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상배포 큰 무역상 기질 기업에 투영개방 마인드, 사회 환원 등 임상옥과 닮은꼴 … 김신권 한독약품 회장 최고령평북 의주는 서부로 신의주시와 닿아 있고 북부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인접한 곳이다. 북서쪽 교외의 삼각산 정상에 올라가면 중국의 구련성이 눈에 들어오고 태조가 회군을 한 위화도가 발 아래로 내려다보일 정도로 중국과는 지척인 거리.의주상인(만상)들은 중국 구련성 인근 책문이라는 곳에서 밀무역을 했다. 주로 중국으로 간 사신 일행이 되돌아올 때 의주상인들이 책문 밖까지 마중을 나가 짐을 실어오는 마부의 명색으로 압록강을 건너다니며 이뤄졌다. 지금으로 따지면 정부·지자체 해외 투자설명회에 기업인들이 수행, 거래를 도모하는 방식이었던 셈이다.임상옥을 발탁한 인물로 전해지는 홍대인도 책문 후시를 통해 큰 돈을 번 사람이다. 홍대인의 뒤를 이어 임상옥이 의주상인의 계보를 이었지만 이후는 뚜렷한 맥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이후 의주상인에 대한 기록은 한국교회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종 11년 때인 1874년에 중국으로 기독교를 전파하러 온 스코틀랜드 출신 로스 선교사가 50대 의주상인을 중국 단둥에서 만나 그에게서 조선의 정세와 언어를 배웠다는 것이다. 이후 이 의주상인의 아들 백홍준은 한국 교회 최초로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이 되었고 같은 의주상인으로 친구지간이었던 이응찬, 이익세, 서상륜 역시 기독교를 받아들여 성경을 반포하는 일에 앞장섰다.이처럼 의주상인은 중국과의 자유로운 왕래를 통해 서양 문물과 종교를 비교적 유연하게 받아들였던 것으로 해석된다.고 최태섭 회장 ‘유산 사회 환원’ 노력이후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의주상인의 계보는 흔적을 찾기 힘들다. 그러나 평북 의주 출신으로 경제계에 진출한 인사는 적지 않다. 이들은 광복과 전쟁 와중에 맨손으로 고향을 떠나왔거나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월남한 2세대가 대부분. 중국땅을 넘나들며 상거래에 도를 튼 선대들의 기질이 후대에 이어진 셈이다.의주상인의 맥을 잇는 기업인 가운데 김신권 한독약품 회장(88)은 가장 고령에 속한다. 김회장은 아들 승남씨를 북에 두고 월남한 1세대 실향민.김회장은 1954년 한독약품을 창립한 후 1957년 독일 훽스트사(현 아벤티스 파마)와 협력관계를 맺고 합작회사로 전환한 뒤 50년 가까이 독보적인 제약회사로 키워왔다. 지금은 아들 김영진 사장에게 경영권을 물려준 상태.과거 의주상인들이 외국과의 교역에 열심이었던 것처럼 김회장은 일찍이 해외 합작에 눈을 돌려 기업 기반을 강고하게 만들었다. 현재 한독약품은 제약업계에서 가장 오래된 합작기업이다.한글라스그룹의 경우 의주 출신의 이봉수 전 회장과 정주 출신 최태섭 전 회장이 1957년에 공동 창업한 회사다. 두 분 모두 이미 작고했으며 현재는 이봉수 전 회장의 아들 이세웅 회장이 회사를 이끌고 있다.두 창업주는 한국전쟁의 후유증으로 나라가 폐허 속에서 허덕이던 1957년 인천에서 유리공장을 가동했다. 한줌의 모래를 섭씨 1,500도의 불로 달궈 유리를 만든 첫 7개월 동안의 어려움과 감격은 지금도 젊은 직원들 사이에 회자되는 ‘전설’.특히 최태섭 전 회장은 생전에 “사회에서 번 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기보다 올바른 교육을 위해 사회로 환원하자”는 ‘유산 안물려주기’ 운동을 십수 년 동안 펴 사회의 귀감이 됐다. 거상 임상옥이 재산을 모두 사회로 환원하고 눈을 감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또 고 이봉수 회장은 한글라스 외에도 부동산관리회사 신일기업을 설립해 회장을 겸하는 등 사업적 수완이 뛰어났다. 현재 맏아들 이세웅 회장이 신일기업을 물려받았으며 학교법인 신일학원 이사장으로 교육사업에도 관심을 쏟고 있다.장영수 대우 건설부문 총괄 사장(67)의 경우 창업이 아닌 전문 경영인의 길을 가는 의주 출신 기업인이다. 태영개발, 경남기업, 대우 등 건설분야에서 잔뼈가 굵어 ‘타고난 기술경영인’으로 불린다. 99년 제21대 대한건설협회장으로 취임했으며 사내에서는 부실기업으로 인수했던 경남기업을 정상화하는데 공로가 큰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일신상의 이유로 대한건설협회장을 사임했고 조만간 대우에서도 퇴사, 은퇴를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진다.이밖에 의주 출신 대표 기업인으로는 김성섭 대영통상 회장(81), 박영근 F.C.N 사장(61) 등이 꼽힌다. 의주와 인접한 신의주 출신 기업인으로는 김상호 중앙교통 회장(72), 이청승 한국폴라 회장(57), 조덕영 영유통 회장(64), 홍평우 신라명과 사장(58) 등이 있다.송상근검한 생활태도·신용 목숨보다 중시이회림(동양화학), 서성환(태평양), 우상기(신도리코) 회장 등 대표적 후예고려의 수도였던 송도(개성) 출신의 상인을 ‘송상’이라고 부른다.이들은 남에게 돈 빌리는 것을 꺼리며 함부로 돈을 빌려주지도 않는다. 물론 개성상인끼리는 보증인의 신용만 확실하면 돈을 꿔주는 ‘시변제도’를 운영할 정도로 신용을 중시했다.2002년 활동 중인 송상 출신 기업인들은 이런 송상의 장사철학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특히 배타적이라는 비판도 듣지만‘신용제일주의’와 ‘한우물 파기’라는 송상의 기풍이 그대로 보인다.현재 <동아일보 designtimesp=22118> 인물정보에 수록된 개성 출신 기업인은 36명이다. 대표적인 재계인사로는 이회림 동양화학 명예회장, 서성환 태평양 회장, 우상기 신도리코 회장, 고홍명 한국빠이롯드 회장, 이정호 대한유화 회장, 임광정 한국화장품 명예회장 등을 꼽을 수 있다.서성환 태평양 회장(78)은 송상정신을 철저히 실천한 전형적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개성에서 도매상을 운영하던 선친 밑에서 일을 배운 뒤 화장품점을 직접 경영하기도 했다. 개성시절 서회장은 원산에 가서 원료를 구입하는 일부터 제조, 판매까지 도맡아 했다고 한다.1945년 태평양을 설립한 그는 55년간 오직 화장품 사업에 주력했다. 다른 분야에 손을 대지 않은 것은 서회장의 ‘잘 할 수 있는 분야에서 한우물을 파야 한다’는 송상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회장은 또 “한 번 거래한 업체와는 절대 헤어지지 않는다”며 신용제일주의를 강조한다.그가 지난 60년대 초반 관악공장을 설립할 때 자금난으로 큰 어려움에 처한 적이 있다. 그때 거래처 사장들이 선수금을 제공해 위기를 넘긴 일이 있다. 신용을 중시하는 그의 경영방식을 빛을 발한 순간이다.신도리코 창업자인 우상기 회장(82)도 ‘짠돌이 경영’으로 유명한 개성출신 경제인이다.우회장이 1939년 졸업한 개성공립상업학교는 개성상인의 경영관을 익히는 명문으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학교를 졸업한 뒤 실무를 익히던 그는 한국전쟁 때 월남해 무역업을 하다가 1960년 국내 최초의 사무기기 전문기업 신도교역을 창업했다.그는 지난 62년 서울의 각 구청에 복사기를 납품할 때 지게꾼들과 함께 직접 복사기를 져 나를 정도로 불필요한 경비지출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창업이래 한번도 적자를 내지 않은 기록도 ‘무차입경영’을 고수한 우회장의 일관된 경영관 덕분이라는 게 그를 지켜본 사람들의 평이다.1세대 연로, 송상모임 뜸해한국빠이롯드를 설립(1995년)한 고홍명 회장(77)은 아직도 목소리에 고집스러움이 그대로 묻어날 정도로 줄기차게 한우물만 팠다. 지금까지 문구류 이외에 다른 쪽 사업을 기웃거리지 않았다.요즘도 서울 종각역 부근의 사무실에 날마다 출근하는 그는 상황에 따라서는 해외출장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정력적으로 일한다. 사업신조 역시 송상 출신답게 첫째도 신용, 둘째도 신용이다. 그는 “개성에서 자라면서 신용 없이 물건을 사고 팔아본 일이 없다”고 회고했다.이밖에 개성시 명예시장을 맡고 있는 박광현 제일항역 회장(67), 김재린 동방항공화물 회장(84), 남상유 (주)태웅 회장(67), 윤장섭 성보화학(주) 회장(80), 임충헌 한국화장품 회장(63), 장경작 웨스틴조선호텔 사장(59), 하동환 한원그룹 명예회장(72), 한동수 중앙석유 회장(73) 등이 개성출신의 핏줄을 이어받은 경영인이다.단신으로 월남해 자수성가한 1세대 개성 출신 경영인들은 대부분 현직에서 은퇴했거나 사망했다.개성상회 한창수 전 사장과 한국제지 단사천 전 명예회장은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서성환 태평양 회장과 우상기 신도리코 회장 등은 지병으로 바깥에 거의 나서지 않고 있다. 또 이들끼리의 모임도 거의 끊긴 상태다. 개성에서 태어나고 자란 김재린 동방항공화물 회장은 “예전에 활발했던 모임도 최근엔 뚝 끊어진 상태”라며 “세상이 그만큼 각박해진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무차입, 한우물 파기 등 ‘송상의 정신’은 그 후예들을 통해 면면이 흐르고 있다.조선상계의 역사18세기말 철폐로 급성장 했다가 개항 후 몰락드라마 ‘상도’의 임상옥이 활동한 시기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까지다.드라마에 나오는 사상(私商)은 송상, 만상, 경상 등이다.서울을 비롯한 각 지방 도시에 사상들이 나타난 것은 17세기초. 도시 근교의 농어민이나 소규모 생산자, 군졸 등이 직접 생산한 채소, 과일, 수공업 제품 등을 행상으로 판매하면서부터다. 일찍부터 상업을 독점해 왔던 시전상인들이 금난전권(사상들의 판매행위를 직접 금지시키고 상품을 몰수할 수 있는 권한)을 통해 사상들의 활동을 억압했지만 임상옥이 본격적으로 활동한 18세기 말에는 육의전을 제외한 금난전권이 철폐되면서 사상들은 상권을 확대해 나갔다.그들은 각 지방의 장시를 연결하면서 물건을 교역하고, 각지에서 지점을 둬 상권을 확장했다. 이미 고려 때부터 그 이름을 떨친 개성의 송상은 전국에 지점(송방)을 두고 인삼을 재배, 판매하고 대외무역에도 깊이 관여했다.한강을 근거지로 한 경상은 운송업에 종사하면서 주로 서남 연해안을 오가며 미곡, 소금, 어물 등의 운송과 판매를 장악했다.의주 만상은 국경무역에 탁월함을 보였다.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중국 책문의 청나라 상인들과 인삼과 은 등을 교역했다.동래 내상은 인삼, 쌀, 무명, 청 수입품 등을 일본에 수출하고 은, 구리, 황, 후추 등을 수입해 청나라에 되파는 중계무역으로 성장했다.이들은 1876년 개항 후 외래 자본주의 침투로 인해 그 세가 약해진 데다, 일본의 침략으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INTERVIEW‘만상후예’ 이청승 한국POLA 회장임상옥 빼닮은 의주상인 ‘전형’“‘장사는 이문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라는 임상옥의 지론에 동의합니다. 나의 인사 원칙도 ‘적재적소·실사구시’이지요. 그러고 보니 사람을 키우는 교육·문화사업에 마지막 승부를 걸어보려는 뜻도 서로 통하는 것 같군요.”한국POLA 이청승 회장(57)은 19세기 거상 임상옥의 면면과 많이 닮아 있다. 임상옥의 고향 평북 의주와 지척인 신의주 태생인 데다 대학 1학년 시절부터 사업에 눈을 떠 수완을 발휘한 것, 한국POLA 창업 시절 외국 바이어에 배포 좋게 맞선 경험까지도 비슷하다. 게다가 선친은 14세 때 중국으로 넘어가 거부가 돼 돌아온 타고난 사업가였다.지난 86년 이회장은 세계 10위권 화장품사였던 일본 폴라(POLA)에 무작정 찾아가 신용과 명예만으로 합작을 제의했다. 비슷한 시기 국내 굴지의 대기업 두 군데에서도 폴라와 합작을 원했지만 결과는 이회장의 승리로 돌아갔다.이회장의 사업가적 뚝심은 IMF 외환위기 때 또 한 번 발휘됐다. 백화점 거래선이 부도를 맞는 등 어려움을 겪을 때 일본으로 날아가 연 2%의 초저금리로 150억원의 민간차관을 들여왔다. 덕분에 지금의 한국POLA와 계열사는 금융부채가 전혀 없는 건실한 회사가 되었다. 교육사업에도 뜻을 두고 지난 95년 중국 베이징에 자신의 호를 딴 현우예술대학을 설립했고, 98년부터는 국제디자인대학원 운영에도 몸담고 있다.요즘 이회장은 한·중·일 3국의 음식문화를 한자리에서 체험할 수 있는 신개념 레스토랑 ‘베세토로’설립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직원들을 일본 등지에서 교육하는 등 서비스 질도 최상급으로 높인다는 구상이다. “1년쯤 쉬겠다는 계획을 취소하고 다시 실전에 나갑니다. 교육과 문화, 두 가지에 내 인생 ‘마지막 승부’를 걸기로 결심했어요.”INTERVIEW‘송상후예’ 이회림 동양제철화학 명예회장신용·도전 중시하는 ‘마지막 송상’서울시 중구 동양제철화학 모든 사무실에는 이회림 회장(85)이 직접 붓으로 쓴 ‘중용처세(中庸處世)’글이 눈에 띈다.이회장은 “부족하거나 지나치지도 않으며 편중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의미로, 이는 모두 더불어 사는 지혜를 터득하기 바라는 마음에서 적은 것”이라고 뜻풀이를 했다.흔히 이회장을 ‘마지막 송상’이라고 부른다. 신용과 도전을 목숨보다도 중요시한다는 송상의 철학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실천했다는 이유에서다.신문에 끼여 배달되는 광고 전단지를 잘라 뒷면을 메모지로 활용하는 습관을 지금까지도 계속할 정도로 근검한 생활태도가 몸에 배어 있다.‘부유한 상인일지라도 고기 굽는 냄새가 담장 밖을 넘어가면 손가락질을 받는다’는 개성상인의 풍토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15세 때부터 고향인 개성에서 포목점 점원으로 일했던 이회장은 1937년 개성의 남대문 부근에서 전복상회라는 포목상을 열어 독립기반을 마련했다. 월남한 이회장은 1945년 도매상인 이합상회를 설립, 종로의 상권을 장악했다. 연이어 무역회사인 개풍상사를 설립, 한국 무역의 개척자 역할을 하면서 지금의 동양제철화학을 일궈냈다.지금도 서울 중구 소공동 본사 사무실에 날마다 출근, 중요한 회사 경영정책을 직접 챙기고 있다.그는 후배 경영인들에게 “덕장이 돼라”고 강조했다.“사업가는 모름지기 덕장이 돼야 합니다. 지략이 좀 모자라고 용맹성이 뒤떨어지더라도 직원을 내 가족처럼 사랑하고 키워주는 아량이 없으면 흥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기업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