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석자만 대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기업이 돈 몇 백만원이 없다며 재계 사교클럽에서 자진 탈퇴한다면 한국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한 해 수천억원의 이익을 올리는 회사가 긴축경영을 해야 한다며 수백만원의 돈을 아끼기 위해 재계 단체에서 이름을 빼달라고 한다면 주위에서는 어떻게 평가할까?일본 재계의 명실상부한 총본산이자 구심점 역할을 맡고 있는 일본경제단체연합회가 심한 속앓이를 하고 있다. 드러내 놓고 아프다고 말은 하지 않지만 통증과 답답함 때문에 얼굴 표정도 많이 일그러져 있다.창피함 때문에 꾹 참고 있지만 연합회를 괴롭히는 최근의 가장 큰 속병은 잇단 회원 이탈과 이로 인한 위상 약화, 그리고 일본 정부와 국민들에 대한 이미지 후퇴다.‘게이단렌’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경제단체연합회와 ‘닛케이렌’의 약칭으로 불렸던 일본경제단체연맹을 통합해 출범한 일본경제단체연합회는 지난 5월28일 창립총회를 갖고 태어난 생후 2개월여의 신생단체다.그러나 말만 신생단체일 뿐 게이단렌과 닛케이렌의 기능, 조직, 자금과 인력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제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던 창구도 하나로 통일, 외부인들에게 비치는 위상과 파워는 일단 종전과 비할 바가 아니다.일본 재계의 최고 권부 역할을 해온 게이단렌과 노동부의 닉네임을 갖고 있던 닛케이렌을 한지붕 아래 묶어 놓았으니 기업과 일반 국민들에게는 공룡과도 같은 존재로 인식되기에 모자람이 없다.현재 약 1,300개 기업과 200개 단체 등 모두 1,500개 기업·단체를 회원으로 보유하고 있으니 대표성에서도 연합회에 필적할 만한 재계 단체는 일본 어느 곳에도 없다.하지만 일본경제단체연합회는 발족 직전부터 회원이탈이라는 속병을 앓기 시작했다. 두 단체 통합의 중심축 역할을 한 게이단렌에서 회원이 올해 초부터 눈에 띄게 빠져 나간 데 이어 연합회 발족 후에도 이탈 움직임에 제동이 걸리지 않고 있다.연합회측은 회원이탈에서 나타난 올해의 가장 큰 특징으로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유명 기업들이 대거 포함돼 있다는 점을 꼽고 있다. 탈퇴 배경에 경영파탄, 법인청산 등의 원인도 포함돼 있지만 대다수는 경비절감을 위해 스스로 회원자격을 포기한 점이 두드러진다고 설명하고 있다.올해 초부터 최근까지 게이단렌과 연합회를 등진 회원은 모두 42개 기업, 단체에 이르고 있으며 탈퇴는 특히 3월 하순부터 4월 초에 집중돼 있다.42개 기업, 단체 중 경영파탄이나 법인청산으로 회원자격을 반납한 경우는 다이세이해상화재보험 등 4개 기업, 1개 단체에 달했다. 나머지 37개 회원은 불량 채권을 대규모 상각처리 한 후 경영난이 심화된 지방은행과 기타 금융기관, 중소기업들이 차지했다.관계자들은 연합회를 떠난 회원들 중 재계에 가장 충격을 준 사례로 도큐백화점과 미쓰이광산, 그리고 일본 맥도널드를 우선적으로 들고 있다. 철도, 호텔, 외식업 등에서 계열사를 다수 거느리며 일본 유통업계의 큰손 역할을 해 온 도큐백화점은 게이단렌의 발족 당시(1946년)부터 참가한 터줏대감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도큐백화점은 “경기침체가 장기화된 상황에서 경영환경이 너무 악화돼 재계활동에 더 이상 참가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댄 것으로 알려졌다. 미쓰이그룹의 핵심 기업 중 하나인 미쓰이광산은 “잇단 광산폐쇄로 영업규모가 대폭 축소된 마당에 재계모임에 나설 체력(자금)이 달린다”며 회원자격을 반납했다.탈퇴회원 중 하나인 후쿠오카 시티은행은 정부 공적자금을 투입받은 처지에 경영정상화가 더 절박한 과제라며 긴축경영을 위해 연합회를 떠났다.일본 최대의 외식업체로 황금알을 낳는다는 평판을 들어온 일본 맥도널드는 오너인 후지타 덴 회장의 ‘왕소금’ 경영철학에 맞게 역시 수백만엔의 돈이라도 아낀다며 회원자격을 포기했다.햄버거업체인 일본 맥도널드는 한 해 경상이익이 수백억엔에 달하는데다 자스닥(JASDAQ) 시가총액에서 2위를 달릴 만큼 풍부한 자금력을 가진 것으로 소문이 나 있어 갑작스러운 탈퇴에 꽂힌 재계의 시선과 관심이 비상할 수밖에 없었다.일본경제단체연합회는 현재 연회비를 순자산과 매출기준으로 정해 최저 20만엔에서 최고 4,000만엔까지 나눠받고 있다. 하지만 회장단을 제외한 대다수 기업들의 회비는 200만엔을 밑도는 것으로 알려졌다.연합회는 회원사들의 급작스러운 대규모 탈퇴에 대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면서 대책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연합회는 회비와 관련, 단순히 산술적인 수치로 효과를 재지 말라고 회원사들에 주문하고 있다.회원으로 참가하면 정부 경제정책에 대한 자사의 목소리나 의견을 내기 쉬울 뿐만 아니라 타 업종과의 교류도 적극 추진할 수 있으니 얼마나 바람직하냐고 주장하고 있다. 정보와 각종 소식도 신속히 수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문가들의 식견도 수시로 접할 수 있으니 눈에 보이지 않는 플러스 효과를 상당히 얻을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오쿠다 히로시 일본경제단체연합회장 역시 회원들의 동향에 신경을 쓰는 눈치다. 오쿠다 회장은 “회비를 올려야 할 경우가 있다면 역시 내릴 때도 있는 법”이라며 회원들의 호주머니 사정을 감안한 정책을 탄력적으로 펼쳐나가겠다고 7월 말 시사했다.이 같은 그의 발언은 연합회 출범 당시 “할일이 많으니 두 곳에 내던 회비를 그대로 내달라”고 당부했던 자신의 소견을 뒤집는 것이어서 정책선회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일각에서는 회원들의 탈퇴가 단지 금전적인 이유에서만 비롯된 것으로 보지 말라고 지적하고 있다. 가고시마에 영업기반을 둔 미나미니혼은행의 한 관계자는 “세미나와 강연 등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에 올라갈 때가 많은데 그때마다 시간과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고 밝히고 있다.또 다른 지방 기업인 한 명은 “세미나와 각종 토론의 주제가 너무 굵직한 분야에만 치중돼 있어 중소기업들은 단체 참가의 보람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고 털어놓았다. 한마디로 돈과 시간만 들어갔지 회원이라는 이름 외에는 별다른 성과를 얻은 것이 없다는 불만이 탈퇴의 또 다른 배경으로 작용했음을 보여주는 셈이다.게이단렌 시절의 회원탈퇴는 금융위기가 엄습했던 지난 97년 말 이후 두 자릿수로 껑충 뛴 후 98년과 99년 각 20개 회사·단체 2000년 10개, 2001년 17개 회사·단체로 비교적 안정적 수준을 유지해 왔다.하지만 올 들어 이처럼 탈퇴가 급격히 늘어나고 굴지의 대기업들도 다수 포함된 데 대해 일본 언론과 전문가들은 재계 단체도 변화를 요구받는 시점에 왔음을 시사한다고 풀이하고 있다. 간판을 걸어놓았다고 무조건 기업들이 참가하는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자신들의 주머니 사정과 실익을 따져 가며 입회 여부를 선택하는 풍조가 자리잡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yangs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