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형가전에서 반도체까지 첨단 전자제품 생산...40조원 적자 때도 연구개발 투자 지속

과거 대영제국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다면 거스 히딩크의 나라 네덜란드에 본사를 둔 필립스는 ‘불이 꺼지지 않는 글로벌 기업’이다. 이것은 단지 세계 150여개 국에 진출한 필립스 조명기기의 독보적인 시장점유율 때문만은 아니다.가전, 반도체, TV, 디스플레이, 무선 통신장비, 저장장치, 의료장비에 이르는 첨단 디지털 제품들마다 세계 1, 2위의 마켓셰어를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전세계 컴퓨터업체의 절반이 필립스가 만든 모니터를 판매하고 있을 정도다.특히 저장장치 분야에서는 기록 그 자체다. 아날로그 콤팩트카세트는 물론 콤팩트디스크(CD)도 필립스의 발명품이다. 세계에서 생산되는 모든 CD는 원칙적으로 필립스에 로열티를 지불해야 한다. 가만히 앉아서도 세계시장에서 돈을 긁어모을 수 있다는 얘기다. 전력소모량을 3분의 1로 줄일 수 있는 초절전 전구를 비롯해 고선명 디지털TV(HD TV), 액정 크리스털 디스플레이도 필립스의 개발품들이다.전자제품 발명의 귀재로 불릴 만큼 필립스의 기술력은 이미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다. 면도기 하나만 보더라도 피부 골 속의 털을 잡아당겨 깎는 첨단 기법을 도입할 정도다. 이른바 음파칫솔로 알려진 ‘소니케어’의 경우 분당 3만1,000회의 초고속 진동과 역동적 유체세정으로 칫솔이 닿지 않는 부위의 플라그까지 제거한다고 한다.필립스가 전세계 시장점유율 1, 2위가 못되는 아이템은 미련 없이 정리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것은 전체 매출의 7%나 되는 과감한 연구개발(R&D) 투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연구개발 투자 비율이 1%를 넘지 못하는 대부분의 전자업체들에 비하면 파격적인 수치다.지난해 9ㆍ11테러 이후 반도체 경기 급락으로 40조원의 대규모 적자를 봤을 때도 이런 연구개발 투자는 계속 됐다. 여기에는 부채가 거의 없고 유동성 있는 건실한 재무상태가 뒷받침됐다.‘첨단 속 보편성’ 추구, 공정한 인력관리이런 첨단을 좇는 기술력과 함께 필립스가 고수하는 제품개발의 원칙이 있다. 바로 ‘보편성’이다. 무조건 다양하고 복잡한 기능보다 사용자에게 꼭 필요한 기능을 확실하게 구현한다는 것이다. 네덜란드 연구소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무려 45종류의 민족으로 구성된 연구원과 디자이너가 머리를 맞대고 제품개발에 뛰어들고 있다.필립스에서 남녀차별은 물론 인종차별적인 발언이나 행위가 일절 금지돼 있는 것도 이런 보편성에 기반한 조직관리와 무관하지 않다. 60여개 국에 있는 현지법인에서도 이런 인력관리 원칙은 똑같이 적용된다. 국내 필립스전자만 보더라도 전체 직원 중 1~2명만이 본사에서 파견된 인력이다.신박제 사장이 지난 93년부터 10년 가까이 경영을 맡아 수출을 주도해 온 것도 현지경영의 중요성을 인정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기술력과 인력관리에 이어 고객서비스도 차별화했다. 마치 시중은행처럼 서울 남산에 있는 본사 1층 로비에 고객상담실(CIC)을 두고, 상담서비스를 제공한다.거의 모든 제품에 대해 10년 보증수리를 원칙으로 전국 어디에서나 AS를 받도록 했다. 서비스센터 역시 특별 관리한다. 본사에서 고객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만족도를 측정해 직원평가에 반영한다.국내에 가장 많이 투자한 외국기업필립스는 한국 현지법인인 필립스전자를 통해 이미 오래전부터 한국 전자업계에서 탄탄하게 자리를 잡았다. 현재 컬러TV, DVD, 홈시어터 시스템 등 오디오ㆍ비디오(AV) 제품과 다리미, 면도기, 반도체, 전자부품, 의료장비 등이 국내에서 생산돼 수출까지 이뤄지고 있다.지난 99년 TFT-LCD 분야에 16억달러를 투자하면서 당시 국내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한 외국계 기업으로 꼽히기도 했다. 이어 2000년에도 디스플레이 분야에 11억달러를 투자했다. 현재 필립스전자는 국내에서 수입보다 수출을 더 많이 하는 외국계 기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올림픽경기장, 독립기념관, 광화문, 첨성대 등에 조명을 설치한 업체도 필립스전자였다.지난 2002한ㆍ일월드컵 때는 10개 경기장 중 7곳의 조명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국내 기업들과의 파트너십도 탄탄하다. 기존의 LG필립스 LCD와 LG필립스 디스플레이는 물론이고 반도체 분야에서 삼성전자, 휴맥스, 하니닉스, 대우전자 등과 기술제휴 및 합작 형태로 사업을 벌이고 있다. 조명기기의 경우 합작회사인 송원자동차조명에서 할로겐램프를 생산, 수출까지 한다.필립스는 1891년 네덜란드의 안톤과 제라르드 필립스 형제가 설립했다. 111년이 지난 현재 세계 60여개 국에 자회사를 두고 18만9,000여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전자그룹으로 성장했다.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전후복구 과정에서 특수를 누리며 고속성장의 발판을 마렸했다. 일본 소니 같은 신흥 가전기업들과 무수한 카피품들의 도전을 받는가 하면 구조조정을 단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잠재성과 경쟁력이 있는 분야를 집중적으로 키우며 아성을 쌓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