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창 유행하고 있는 게임기인 ‘X박스’를 구상하던 마이크로소프트는 게임기 생산을 맡아줄 회사를 찾기 위해 컴퓨터 업체들을 찾았다.델, NEC, 샤프 등 미국과 일본 업체들은 물론 삼성전자도 마이크로소프트의 접촉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들 업체는 모두 거절했다. 하드웨어 생산을 통해 돈을 벌던 시대는 지났다는 판단에서였다.그래서 찾아간 곳이 전자제품 생산전문서비스(EMS) 회사들. 솔렉트론, 플렉스트로닉스, 산미나SCI 등과 협상을 벌였고, 결국 플렉스트로닉스의 멕시코 공장에서 30분당 한 트럭분인 1,400대씩 생산되어 트럭으로 국경을 넘어 미국 등 세계 각지에 팔리고 있다.EMS업체를 활용하는 회사들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네트워크 장비업체인 시스코시스템스는 하드웨어 생산을 전량 EMS업체에 맡기고 있고, 에릭슨(휴대전화), 팜(PDA)도 EMS 공장에서 나온다.IBM, 루슨트(통신장비), 시에나(광통신장비), 제록스, 3M 등도 제조 분야를 EMS에 대폭 넘기고 있다. IBM은 최근 IBS(International Business Services)로 변신하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하드웨어 생산을 축소하고 있다.최근에는 향후 5년간 50억달러에 달하는 PC의 제조를 산미나라는 EMS회사에 맡긴다고 발표하기도 했다.이처럼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분리라는 ‘신분업화’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닌 산업시스템의 구조적인 변화로 인식되고 있다. 날로 치열해지는 가격경쟁에 따른 불가피한 생존전략이 이제 커다란 대세로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미주본부의 조사에 따르면 EMS산업은 연평균 22% 성장, 지난 2000년 1,000달러를 간신이 웃돈 시장규모가 오는 2005년에는 2,880억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EMS산업도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이 갖고 있는 공장이 대부분 미국 이외에 있다는 점에서 미국 입장에서 보면 ‘제조공장의 탈미국 현상’으로 불리기도 한다.경제주간지인 <비즈니스위크 designtimesp=22365>는 최근 이같은 현상이 미국의 경기 침체에 따른 일시적인 대응전략이 아니라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대세라는 분석기사를 싣기도 했다.세계 최대 EMS기업은 솔렉트론시장이 빠르게 커지는 만큼 관련 기업들도 급성장하고 있다. 현재 EMS기업은 전세계에 3,000여 개. 연간매출 5억달러 이상 기업이 70여 개로, 이들의 매출액이 전체 EMS 매출의 70%를 차지한다.이 중 매출액 50억달러 이상인 솔렉트론 자빌서킷 산미나SCI(이상 미국), 플렉스트로닉스(싱가포르) 셀레스티카(캐나다) 등 5대 기업이 대표적이다.지난 70년 에너지위기 때 태양열 에너지 제품업체로 출발해 실리콘밸리의 전자산업 붐을 타고 전자제품 하청업제로 성장한 솔렉트론은 세계 최대 규모의 EMS기업으로, 가장 성공적이고 모범적인 기업으로 인정받고 있다.하지만 최근 들어 시스코 등 통신업계의 수요부진으로 49억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재고부담 및 과중한 몸집불리기 여파로 고전을 하고 있다.현재로서서는 에릭슨의 휴대전화 발주, 마이크로소프트의 X박스 등 대형 물량 싸움에서 2위인 플렉스트로닉스에 밀리고 있어 머지않아 1위 자리를 내줄지도 모른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플렉스트로닉스는 지난 97년 매출액 6억4,000만달러에서 2001년 매출액이 121억달러로 4년 만에 무려 1,800%나 늘어나는 등 초고속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2001년 말 에릭슨이 휴대전화 자체생산을 중단하면서 모든 휴대전화 생산을 이 회사에 넘긴다고 발표해 업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올해 안에 ‘세계 최대’라는 타이틀을 따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지난해 12월 삼미나가 60억달러를 내고 SCI시스템스를 합병해 탄생한 삼미나SCI는 매출액 면에서 업계 3위. 광통신산업의 붐으로 급성장한 시에나, 네트워크장비업체인 시스코시스템스 등 통신장비업체들이 주요 고객이다.EMS시장이 급격히 뜨다보니 업체들간의 경쟁도 점점 치열해지고 있다. 해법은 대형화이고, 동남아시아 등 저임금 국가로의 공장 이동. 최대 업체인 솔렉트론도 최근 생산거점을 구조조정하면서 미국 내 생산비중을 51%에서 37% 낮추고 아시아지역 생산비중은 18%에서 35%로 높이기도 했다.KOTRA 미주본부는 EMS의 생산거점이 아시아로 집중되면서 자연스럽게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생산되는 부품의 아웃소싱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며 이는 한국의 전자통신 부품업계가 수출을 크게 늘릴 수 있는 기회라고 전망하고 있다.실제 삼성전기, 대덕전자 등 일부 기업들은 솔렉트론 등 EMS에 대한 부품납품이 상당히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KOTRA 관계자는 “EMS기업들이 거대화될수록 중소제조공장들의 설자리가 점점 좁아지는 만큼 이들 기업이 자연스럽게 EMS와 통합되도록 유도하는 정부의 지원과 업계의 노력이 필요하다”며 “구체적인 방안은 국내제조업의 현 실태와 EMS의 글로벌화 추세 등을 함께 고려하여야 할 것이지만 분명한 것은 빠를수록 좋다”고 강조했다. dongin@ hankyung.com용어설명EMS 산업EMS(Electronic Manufacturing Services)는 OEM(Original Equipment Manufacturer)의 설계에 따라 자신의 생산장비를 이용해 전자제품 및 납품에 관한 서비스를 일괄 제공하는 것으로 ‘제조전문 서비스산업’으로 부른다. 다른 회사 이름으로 팔리는 제품의 생산 및 관련 서비스를 도맡아 하는 ‘얼굴 없는 산업’인 셈이다.EMS는 제품의 디자인(설계) 및 부품납품업체 결정권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신의 디자인으로 제품을 제조하는 ODM과도 구분된다. ODM은 주문자인 OEM이 요구하는 성능을 맞추기 위해 자신이 디자인(설계)하고 스스로 부품업체를 선정해 제조하지만 EMS는 OEM의 기술자들이 설계한 도면을 넘겨받아 그에 따라 제조해 납품한다. 자신이 제조하는 제품에 대한 지적재산권을 보유하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