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아키하바라 전철역 앞 상가.사상 최초의 월드컵 결승토너먼트 진출을 앞두고 일본열도가 흥분과 열광에 빠져 있던 지난 6월12일 오후 7시. 일본 최대의 전기·전자상가로 꼽히는 도쿄 아키하바라의 한 빌딩 대회의실에서는 40대 중반의 남자 한 명이 로봇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는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연방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가정용 로봇을 대중화시켜 일본을 로봇의 본고장으로 만들자고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는 “일본에서 싹튼 로봇바람이 전세계로 퍼져갈 수 있도록 모두 노력을 아끼지 말자”는 말로 끝을 맺었다.강의가 끝나자마자 회의실을 가득 메운 학생과 젊은 샐러리맨들은 뜨거운 박수로 화답했다.오노 신야 자민당 의원(小野 晉也·47). 이날 마이크를 잡고 로봇이야기로 열변을 토한 중년 남자는 학자나 기업체의 전문연구원이 아니었다. 의사당에서 국정을 논하는 국회의원이었다. 그것도 3선의 경력을 가진 촉망받는 정치인이며, 마쓰시타전기의 창업자인 고 마쓰시타 고노스케씨가 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 인재를 양성한다며 세운 마쓰시타정경숙의 1기 졸업생이었다.정치인이 로봇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일반인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정치인’이라는 단어에서 큰 목소리와 선거 유세 장면 등만을 먼저 머리에 떠올린 사람이라면 더 납득하기 힘든 광경이었다.그러나 속사정을 알고 보니 수긍이 갔다. 무엇보다 오노 의원 본인의 특이한 경력과 캐릭터 때문이다. 넓적한 얼굴에 크고 두꺼운 안경을 걸친 그는 점잖은 학자풍을 연상케 하는 외관을 지녔다. 무엇보다 도쿄대학원에서 다년간 우주로켓을 연구한 과학자이기도 했다.일본 정계 최고의 로봇전문가로 손꼽히고 있는 그는 가는 곳마다 로봇산업의 육성을 입버릇처럼 외치고 다녀 로봇족(族) 의원의 기수로 각광받아 왔다. 소속정당인 자민당 내에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를 대신해 로봇 관련 각종 후원회에 참석할 정도로 실력과 인기를 인정받고 있는 터였다.‘로봇살롱’ 정보교류회 발족시켜그가 일본 전체가 월드컵 열기에 휩싸여 있던 6월 중순 아키하바라에서 마이크를 잡고 청중 앞에 서게 된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로봇산업의 중흥과 대중화에 대한 자신의 열망과 소신을 젊은 두뇌들에게 전달하고 동참을 호소하기 위해서였다.지난 99년 11월 대학 연구원들과 기업체 전문가 및 중소기업 경영자들을 한데 묶어 ‘로봇 살롱’이라는 정보교류회를 발족시킨 그는 로봇 중에서도 산업용보다 가정용 로봇의 미래에 특히 주목하고 있다. 노약자와 고령자가 자신의 손발처럼 손쉽게 부릴 수 있는 로봇을 좀더 다양하게 많이 만들어낼 수 있다면 시장은 무궁무진으로 널려 있다는 판단에서다. 대량생산으로 로봇가격을 개당 500만엔 정도까지 낮출 수 있다면 고령자들도 별 부담 없이 로봇을 빌려 쓸 수 있을 것으로 그는 보고 있다. 직접 사지 않아도 정부, 지자체와 사회단체 등이 구입한 로봇을 하루 300엔 남짓한 이용료만 내고도 충분히 빌려 쓸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계산이다.오노 의원은 가정용 로봇의 대중화라는 자신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거점으로 주저 없이 아키하바라를 꼽고 있다. 산업용과 달리 되도록 작은 크기에 첨단 기능을 갖춰야 되는 가정용 로봇은 그 특성상 컴퓨터 및 전자 부문의 전문지식이 필수적이지만 인재와 부품, 정보 등을 구하는 데 아키하바라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약 6㎢의 면적에 550여 개의 전자, 전기 점포가 밀집해 있는 아키하바라는 일본이 태평양전쟁의 패전 잿더미에서 일어서는 과정에서 일본의 공업근대화와 발자취를 함께 해왔다. 전쟁 직후에는 라디오, 60년대의 고도성장기에는 TV, 80년대에는 컴퓨터 등으로 주력 상품의 얼굴이 바뀌었지만 전자·전기제품의 메카자리를 다른 곳에 내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오노 의원을 비롯한 전문가들은 아키하바라가 일본을 대표하는 로봇의 거리로 거듭날 것임에 틀림없다고 장담하고 있다. 이들은 아키하바라의 미래 얼굴로 로봇을 꼽은 이유로 첫째, 상인과 메이커들 모두 컴퓨터, 전자제품을 대신할 새 주력제품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장기불황으로 전자·전기업체들의 고성장이 한계에 부닥친 데다 시장이 포화상태에 직면한 상황에서 미래형 첨단상품으로 로봇만한 것이 있느냐는 지적이다. 일부 상인 및 마니아와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로봇부품을 판매하고 전시하는 공간이 하나둘씩 늘어난 것도 아키하바라의 변신을 앞당기는 또 한 가지 배경이 되고 있다.일본언론은 컴퓨터판매업체인 九九전기가 2000년 8월 아키하바라 일대에 개설한 로봇 전문점을 주목하고 있다. 그다지 크진 않지만 이 점포에는 소니의 ‘아이보’ 등 완성품 로봇뿐만 아니라 모터, 센서, 기어 등 로봇제작에 필요한 각종 부품이 고루 갖춰져 있어 마니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개최되는 크고 작은 로봇콘테스트에 참가하려는 학생, 기술자들에게는 이곳이 필수적으로 들러야 하는 코스로 인식되고 있을 정도다. 이 점포의 아라이 마사히로 점장은 “평일에는 40명 안팎, 휴일이면 150명 내외의 고객이 찾아온다”며 “유럽과 아시아 등 다른 나라에서 찾아오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도쿄도, 재개발계획 추진 측면지원인재와 정보가 모이는 곳으로 소문나면서 아키하바라를 거점으로 한 자발적 로봇연구모임도 얼굴을 내밀고 있다. 민간비영리단체인 A.I.I.는 7월2일 창립총회를 갖고 ‘아키하바라에서 로봇을 만들어보지 않겠습니까’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를 발표한다. 기술자와 디자이너 등 로봇에 식견과 관심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만들고 싶은 로봇의 아이디어를 모집한 후 이를 기업에 넘겨 제품화하는 사업이다. 이 단체의 사무국장은 “1년 후 어떤 형태로든 로봇을 탄생시켜 ‘로봇이라면 역시 아키하바라’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싶다”고 포부를 감추지 않고 있다.로봇의 메카를 꿈꾸는 아키하바라의 도전에는 도쿄도의 재개발계획도 순풍으로 작용하고 있다. 도쿄도는 아키하바라 전철역 앞에 인접한 약1만6,000㎡의 부지에 최첨단 정보기술(IT)센터를 설립키로 하고, 이를 조건으로 매각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땅은 민간업체들에 팔되 정보기술발전에 사용한다는 것으로 조건을 못박은 것이다. 이 땅은 현재 카시마 등 대형 건설업체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는데 도쿄도는 이곳에 초대형 쇼룸과 산학협동공간 등을 갖추도록 요구할 방침이다. IT센터는 2003년 5월에 착공돼 2006년 2월까지 완전한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다.아키하바라의 변신은 이 일대 상인들로부터도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九九전기의 고도 오카즈 영업부장은 “아키하바라는 옛날부터 상품개발의 산실로 명성을 떨쳐왔다”며 “로봇의 개발거점으로 육성하자는 소리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소니의 아이보와 혼다의 ‘아시모’ 등으로 대표되는 고기능 컴퓨터 장착(가정용) 로봇의 일본 내 시장규모는 오는 2005년까지 연간 5,000억엔대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시장 볼륨만 놓고 본다면 아직 크다고 보기 어려운 수준이다.일본 전문가들은 그러나 대기업들이 적극적으로 기술 선행투자에 나섰기 때문에 앞으로는 구체적인 판로 개척활동이 본격화될 것으로 점치고 있다. 리눅스 탑재 서버를 판매하는 후라토의 혼다 히로오 회장은 “지금의 가정용 로봇시장은 컴퓨터산업의 여명기였던 80년대와 흡사하다”며 밝은 미래를 자신하고 있다.한 상인은 “컴퓨터의 다음은 단연 로봇”이라고 지적한 후 “로봇 전성시대가 활짝 열릴 때 아키하바라는 또 한 번 세계의 주목을 받을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yangsd@ 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