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성 강화·성과주의 확산 따라 여성 능력 발휘 기회 많아질듯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표적 국내 보험사였던 제일생명이 ‘알리안츠제일’이 되면서 미셸 깡뻬아뉘 사장이 취임했을 때, 이 회사 직원들은 크게 동요했다. 영어를 할 줄 모르는 중견 직원들이 대거 부서를 옮기거나 회사를 떠났고, 남은 사람들은 새로운 기업 문화와 영어를 익히느라 동분서주했다.2000년 윌프레드 호리에씨가 제일은행장으로 취임했을 때 대단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수많은 눈길들이 이 ‘외국인’이 ‘한국의 은행장직’을 수행해 나갈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감시’하기도 했다.은행은 당국의 금융정책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운영된다는 인식 때문에 더욱 낯설게 받아들여졌다. 이후 제일은행이 금융감독당국과 자주 부딪치면서 우려들이 현실화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하지만 호리에씨가 물러나면서 뒤를 이은 것은 파리에서 공부하고 미국 리퍼블릭 뉴욕은행 등에서 일한, 역시 외국인 로버트 코언 행장이다.금융사 경영진 중에 외국인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더 이상 이런 풍경은 낯설거나 충격적이지 않아 보인다. 대표적으로 국내 22개의 생명보험사 중 약 30%에 해당하는 6개 보험사의 대표가 외국인이다.대주주가 외국계인 경우 최고경영자(CEO)가 외국인이 많고, 부사장 등 임원급에 외국인이 빠지지 않고 한 명씩 포함돼 있다. 1대주주가 아니더라도 지분참여를 했을 경우에는 이사회 멤버로 참여하는 사례도 많다.IMF 외환 위기 이후 구조조정에 나선 금융사들이 새바람을 불어 넣어 줄 인재라면 모셔오자는 분위기가 일어난 데다, 금융사의 주인이 대거 외국인으로 바뀌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서울이 국제금융센터의 모습을 갖춰가게 된다면 이같은 현상은 더욱더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다양한 국적의 CEO가 가장 많이 포진해 있는 곳은 생명보험사. 알리안츠제일생명의 미셸 깡뻬아뉘 사장은 프랑스인이고, ING생명의 요스트 케네만스 사장은 네덜란드 출신이다. 뉴욕생명의 테드 모라벡 사장은 미국인이다.지난 4월 영풍생명을 인수해 국내에 진출한 PCA생명의 마이크 비숍 사장은 영국 출신. 푸르덴셜생명의 제임스 최 스팩만 회장은 핏줄은 한국인이지만, 미국시민권을 갖고 있다.생보사 CEO 30%가 외국인은행장으로는 제일은행의 레너드 코언 행장, HSBC 은행의 존 블랜손 대표 등이 있다. 제일은행에는 코언 행장 외에도 상당수 외국인 임원이 있다. 국민은행에는 리스크 관리 담당 얀 옵 드 빅씨가 부행장으로 일한다. 그는 주택은행 시절부터 통합 국민은행서도 부행장직을 맡고 있다.공적자금 투입은행인 한빛은행에도 존 보첼러 재무기획본부 부본부장이 있다. 시티코프와 에트나 인터내셔널 부사장 등을 지낸 미국 출신이다. 외환은행에는 98년부터 코메르츠 출신 만프레드 드로스트 여신담당 부행장, 한스 버나드 메어포르트 국제금융담당 부행장이 일하고 있고, 위르겐 레머, 토마스 나우만씨가 사외이사로 있어 외국인 경영진이 많은 편이다.증권사들은 아직 외국인보다 외국서 공부를 하고, 외국회사 경험이 있는 해외파 한국인을 선호한다. 하지만 소규모 외국증권사 한국 지점 대표는 외국인이 많다. 워버그증권 마이클 진 대표, 브릿지증권 피터 애버링턴 사장 등이다.투신사에도 외국인 CEO가 적지 않다. 하나알리안츠 투신운용 사장은 오이겐 뢰플러씨. 외환 코메르츠 투신운용에는 독일 코메르츠 은행 출신인 뮬러 글로데 부사장이 91년부터 일하고 있다.본사에서 파견된 한국지사장들의 경우 한국 기업에서 일하는 태도도 달라지고 있다. 암참 관계자는 “외국 기업인들이 예전에는 한국 근무를 잠시 스쳐가는 자리 정도로 생각해 한국 공보에 별 관심이 없었으나 최근에는 한국에 대한 분석이 큰 업무 중 하나가 됐다”면서 “한국을 떠날 때도 반드시 분석자료를 본사에 전하거나 후임자에 넘긴다”고 말했다.구조조정과 개혁이 계속되면 앞으로 경영진뿐만 아니라 외국인 두뇌의 유입은 점차 가속될 것으로 보인다. 파격적인 경영으로 정평이 난 김정태 국민은행 행장은 “낙후된 국내 은행업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는 직원 중 외국인이 10% 이상 돼야 한다”고 공언했다.그는 또 “은행에는 여성 인력이 많지만 대부분 제대로 활용을 못하고 있다”면서 “은행 구성비로 보면 전체 지점장의 40%를 여성이 맡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김행장은 지난 4월 국민은행 인사에서 은행의 간판격인 명동지점에 30대 여성을 지점장으로 발령낸 것을 비롯, 여성 지점장을 대거 발탁했다.‘부패 가능성 적다’ 여성 금융인 선호추세이처럼 서울의 국제화가 진행되면 여성 인력 또한 급속히 대두될 것으로 보인다. 여성 인력의 진출이 활발하지 않았던 시기에도 외국계 금융사에서는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외국계 금융사들은 국내 기업들이 외면하던 여성 인력을 비교적 차별 없이 활용했고, 그들의 성과도 우수해 성공적인 인사정책이었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씨티은행이 대표적인 경우.국내 금융사에서는 소매금융 분야에서 여성 인력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여성 지점장은 은행권뿐만 아니라 증권업계에도 확산되고 있고, 분석력을 요구하는 증권사 애널리스트도 여성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장래 서울이 아시아 금융중심지가 될 정도로 문화나 기업조직이 개방적으로 바뀐다면 이런 현상은 단지 외국계 금융사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금융업에서는 섬세한 분석력이 요구되는 경우가 많아 여성에게 적합하다는 견해가 많다. 업적 위주로 평가되는 문화가 정착되면 여성들이 부상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해석이다.여성은 접대문화 등에 익숙지 않거나 구조적으로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투명성이나 윤리 면에서 우월하다는 견해도 있다. 최근 금융권에서는 도덕성이 강조되고 있다.채권매니저로는 유일한 여성인 대한투자신탁운용 김정숙 과장은 “여성은 술자리 접대 장소에 가지 않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깨끗할 거라고들 생각한다.또 자산운용시 투기성이 적어 손실낼 가능성도 적다고 짐작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국제금융연수원의 김상경 원장은 “금융계 여성 인력은 세계적으로도 최고 수준이다.이들 대부분은 일중독자이고, 목표의식이 뚜렷하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헤드헌팅업체인 아데코코리아의 최정아 사장은 “최근에는 국내 기업에서 외국인들을 구해 달라는 요구가 심심치 않게 들어온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없던 일이다”고 말했다.물론 외국인 두뇌들이 서울로 꾸준히 유입될지에 대해서 낙관할 수만 없는 것도 사실이다. 아데코코리아 최사장은 “아직도 미국이나 유럽 등의 본사에서 한국 지사로 파견시킬 경우 울며 겨자 먹기로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고 말했다.이는 상대적으로 비즈니스 환경이 거칠고, 문화적 차이가 워낙 커 이에 적응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