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적으로 개최할 경유 국제사회에서 경영능력 인정받을 수 있어

세계박람회(EXPO) 개최를 놓고 세계 여러 나라가 각축전을 펼치는 이유는 국위선양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박람회 개최가 가져다 주는 유무형의 이득이 막대하기 때문이다.산업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2010년 EXPO의 경제적 이득은 생산유발효과 16조8,000억원, 고용창출효과 23만명에 달할 것으로 분석됐다.88서울올림픽, 2002한·일월드컵의 생산유발효과가 각각 4조7,000억원과 7조9,000억원인 점을 감안하면 세계박람회가 가져올 파급효과가 얼마나 큰지 가늠할 수 있다.방문객수도 막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2010년 EXPO는 6개월 개최 기간에 모두 3,000만명 이상의 관람객이 방문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1970년 일본 오사카EXPO에는 6,400만명의 관람객이 입장, 관람객수에서 신기록을 세운 바 있다.반면, 지난 2000년 개최된 독일 하노버EXPO는 당초 4,000만명의 관람객을 예상했으나 중앙정부의 지원부족, 홍보미흡 등으로 1,700만명에 그쳐 적자 EXPO로 기록됐다.EXPO를 통한 직접효과도 크지만 막대한 고용창출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박람회로 인해 최소 23만개의 정규직 일자리가 새로 생긴다. 임시직까지 합치면 약 54만명이 일자리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는 2010 EXPO가 6개월 동안 열리는 데다 관람인원이 3,000만명을 넘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기 때문이다.참고로 88서울올림픽 관람객은 290만명이었고, 2002한·일월드컵의 관람객은 180만명으로 추정된다. 지난 93년 열린 대전EXPO는 3개월의 행사 기간에 1,400만명의 입장객수를 기록했다.박람회 기간에 창출되는 경제적 효과 못지않게 국가적인 이미지 제고 등 무형적인 파급효과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일본이 1970년 오사카EXPO를 통해 첨단이미지를 전세계에 심고, 향후 관련 산업의 급격한 발전으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세계박람회는 전세계 대부분 국가 및 국제기구가 참가하는 것이 관례이므로 이들 국가와의 자연스러운 교류가 가능하며 성공적인 세계박람회 개최는 국제사회에서 국가의 경영능력을 인정받는 계기가 될 것이다.또한 2010년은 역사적 남북정상회담(2000년 6월) 10주년을 맞이하는 해로서 분단에 따른 대립분위기 완화 및 한민족의 화합과 평화통일의 기반을 조성하는 계기가 될 것이며, 나아가 세계평화체제 정착에도 중요한 시기이다.사회문화적 측면에서는 공동체의식을 높일 수 있고 국민의식의 국제화 등 우리나라의 이미지 개선에 크게 도움이 되며 박람회를 통해 국토의 균형개발 및 국내·국제교류도 활발하게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EXPO가 끝나도 전시공간은 물론 해양위락시설 등은 그대로 남아 관광도시 여수의 위상을 높이게 된다. EXPO가 열리는 전남·여수지역의 경우에는 9조원에 이르는 생산유발효과와 4조원의 부가가치 창출, 12만명에 이르는 고용창출 효과를 볼 것으로 분석됐다.유치위원회는 이들 지역 외에도 경남 3조여 원, 서울 8,000억원, 광주·부산 각각 7,000억원, 전북 5,500억원 등의 생산유발 효과가 가능하다고 전망했다.돋보기 / EXPO 참가 소사1889년 파리 박람회 첫 참가 … EXPO와 인연 맺어우리나라가 세계박람회 무대에 첫선을 보인 것은 1889년(고종 26년) 프랑스에서 열린 파리박람회였다. 이 박람회 참가 전에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박람회에 조선백자 몇 점을 출품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파리박람회가 최초다.당시 우리나라는 갓 모시 돗자리 가마 등을 출품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1893년 시카고 세계박람회에는 72개국의 일원으로 참가했으며 도자기 갑옷 나전칠기 등을 8칸 기와집에 전시했다고 한다. 시카고 EXPO는 우리나라가 국가관(館)을 갖고 참가한 최초의 박람회였다.콜럼버스의 미국 대륙 발견 400주년을 기념해 열린 당시 시카고 EXPO의 공식 보고서를 보면 “개막 이틀 후인 5월3일 조선의 화물 83개가 하역됐으며 이 가운데 68개가 전시관인 메뉴팩처스 빌딩에 옮겨졌다”는 기록이 있다.정부 공식 대표는 고종 황제로부터 ‘미국 박람회 출품사무대원’이란 직책을 부여받은 문신 정경원이었다. 시카고 박람회 참가와 관련한 일화로 우리나라 최초의 음반취입이 있었다.선교사이며 의사였던 알렌이 시카고 EXPO에 10명의 한국 소리꾼을 데려가 공연을 했고 일행 중 한 명인 박춘재가 현지에서 레코드 취입을 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음반 취입이다.이어 1900년 파리EXPO에는 프랑스인 크리마지를 법부 고문에 임명해 특사대사로 파견, 한국관을 설치한 바 있다. 사각형 건물에 기와를 얹은 당당한 구조의 대한제국관은 경복궁 근정전과 비슷한 모양이며 프랑스 건축가 페레가 지었다.해양수산부는 이 박람회가 끝난 후 전시품과 한국관이 여러 박물관에 기증됐다는 기록이 있다고 밝혔다. 시카고EXPO 이후 한국이 박람회 역사에 다시 등장한 것은 1962년 미국 시애틀 EXPO 때였다.이어 67년 캐나다 몬트리올 EXPO에 참가함으로써 한국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선 한국의 모습을 세계에 알렸다.1970년 오사카 EXPO에는 당시까지 참가 역사상 가장 큰 규모로 참가, 세계박람회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 시작했다.93년 개최된 대전 EXPO는 한국이 1893년 EXPO에 참가한 지 꼭 100년 만에 참여자가 아니라 주최자로 전환한 행사였다. 대전EXPO는 총 1,400만명이 참관, 국민들에게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심어주는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