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임 첫해부터 흑자 행진 주도...1인당 생산성 1억 5,000만원으로 끌어올려

유인학조폐공사 사장약력 : 1939년 전남 영암생63년 전남대학교 법학과 졸업.68년~85년 한양대학교 법정대 부교수88년~96년 제13, 14대 국회의원98년~99년 한양대 법학과 교수99년 한국조폐공사 사장(현). 한국거석문화협회 총재(현)조폐공사에 처음 부임했을 때 세칭 ‘파업유도사건’ 여파로 노사갈등이 심각했는데 어떻게 위기를 넘겼습니까.처음부터 원칙대로 경영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공사에 와 보니 전임 사장들이 노조의 위력에 눌려 지나치게 위축됐다는 걸 알고서는 노조와 정공법으로 대응해 나가겠다고 결심했지요.부임 첫날 정문부터 집무실까지 두 줄로 서서 침묵시위로 날 맞이했던 노조는 철야농성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 철야농성은 천우신조로 태풍이 불어와 노조원들이 해산한 덕분에 자동 해결됐습니다. 다음날 간부회의에서 처음 평소에 생각해둔 경영방침을 밝혔습니다.첫째 구조개혁을 계속하고, 둘째 노사화합을 이뤄 이익을 내는 회사를 만들겠다는 것과 마지막으로 공기업의 본분을 다하겠다는 것 등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반발하던 노조도 제가 ‘행복하게 살자’는 목표를 제시하고, 노조원들을 일일이 만나 설득하면서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그래도 강성노조로 알려진 조폐공사 노조와 협상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처음에는 힘들었죠. 사장으로 와서 보니 노조가 인사에까지 개입하는 등 그때까지의 관행을 깨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설픈 타협보다는 원칙경영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밀어붙였습니다.첫 노사협상 때였던 99년 11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노사 각 5명씩 대표자를 뽑아 5박6일 동안 협상을 시작했는데 처음에 50개였던 노조 요구사항이 협상 끝날 때쯤에는 13개로 줄었습니다.13개의 안건을 놓고 저와 노조위원장 단 둘이서 72시간 동안 마라톤 협상을 다시 벌였습니다. 결국 끝까지 남은 4개의 쟁점은 사측이 양보해 대타협을 제의해 분쟁을 일단 마무리했습니다. 이사회에서 다소 잡음이 있었습니다만 노사화합이란 명분 덕분에 걸림돌을 제거하고 노사대립은 일단락됐습니다.그 결과 2000년에는 ‘8년 만의 노사무분규’라는 기록을 세웠으며 지난해 말까지 계속 평화적이고 협력적인 노사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이때 나온 경영철학이 ‘문화경영’입니까.뭔가 노사가 화합할 수 있는 분위기나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돈없이 살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이 모든 걸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는 데서 출발한 경영이념이지요.의식주용 재화가 필요하지만 삶의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작업도 필요한 것입니다. 대화와 화합의 기회를 마련하고 정서순화를 위해 노사공동으로 참여하는 문화유적지 탐방 등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개발했습니다.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난 뒤부터는 매달 ‘자랑스런 조폐인’을 선정, 가족동반 포상휴가 등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문화경영의 효과는 즉시 나타나 부임 첫해인 99년 말부터 적자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부임첫해부터 흑자를 내기 시작했다는 말인데요.조폐공사에 처음 와보니 98년에 199억원 적자가 발생하는 등 장기간 계속된 노사분규와 경영수지 악화로 조직의 사기가 저하된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노사 대타협을 통해 일하는 분위기가 살아나면서 99년에는 3억원의 흑자를 기록했고, 2000년에는 251억원, 2001년에는 183억원의 순이익을 올렸습니다. 이 모든 것이 회사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준 노조와 종업원들의 덕입니다.단기간에 이렇게 큰 순이익을 올린 배경은 무엇입니까.어떻게 보면 단순하다 할 수 있겠지만 비용절감과 새로운 매출처를 찾는 작업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 조폐공사는 공기업으로 현실에 안주하는 분위기였지만 과감하게 적자요인을 찾아냈습니다. 지난해까지 45%, 그러니까 절반 가량의 인원을 감축했습니다.그 결과 2,750명이었던 전체 직원수가 1,440명으로 줄었지요. 98년 6,800만원이던 1인당 생산성은 작년말 현재 1억 5,700만원에 이를 정도로 크게 향상됐습니다. 화폐 납품 가격을 인하했는데도 인건비절감과 시스템 개선을 통해 생산성을 높일 수 있었습니다. 또 지난 2000년부터 ‘부서 중심’의 업무평가제도를 신설했는데 이게 효과를 톡톡히 봤습니다.부중심의 업무방식이 어떻게 효과를 보게 됐는지 궁금합니다.부서를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려 했습니다. 그래서 목표관리와 성과보상을 부서 기준으로 실시했는데 이에 따라 3개월에 한 번씩 부서별 성적을 모두 공개하는 획기적인 조치를 취했죠. 이 성적을 연말에 집계해 상위 20%에게는 상을 주고, 하위 20%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공기업 특유의 ‘대충대충’ 분위기를 몰아내고 이처럼 신상필벌을 엄격하게 실시하니 조직에 일하는 분위기가 살아나기 시작하더군요. 지금은 상위성적을 받은 직원들만 해외연수를 보내주고 있지만 앞으로 5년 내에 직원 모두를 해외연수 시킨다는 목표를 잡고 있습니다.직원들의 자기계발을 위한 투자를 한다고 들었습니다.‘커리어 계발 계획’이란 이름으로 각 직원들이 한 가지 특화된 분야를 만들 수 있도록 회사에서 지원하고 있습니다. 우선 자기분야의 기술교육은 기본으로 마스터하고, 영어나 중국어 일어 등 외국어 공부도 각자 시작하도록 하는 한편 인터넷 교육까지 지원하고 있습니다.여기에다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나씩 정기적으로 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했습니다. 또 직원들의 실력연마를 위해 한양대 산업대학원, 한남대, 우송대 등에 특별과정을 만들어 공부도 시켰습니다. 지금까지 230명이 졸업했는데 처음에는 반대하던 노조도 이젠 호응이 아주 좋습니다. 특히 고졸직원들의 만족도가 높은 편입니다.노사화합은 물론 공기업 개혁을 선도했다는 평도 듣고 계신데 비결이 무엇입니까.우선 2개 조폐창을 통합해 인력을 크게 줄였습니다. 공기업 평균 인력감축 비율이 19%에 불과한데 조폐공사는 45%나 줄인 거죠. 인력감축으로 늘어난 일감은 원가절감 노력으로 다 소화해 냈습니다.예컨대 예전에 한 번에 24장씩 인쇄하던 1,000원권 지폐를 40장 인쇄시스템으로 고치는 등 노조가 적극적으로 원가절감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 일부 공정을 생략해 능률을 향상시키는 등 노사가 화합해 업무효율을 높이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습니다.그 결과는 숫자로 나타났습니다. 공기업 평균 배당률이 3.4%에 불과한데 저희 공사는 지난해 25%의 배당을 실시했습니다.조폐공사가 수익사업도 다양하게 벌이고 있다면서요.조폐사업은 사양산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국내 경제의 93%가 비화폐적 방법, 그러니까 신용카드나 전자결제로 이뤄지고 있지요. 그만큼 화폐수요가 감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축적된 조폐기술을 바탕으로 국내 특수인쇄 및 압인물을 개발하는 등 사업을 다각화하고 있습니다.이 분야는 지난 99년 매출액이 18억원에 불과했으나 지난해에는 52억원까지 끌어올렸습니다. 또 고급보안제품의 리더가 되자는 목표 아래 특수잉크나 자동화기기 등을 개발하고 있습니다.이에 따라 보안관련 산업은 중국 인도 필리핀 등의 관계자들이 잇따라 공사를 방문하는 등 해외에서도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SEPTEFIA 2002 행사도 이같은 맥락에서 우리의 보안기술을 세계에 알리고자 시작한 행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