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증권, 계좌관리 허술·직원 연루로 ‘곤혹’ … 현대투신, 비밀번호 관리도 ‘문제’
지난 8월29일 오전 7시 인천공항. 전 대우증권 직원 안모대리(32·사진)가 만삭의 아내와 함께 입국장으로 들어왔다. 전광석화 같은 경찰의 대응으로 안씨는 지난 8월23일 출국장을 빠져 나간 지 꼭 엿새 만에 한국으로 송환된 것이다. 안씨는 엿새 동안 태국을 거쳐 유럽까지 도피처를 찾아 헤맸지만 인터폴과 현지 경찰 등의 공조작전으로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금융가를 떠들썩하게 했던 ‘250억원대 사이버 계좌 도용 사건’의 전말은 이제 경찰의 조사가 진행되는 대로 구체적으로 밝혀지겠지만 이번 사건으로 금융계와 금융거래에 만만치 않은 파장이 일어날 것으로 전망된다.사건 개요-M&A 재료로 주가조작누군가 지난 8월23일 대우증권에 개설돼 있는 현대투신운용의 계좌번호와 비밀번호로 인터넷에 접속해 현대투신운용의 온라인 계좌를 열었다. 이어 이 사람은 델타정보통신 주식 500만주(시가 약 258억원 상당)의 매수주문을 냈고 곧바로 체결됐다. 이 사람은 대우증권 전 직원 안대리로 확인됐다.수백명의 투자자들이 안씨가 계좌를 도용해낸 500만주 주문을 이용해 주식을 팔았고, 현대투신운용은 전혀 원치 않았던 주식 500만주를 산 셈이 됐다. 단 90초 만에 내로라하는 국내 증권사와 기관투자가, 금융 당국이 꼼짝 못하고 당했다. 훔친 계좌로 매매했기 때문에 결제 책임이 있는 대우증권은 졸지에 코스닥 등록업체를 자회사로 떠안게 됐다.8월29일 발표한 경찰의 중간 수사결과에 따르면 이번 사건의 주범은 전 K증권사 투자상담사인 정모씨(37)와 현직 D증권 투자상담사인 안모씨(39)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형식상의 사장인 임천무씨와 장경묵씨를 내세워 델타정보통신에 대한 인수계약을 체결했다. 이들은 계약금으로 7억원을 지불하고 향후 주가가 상승하면 주식담보로 대출을 받아 잔금 63억원을 지불할 계획이었다.정씨는 이를 위해 사채업자 등 전주 4개 팀, 안씨는 증권가 2개 팀을 작전세력으로 끌어들인 뒤 지난 7월2일 1,240원이던 주가를 8월22일 5,460원까지 끌어올렸다. 여기까지 온 작전세력들은 더 이상 주가조작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서자 결국 기관계좌를 도용, 해결하는 방법을 생각해냈고 안씨는 친동생 안대리에게 이를 부탁했던 것이다. 안대리는 작전세력으로부터 10억원을 받기로 하고 이번 계좌도용을 시도한 것으로 경찰조사에서 밝혀졌다.한 증권사 지점장은 “예전에는 작전세력이 주가를 올린 뒤 마지막 물량을 기관투자가에게 뇌물을 주고 떠넘기는 일이 많았지만 이제는 통하지 않게 되자 계좌도용이라는 방법을 동원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사이버시스템은 안전, 사람이 문제이번에 처음 드러난 기관계좌 도용은 사이버시스템 운영의 허점을 파고든 것이다. 전체적으로 한국의 사이버 거래 시스템이 기술적으로는 안전하지만 이 시스템을 운영하는 회사나 사람에 문제가 있었다는 결론이다. 우선 대우증권은 사이버 거래시 보안인증을 소홀히 해 스스로 막대한 손실을 입었음은 물론 고객들의 신뢰도 잃게 됐다.대우증권은 오프라인에서 계좌를 튼 고객이 온라인에서 사이버 거래를 시작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할 인증절차를 생략했다. 고객의 편의를 위해서라지만 다른 증권사들은 사이버 계좌는 온라인 상태에서도 터주되 본인확인은 콜센터에서 하는 식으로 안전장치를 마련해 둔 점에 비춰보면 대우측의 변명은 설득력이 없어진다.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이런 식의 사건이 터지기 전에 사전감사를 강화해야 한다고 각 증권사에 자주 당부했다”면서 “대우증권이 사전감사를 소홀히 한 부분이 발견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대우증권 감사실의 구성을 살펴보면 차장급 직원이 8명인 데 반해 과장급 직원은 5명에 불과하다.이 때문에 지점에서 ‘물먹은’ 직원들을 대거 감사실로 발령을 내 감사업무의 효율성이 떨어진 게 아니냐는 지적이 증권가에서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 대우증권측은 “노련한 직원이 감사업무를 맡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고참직원 중심으로 배치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대우증권의 한 부장급 직원은 “영업을 뛰어나게 잘하는 직원을 감사실에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해 감사업무가 소홀해질 수 있다는 부분을 인정했다.아울러 이번 사건에 주요 증권사 지점장과 실무자들까지 대거 관여했다는 사실까지 밝혀지면서 증권시장 전반에 일파만파의 회오리를 불러올 전망이다. 고객의 재산을 투명하게 관리해야 하는 금융기관 직원들의 윤리의식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는 현실을 방증하는 부분이다.사상 초유의 고객계좌 압류…어떻게 전개되나이번 사건의 파장 중 주목해야 할 부분은 금융당국과 증권사가 특정 계좌에 대해 현금인출 및 주식매매 거래를 일시 중지시킨 것이다. 한국에서 증시가 개설된 이래 어떤 명목이든 고객의 계좌에서 현금인출을 막고 거래를 중지시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62년 증권파동 당시와 93년 실명제 발표 직후 주식거래가 중단된 일은 있었지만 모든 시장 참여자에게 해당된 일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번 사건의 후유증이 커질 수도 있는 부분이다.이번 계좌 도용 사건이 작전의 뒤처리를 위한 범행이라는 사실이 일부 드러나면서 ‘주식을 판 사람들만 조사하면 사건의 전모를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결국 혐의가 있는 계좌의 현금인출을 막지 않는다면 작전세력을 잡을 단서가 묘연해진다고 할 수 있다.이 같은 논리로 지난 8월25일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금감원이 증권사 사장들을 소집해 자율결의 형식으로 계좌동결을 지시했다. 금감원의 지시에 대해 불안감을 느낀 대신 등 매도계좌가 많은 증권사들은 법원에 계좌압류신청을 해 허용을 받긴 했지만 마냥 안심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계좌도용사건이 난 날 델타정보통신의 주식을 팔았다는 이유만으로 현금인출을 막는 것이 사유재산 침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한 증권사 지점장은 “작전세력들이 차명을 동원해 주식을 팔았다면 해당 계좌주들이 관련성을 부인할 경우 돈을 내줘야 한다”며 “여기에 나중에 계좌 주인들이 거래를 못한 탓에 수억원의 재산피해를 입었다고 떼를 쓰면 누가 감당할 것이냐”고 지적했다.앞으로 일어나는 모든 금융사고에 대한 대응으로 계좌동결에 나설 수 있을지, 거래동결로 피해를 본 고객에게는 누가 어떤 기준으로 보상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공감대가 형성돼 있지 않다. 계좌 도용 사건과는 별도로 금감원과 증권사들이 해결해야 할 부분이다.델타정보통신 사건 일지8월23일오전 9시18분안모씨 PC방에서 현투운용사이버계좌 개설9시19분삼성전자 매수주문, 32초후 취소주문9시20~50분신원미상 2명과 5차례통화9시30분3백만주 하한가 매도주문 출현10시4분현투운용계좌에서 최초 1백만주 매수10시5분30초현투운용계좌에서 500만주 매수 완료12시10분안씨, 가족과 해외로 도피29일07시50분안씨, 인천공항으로 송환©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