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중심국가가 화두다. 물류, 금융을 축으로 동북아 경제의 중심축이 되겠다는 것이 노무현 정부의 국정과제임은 긴말이 필요 없다. 대통령 스스로가 취임식에서 긴 시간을 할애해 동북아 중심국가를 역설했고, 재벌개혁을 내건 인수위 역시 이 문제에서만은 재벌의 구조조정본부장들을 불러 직접 의견을 청취하는 열성을 보여주기도 했다.“부산에서 기차표를 사들고 평양을 거쳐 베이징과 울란바토르, 모스크바를 경유한 다음 궁극적으로는 런던역에서 내릴 수 있는”(대통령 취임사) 그런 시대는 우리 모두가 꿈꿔 온 것이기도 했다.그러나 과연 동북아는 우리에게 무엇일까. 중국과 일본을 양 날개에 껴안고 한국이 세계로 웅비하는 그런 드라마는 과연 이뤄질 것인지…. 노대통령이 말했듯이 동북아 3국이 유럽연합 같은 정치ㆍ경제 연합체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인지 그것도 궁금하다. “당장의 북한 핵문제나 잘 처리하라”는 비난도 ‘꿈꿀 자유’마저 막지는 못한다고 본다면 새정부의 웅장하고도 장기적인 비전을 환영하지는 못할망정 나무랄 이유는 없다.그러나 동북아 중심국가라는 구호는 사실 그 구호가 몰고 오는 흥분만큼이나 매우 많은 문제를 안고 있고 논쟁거리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역시 가장 먼저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우리를 동북아 국가로 본다면 지금까지의 해양국가적 성격은 포기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노대통령은 ‘해양과 대륙의 관문’이라는 말로 지정학적 약점을 오히려 장점으로 바꿔 가자고 역설했지만 ‘동복아 국가론’이 갖는 함정은 없는 것인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해방 후 지금까지 한국은 언제나 해양국가였다. 미국을 축으로 한 서방선진세계의 일원이고자 했고 이것이야말로 한국의 근대화와 산업발전의 원동력이었음은 긴말이 필요 없다. 바로 그 때문에 지금의 동북아 국가론에 대해 내심 적잖은 경계를 하게 되는 것이다.혹시 냉엄한 세계경제질서에 대한 실망감이 동북아 국가론을 밀어가는 힘은 아닌지, 선진국과의 경쟁에 지친 나머지 ‘조금은 편해 보이는’ 개도국의 세계로 스스로를 낮추어 가는, 일종의 퇴영적 발상은 아닌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물론 동북아론의 설계자들은 펄쩍 뛸 일이겠지만 서방에 대한 반감,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절망감, 중국과 대륙에 대한 환상, 북한에 대한 이상주의적 동포애 같은 것들이 동북아론의 근저에 깔린 사고 경향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만일 실제가 그렇다면 동북아 국가론은 웅장한 설계도 아니요, 미래의 비전도 아니며 다만 하나의 패배주의일 뿐이다. 모 대학교수가 “동북아 국가를 위해서는 미국과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한다”고 힘줘 강조한 것도 그런 배경에서 일 것이다. 외자유치, 경제특구, 중국에 대한 우위 유지, 서방기업의 아시아본부 유치 등으로 구성돼 있던 김대중 정부의 동북아 국가론이 ‘중국과 북한으로 연결되는 철도망’의 동북아론으로 변질된 것은 역시 그런 측면에서 이해할 수밖에 없다.경제특구가 쑥 들어가 버린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경제특구란 무엇인가. 한국 속의 선진지역, 다시 말해 미국식 자유기업주의가 관철되는 일종의 모델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고용이 자유롭고 행정규제가 없는, 말 그대로 기업하기 좋은 지역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그러나 지금의 동북아론에는 그런 ‘위험한 신자유주의적 발상’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엉뚱하게도 북한을 껴안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노무현 정부가 내세우는 동북아 국가론의 얼개다. 미국의 변방이 싫어 이제는 자청해 중국의 변방이 되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사실이 그렇다면 그것은 ‘신 포도의 논리’에 다름 아니다. 힘들다고 해서 피해간다면 다시 어디서 민족의 살길을 찾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