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활동 측면에서 본 2002년 3월 일본의 현주소는 ‘빙하기’다. 가구당 평균 저축액이 1,500만엔 가까이 된다지만 국민들이 지갑 단속에만 매달리니 경제가 잘 굴러갈 리 없다.돈이 돌지 않는 바람에 기업들은 기계 돌리는 시간을 줄이며 재고와의 싸움에 허덕이고 있다.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다 지친 상인들 사이에서는 “장사 못해 먹겠다”는 탄식이 쏟아지고 있다.소비 빙하기를 녹이고 생존경쟁에서 승자가 되려는 기업들이 안간힘을 쓸수록 고객들은 즐거워진다. 좀더 좋은 품질과 낮은 가격으로 포장한 상품, 서비스가 홍수를 이루면서 고객의 위상은 높아지고 눈요기도 풍성해지기 때문이다.겨울잠을 깨고 봄 상전(商戰)에 돌입한 일본 시장의 최고 키워드는 ‘역발상’과 ‘파격’이다. 경쟁업체와 소비자들이 생각지 못했던 아이디어 및 허를 찌르는 과감한 발상의 상품들이 시장 판도의 핵심 변수로 등장한 데 따른 지적이다.상품 전문가들과 일본 언론은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것들로 닛산자동차의 소형 승용차 ‘마치’와 소니의 컴퓨터 ‘바이오W’, 전일본공수(ANA)의 ‘경품항공권’, 기린맥주의 발포주 신제품 ‘고쿠나마(極生)’를 꼽고 있다.이와 함께 이들 제품은 시장을 리드해온 톱 메이커들의 상품, 서비스라는 점에서 중·하위 업체의 모방전략과 차원을 달리 한다며 앞으로 시장에 미칠 변화를 주시하고 있다.닛산자동차가 지난 2월 26일 모델을 공개한 소형차 ‘마치’는 최근 등장한 신상품들 중 일본 언론의 조명을 가장 화려하게 받았다. 언론이 수많은 신모델 자동차 중 ‘마치’에 유독 강한 눈길을 준 이유는 한 가지였다.프랑스 르노가 닛산의 경영권을 장악한 후 가혹할 정도로 닛산의 구조조정을 밀어붙였던 곤 사장이 공격 경영을 염두에 두고 내놓은 사실상 첫 작품이기 때문이었다.지난 99년 6,800억엔의 거액 적자를 냈던 닛산이 흑자기업으로 탈바꿈했어도 일본 시장과 소비자들의 평가는 후한 편이 아니었다. 집안 살림은 좋아졌다지만 판매 일선에서 닛산은 도요타자동차와 혼다에 눌려 기도 제대로 피지 못했다.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닛산의 자동차 중 동급 모델에서 판매 랭킹 10위 안에 들어가는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야 할 정도였다. 곤 사장이 ‘닛산의 존재감을 높여줄 차’라며 기대를 감추지 않은 것도 이같은 배경을 바탕에 깔고 있다. 마치의 기본 컨셉은 한 마디로 말해 ‘과감한 역발상’이다.일본의 소형차들은 일반적으로 무난한 디자인에 치우쳐왔다. 폭넓은 계층의 운전자들이 타는 자동차에 튀는 디자인을 택하는 것은 모험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마치는 차체 외관이 전반적으로 둥근 분위기를 내도록 했다. 차 지붕보다 운전석 밑부분을 넓게 만들어 약간 옆으로 퍼진 모습을 띠고 있다. 쉽게 말해 기발한 디자인을 도입한 것이다. 마치의 디자인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들은 ‘너무 튄다’며 혹평을 퍼부었다.그러나 디자인 실무진들은 기발한 디자인만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며 실용성, 승차감등도 최대한 배려해 소형차를 탄 것 같지 않은 느낌을 주도록 했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진가는 타본 사람만이 안다”며 “남녀노소 모두가 만족할테니 두고보라”고 장담한 것으로 알려졌다.상식을 뒤엎는 발상으로 소비자들의 시선을 잡아끈 또 하나의 업체는 ANA다. 이 회사는 추첨으로 국내선 항공권 50매당 1매 분의 편도운임을 되돌려주는 사은행사를 지난 1월부터 실시, 뜨거운 인기를 누리고 있다. 자동발매기에서 항공권을 구입해야 하는 제한이 따라붙지만 ANA를 이용하는 탑승객은 당첨시 그 자리에서 공짜 비행기를 타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이 행사를 기획하게 된 아이디어는 미국 동시다발 테러의 후유증과 경쟁사들의 통·폐합에 따른 위기감에서 나왔다. 테러로 국제선 이용객이 절반 수준까지 곤두박질친 데다 경쟁사인 JAL, JAS의 통합결정으로 벼랑에 몰리게 됐다는 불안 의식이 기발한 판촉행사를 탄생시켰다는 것이다.일본 항공운수업계는 시장 질서를 어지럽힌다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회사 내부에서도 돈을 되돌려주는 것은 도박이나 마찬가지라는 반대 의견이 잇달았다.하지만 성과는 만족스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회사의 우치다 마사오 부장은 “전년 동기보다 1할 이상 줄었던 승객이 행사 후 원래 수준을 회복했다”며 “매출 신장에 큰 덕을 봤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우치다 부장은 자신의 친구가 1만엔짜리 복권에 당첨된 후 기뻐하는 것을 보고 힌트를 얻었다고 털어놓았다. 이왕 경품행사를 하려면 적어도 1, 2만엔은 고객들 손에 돌아가야 효과도 크다는 것을 느꼈다는 얘기다.ANA는 내친 김에 또 하나의 파격 행사를 내놓아 경쟁사들을 바짝 긴장시키고 있다. 곧 항공편 50편에 1편꼴로 모든 탑승객들에게 1만엔씩을 지급하는 경품행사를 실시한다고 3월 4일 발표했다.오는 5월 12일~6월 30일까지 모든 일본 국내선 항공편을 대상으로 하는 이 행사에서는 하루 평균 2,000∼3,000명의 승객이 당첨 행운을 안게 될 것으로 알려졌다.닛산 ‘마치’소형차 ‘너무튄다’ 지적도기린맥주가 2월 27일 맥주시장에 투입한 발포주 신제품 ‘고쿠나마’는 가격인하 싸움에서 경쟁사들의 허를 찌른 대표적 상품이다. 맥아 함량을 25% 미만으로 낮춰 50% 이상의 일반 맥주에 비해 소비자 값을 60엔 이상 줄인 발포주는 일본 서민과 젊은이들의 사랑을 독차지해왔다.판매량이 날개 돋친 듯 늘어나면서 이제는 전체 맥주시장의 40%에 다다를 만큼 높은 시장 비중을 확보, 맥주사들의 판매전쟁의 핵으로 떠올랐다. 고쿠나마는 모든 발포주의 가격이 캔(350ml)당 145엔 이상인 시장 상황에서 단번에 135엔으로 10엔을 낮춰 인하 비결이 비상한 관심 대상이 되고 있다.기린맥주는 고쿠나마의 핵심 컨셉을 ‘마시기 쉽고, 호주머니에 부담 없는’ 점에 맞추고 있다. 발포주의 주 구매계층이 서민과 젊은이들이라는 것을 감안, 이들을 흡수할 전략상품으로 고쿠나마를 탄생시켰다는 계산이다.기린은 가격인하를 뒷받침하기 위해 고쿠나마의 유통채널을 일반 맥주 및 발포주와 철저히 차별화한 전략을 쓰고 있다. 주류 전문점과 대형 유통점 등에 지급되던 판촉비를 몽땅 없애 이를 원가절감으로 돌린 반면 판촉비 부담이 없는 편의점과 백화점 등에 고쿠나마를 집중 투입하는 방식이다.여기에는 발포주의 단골이 젊은이들이라면 이들은 주류 전문점보다 심야 편의점 등에서 더 자주 구매하라는 판단이 깔려 있다.한편 소니의 ‘바이오W’는 아무 특징도 없는 어중간한 상품이라는 혹평을 딛고 소비자들의 상품구매 트렌드를 앞서 읽어낸 상품으로 칭찬받고 있다. 디스플레이와 본체, 키보드가 함께 붙어 있는 이 상품은 일부 전문가의 ‘데스크 톱도, 노트북도 아닌 엉터리’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하지만 이제는 데스크톱 타입의 컴퓨터 중 판매 1위를 달릴 정도로 뛰어난 상품력을 인정받고 있다. 도쿄 일대의 수도권에서는 시장점유율이 17%를 넘어서며 한때 품귀현상을 빚을 만큼 폭발적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소니 상품기획과 관계자는 “가정용이라면 굳이 고기능이 아니어도 좋다는 인식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라며 “노트북보다 다루기 쉬우면서 각 기능을 고루 갖춘 장점을 소비자들이 인정해준 것 같다”고 말했다. yangs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