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규모 178조원대...'원조PB' 메릴린치에 삼성증권 "시장 양보 못한다" 공세경영

“어이구, 나오셨습니까.”허둥지둥 지점장이 달려 나와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자리를 마련한다, 차를 대접한다, 부산스럽다. 지점에 거액을 예치한 큰손 고객이 한 번 ‘떴다’ 하면 벌어지는 풍경이었다.금융사가 거액자산을 가진 고객을 별도로 관리하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명절이 되면 선물을 보내고, 직원이 인사를 가는 등 전통적인 VIP마케팅을 해 왔다. 그런데 최근 이같은 시장이 PB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형성되고 있다.UBS워버그의 관계자는 “종합자산관리는 전세계 금융권에 남아 있는 유일한 황금시장”이라며 “특히 한국 등 아시아 신흥시장에서 급성장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시장에 은행은 물론 증권, 보험 등 모든 금융사들이 너도나도 참여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PB시장의 규모는 얼마나 될까. 아직 형성단계라 시장 규모를 추산하는 것 자체가 막연한 상태다. 삼성증권은 약 890조로 추산되는 개인금융자산 중에서 20% 가량인 약 178조원이 PB영업 대상이라고 본다.지난 2000년에 메릴린치가 시장조사를 하면서 추정한 바에 따르면, 100만달러 이상을 가진 부유층들의 자산은 모두 270조원 가량이 된다. 메릴린치와는 달리 대부분의 국내 금융사들은 1억~2억원 이상 자산을 가진 이들을 타깃층으로 하기 때문에 시장 규모는 이보다 훨씬 더 크게 볼 수도 있다.정확히 PB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명확하지 않은 편이다. 일반적으로 ‘금융자산이 일정 규모 이상 되는 개인들을 대상으로 자산을 관리해주는 것’이 PB의 정의. 어떻게 현재 자산을 재구성할지, 어떻게 투자하면 수익률을 최대화하면서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지 포트폴리오를 짜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예금, 채권, 주식, 부동산 등 다양한 투자방법이 동원된다.대대적 마케팅·고급 전략 각기 내세워하지만 이는 매우 느슨한 개념이다. 한 은행의 프라이빗 뱅커는 “솔직히 영업을 하는 우리도 PB가 VIP우대나 큰손 고객 관리와 무슨 차이가 있는지, 정확히 PB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본점 기획부서에서도 잘 모르는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이런 고민을 하는 그도 은행 내에서 꽤 큰 규모의 자산을 관리하고 있으며, 내로라하는 베테랑 프라이빗 뱅커로 꼽힌다.이같은 상황에서 최근 가장 눈에 띄는 행보를 보이는 곳이 삼성증권이다. 현재 하나은행과 씨티은행 등 은행권이 선점하고 있는 시장에 뛰어들어 규모나 영업력 면에서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는 초대형 은행인 국민은행까지 ‘꺾겠다’고 큰소리치며 1위 전략을 들고 나왔다.삼성증권은 메릴린치, 씨티은행, 국민은행을 경쟁상대로 꼽았다. “미안하지만 국내 증권사들은 우리의 경쟁상대가 아니다”라는 게 삼성증권 관계자의 말이다. 삼성증권이 이처럼 절실하게 나서는 데는 PB가 불안정한 증권사의 수익구조를 개선할 수 있는 대안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장차 회사의 생존이 걸린 문제라는 인식이다. 삼성증권의 PB 관리자산 수탁고는 벌써 10조원대에 육박하고 있다.‘삼성’이라는 브랜드 파워, 선진 방식을 발빠르게 도입하고 발전시키는 기업문화, 삼성서울병원에서부터 보험사에 이르기까지 방대하게 걸쳐 있는 그룹계열사 활용 등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이점을 활용해 시장을 차지하겠다는 목표다.한편 PB란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외국계 증권사 메릴린치는 지난해부터 소리 없이 영업을 추진하고 있다. ‘1위’나 ‘규모 전략’은 메릴린치의 것이 아니라고 이들은 말한다.하지만 메릴린치는 대부분의 국내 금융사들과는 달리 자산 100만달러(약 12억원) 이상을 가진 사람들만을 영업대상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수익성에서는 국내 금융사들보다 우수한 알짜장사를 할 것으로 예측된다.메릴린치는 미국에서 PB 영업을 통해 성장한 증권사의 시범사례였고, 많은 외국증권사들이 한국시장에서 제한적으로 소규모 영업을 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본격적인 PB영업을 위해 진출했다.PB시장에서 서로 다른 길을 가려고 하면서도 두 증권사간의 신경전은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삼성증권은 PB 시스템을 메릴린치의 PB 시스템과 거의 유사하게 벤치마킹했다.국내 영업기반이 약한 메릴린치는 삼성증권의 영업인력을 빼갔다. 삼성증권이 한국에서 ‘삼성’이라는 자존심을 지켜야 할 처지라면, 메릴린치는 ‘원조’의 진수를 보여줘야만 하는 것이다.한편 최근 국민은행은 6월부터 PB영업에 본격 진출한다고 선언했다. PB전용 별도 브랜드 설립, 해외 금융회사와의 제휴 등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앞으로 PB시장은 점점 더 뜨거운 열기로 달아오르고, 혼전 양상을 보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