한 채 외국 자본에 매각하는 방향으로 최종 선택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장기신용은행을 외국 자본 그것도 일개 사설 투자 펀드에 매각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 국내에서도 많은 비판과 논란이 있었다.일본의 은행을 왜 외국 자본에 넘겨주어야만 하는지와 외국 자본 중에서도 “은행도 아닌 단지 펀드에 불과한 투자조합에 은행을 넘기는 것이 과연 합당하냐”는 이른바 투자펀드의 은행인수 적격성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많은 이들이 일본이 “자본이 모자라거나 달러가 부족한 나라도 아닌데 왜 일본장기은행을 일본 국내에서 매각하지 않고 외국인들에게 팔려고 하느냐”, 게다가 “이미 거액의 공적자금 까지 투입한 은행을 외국인들에게 왜 헐값에 넘기느냐는 등의 비판론이 제기됐다.선진금융 기법을 도입하기 위해서라는 대외 명분 하에서 외국의 은행들에게 매각하는 것까지는 이해되지만, 은행도 아닌 사설 투자 펀드에 일본장기신용은행을 매각하는 일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불만도 터져나왔다.미국의 은행감독 당국도 은행을 투자펀드가 인수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그동안 매우 부정적이었다. 바젤 은행감독위원회에서도 은행경영의 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은행을 인수하려는 자의 적격성을 엄격히 심사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일본장기신용은행의 매각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지 1년 만인 2000년 2월 미국인 R이 주도한 투자조합에 일본장기신용은행의 주식 전액을 넘겼다. 그것도 3년 이내에 부실채권이 새롭게 발생하면 정부가 다시 사주기로 하는 일본판 풋백 옵션을 붙여 10억엔에 매각했다.투자조합을 구성해 일본장기신용은행의 주식을 단돈 10억엔에 매입한 뒤 R과 그의 친구들은 자문료의 명목만으로 주식매입 대금의 6배에 가까운 60억엔 정도의 거금을 공적자금이 투입된 일본장기신용은행에서 챙겨 갔다.그리고 일본장기신용은행은 이름을 신생은행으로 바꾸었고, 과거 씨티은행 일본지점 대표이던 일본인을 신임 행장으로 영입했다.우리나라에서도 일부 은행들에 거액의 공적자금을 투입한 이후 외국의 은행도 아니고 단지 투자펀드에 불과한 외국 자본에 헐값으로 풋백 옵션까지 넣어서 매각햇다는 시비가 계속되고 있다. 즉 씨티은행 서울지점 출신들이 시중은행의 최고경영진에 발탁되는 등 거의 똑같은 사례가 이웃나라 일본과 한국에서 되풀이되고 있는 모양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이 시대의 금융 후진국들이 모두 겪어야 할 유행성 신드롬이 아닌지” 하는 허전한 느낌마저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