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주부들은 ‘일하는 여성’의 상징이었다. 아이를 낳고도 가정과 직장을 동시에 꾸려나가는 미국의 ‘원더우먼’들이 이른바 페미니즘(여권신장운동)의 모델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요즘은 그런 추세가 달라지고 있다. ‘직장을 떠나는 엄마’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미국 인구센서스국의 발표에 따르면 가장 최근의 인구조사인 지난 2000년을 기준으로 할 때 한 살 미만의 아이를 가진 주부들 중 일자리를 갖고 있거나 일거리를 찾는 비율은 55%로 나타났다. 2년 전인 98년엔 이 비율이 60%에 달했다.지난 76년부터 계속 증가하던 이 비율이 25년 만에 처음으로 꺾인 셈이다. 첫 임신기간 중 일을 하던 여성들의 비율도 지난 61년 이후 거의 40년 만에 처음 감소하고 시작했고, 3세 미만의 아이를 둔 일하는 주부들도 99년 400만명에서 2000년에는 390만명으로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주부들이 직장을 떠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일도 중요하지만 육아가 더 중요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최근 육아를 위해 직장을 떠난 코네티컷주의 로빈 베로레시(34)는 “나는 우리 앞 세대의 여성들이 했던 ‘일하면서 자녀를 키우는 풍토’가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그들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느라 희생을 많이 했지만 우리에겐 더욱 폭넓은 선택이 있다”고 강조한다.첨단기술의 발달로 집에서도 어느 정도 일을 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서고, 오랜 경기호황으로 아이들이 크면 재취업이 가능하다는 생각도 이같은 추세에 한몫하고 있다. 오랫동안 물가가 안정되면서 남편의 소득만으로도 살림을 충분히 꾸려나가게 된 것도 중요 요인 중 하나다.경기침체로 인한 일시적 현상 일수도물론 아이를 돌보기 위해 직장을 등지는 여성은 아직 소수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최근 경기침체 때문에 일시적으로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 아니냐는 견해도 있다.그러나 경기침체 때문이라면 지난번 경기후퇴기인 91~92년에도 직장을 떠나는 여성들이 늘었어야 했지만 그때엔 일하는 여성들의 비율이 증가했다. 전문가들은 그래서 이런 변화를 구조적인 추세변화로 받아들인다. 이런 추세가 지속될 경우 앞으로 심각한 노동력부족을 야기할지 모른다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젊은 세대들의 가치관 변화가 여성들을 가정으로 향하게 하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각종 조사결과는 20~30대들이 사람들간의 관계, 일과 가정생활의 균형 등에 삶의 우선순위를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카탈리스트라는 뉴욕의 한 조사연구기관에 따르면 X세대 여성의 86%는 사랑하는 가정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한다.겨우 18%만이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중요하다고 응답했다. 아이가 첫니가 나올 때 출장 중이었다는 펜실베이니아주 한 리서치 회사의 회계업무를 맡고 있던 그윈 반스(29)는 출장에서 돌아오자 당장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녀는 “요즘 매우 행복하다. 딸과 함께 조금이라도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집으로 급하게 달려오지 않아도 된다는 게 이렇게 좋은 줄 몰랐다. 딸과 함께 보내는 것이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이다”고 말한다.바쁘게 사는 것에 대한 환멸도 직장을 그만두는 요인 중 하나. 자신들의 ‘엄마’가 회사를 다니며 자신을 키우려고 애쓰는 것을 지켜봤던 젊은 세대들은 이제 자신들은 그런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고 한다.X세대는 베이비붐 세대와는 달리 동시에 두 가지를 하지 않으려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라는 책의 저자인 브루스 툴간은 “젊은 세대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던 어린시절의 나쁜 추억을 닮아가지 않으려 한다”며 “그들은 여성들이 일하는 게 당연하것을 여겼던 선배 세대에게서 무언가 개선할 점이 많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고 말한다.고용시장의 탄력성이 부족한 것도 여성들이 직장을 떠나게 만드는 이유이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아직 여성들의 육아에 대한 배려에 소홀하다.미국 기업의 24%만이 직원들이 긴급한 이유가 있을 경우 자녀들을 직장에 데려오도록 허용하고 있다. 어린 자녀를 돌보는 ‘유아방’을 운영하는 회사는 단지 5%에 지나지 않는다. 출장이 많은 보험소송 업무를 맡고 있던 변호사인 에디 호프마이스터(36)는 “네 살 난 딸의 생일파티만이라도 제대로 해주고 싶었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고 회사를 그만둔 이유를 설명한다.여성 가정 복귀관련 찬반양론 팽팽가정이 생활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여성들만이 아니다. 래드클리프 퍼블릭센터와 해리스 인터액티브의 2000년 공동조사에 따르면 21~39세의 남성 중 80% 이상이 가정을 잘 돌볼 수 있는 직업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같은 나이 또래의 젊은 여성들의 응답비율인 85%와 거의 비슷한 비율이다.하지만 정작 자녀들을 위해 직장을 그만두는 것은 아직 여성들의 몫이다. 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00년을 기준으로 할 때 아이들이 6세 미만인 결혼가정 중 남편이 일하고 부인이 집에 있는 비율이 38%인 데 비해 남편이 집에 있고 부인이 일하는 비율은 겨우 3%뿐이었다.여성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현상에 대해 여성계 안에서 찬반양론이 팽팽하다. 여성이 집에 있는 것은 페미니즘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지적이 있는 반면, 여성들이 육아를 위해 일시적으로 직장을 그만둘 수 있는 것이 진정한 페미니즘이란 주장이다.보스턴에 있는 PR회사인 비쇼플 살로먼 커뮤니케이션스의 라셀 터틀(31)은 “아이를 낳으려고 회사를 그만두는 것은 50년대식 발상”이라며 “직장을 떠난 동료들이 자녀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e메일로 보내올 때는 착찹한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그녀는 여성들이 직장을 그만뒀다가 다시 돌아올 경우 임금이나 승진에서 많은 불이익을 받게 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온라인 채팅 및 콘텐츠 사이트인 iVilliage의 편집장 낸시 에반스는 “최근 들어 삶의 형태가 매우 다양화되고 있는 만큼 개인들의 선택을 가능한 한 배려해 줘야 한다”고 말한다. 가정으로 돌아오는 엄마들의 선택을 인정해야 한다는 얘기다.그러나 찬반양론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추세는 계속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전망이 이어진다. 세 아이를 키우기 위해 의사라는 전문직을 포기한 제니 웹 라이트(32)의 얘기는 왜 그런 추세가 이어질지 잘 설명해 준다.“병원을 그만뒀을 때 교회를 같이 다니는 아주 가까운 사람이 ‘모든 것을 던져버린 느낌이 어떠냐’고 물어왔다. 나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대답했다. 일을 할 때는 돈을 벌더라도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으나 이제는 마음이 편하다. 삶의 작은 행복에 감사한다는 말의 뜻을 이제야 이해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