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대 임대전문업체 미키상사의 공실률 3월 말 현재 8.18%로 사상 최고치 기록

바그다드에 진입한 미군 병사와 시민들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의 동상을 끌어내리는 사진이 사실상 이라크전쟁의 종료를 전세계에 알린 지난 4월10일. 일본 도쿄에서는 이라크전쟁에 못지않은 긴장과 후유증을 몰고 올 또 하나의 대란이 본격적으로 막을 올렸다.총성과 대포소리는 없었지만 일본언론은 이날 신호음을 울린 대란이 앞으로 일본경제에 안겨줄 충격이 이라크전쟁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며 촉각을 곤두세웠다. 일본언론이 붙인 이 대란의 이름은 ‘2003년 문제’, 정확히 말하자면 사무용 빌딩의 무더기 신축에 따른 오피스 공급 파동이었다.초고층 신축빌딩이 도쿄 도심에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면서 공급과잉과 함께 임대료 폭락사태를 몰고 올 것이라는 우려는 어제오늘의 것이 아니었다.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2000년을 지나면서부터 언론과 전문가들은 하늘을 찌를 듯 올라가는 첨단 인텔리전트 빌딩들이 불황에 빠진 일본경제를 더욱 압박하는 짐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누차 경고해 왔다.신축빌딩은 입주업체들의 대이동을 촉발시키고 남아도는 사무실을 양산시켜 그러지 않아도 어려운 부동산 시장의 주름살을 더 깊게 만들 것이라는 것이 이들의 우려였다. 부동산 시장의 침체 골이 깊어질수록 빌딩들의 자산가치는 바닥으로 추락하고 이는 필연적으로 자금시장과 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고 전문가들은 목소리를 높였다.그러나 2003년 문제라는 이름의 대란은 마침내 현실로 다가왔다. 그리고 대란의 첫 신호는 최대 사무실임대 전문업체인 미키상사가 4월10일 발표한 도쿄 도심 5개 구의 3월 말 공실률이었다.미키상사는 치요다, 미나토, 신주쿠, 시부야, 주오 등 도쿄 도심 한복판 5개 구의 사무용 빌딩 공실률이 3월 말 기준 8.18%에 달해 버블경제 붕괴 후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밝혔다.치요다, 미나토 등 5개 구는 도쿄에서도 가장 금싸라기 땅으로 꼽혀왔을 만큼 교통, 입지여건에서 최고의 환경을 자랑하는 곳. 일류기업들의 사무실이라면 거의 모두 몰려 있을 만큼 오피스타운으로 부동의 명성을 누려 왔다.이곳의 공실률은 도쿄 전체 사무용 빌딩 시장의 흐름을 보여주는 바로미터 역할을 해 왔으며 이 지역에 이렇게 사무실이 남아돈다면 다른 지역은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었다.이들 5개 구의 3월 말 공실률은 한 달 전인 2월에 비해 0.19%포인트가 높아진 것이다. 그다지 큰 수치가 아니라고 할 수 있으나 꼭 1년 전인 2002년 3월과 비교하면 무려 3.18%포인트가 뛴 것이다.공실률이 최근 1년간 가파르게 상승곡선을 그리면서 지난 3월 말 버블 이후 최고치에 도달한 배경은 무엇보다 장기불황 및 무리한 도심 재개발사업과 관련이 있다고 미키상사는 분석했다.끝이 보이지 않는 불황으로 기업들이 여기저기에서 쓰러지고, 사업과 조직을 축소하는 기업이 줄을 잇는 판에 신축빌딩들이 쑥쑥 솟아오르니 사무실이 남아돌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일본정부가 국영철도 시절에 갖고 있던 역 인근의 부지를 대량 매각해 건물 신축 의욕을 북돋우고 도심 재개발사업의 스피드를 높인 것까지는 좋았지만 완성시점이 불황 한복판과 맞물린 탓에 대란을 피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 미키상사의 지적이다.오피스 공급과잉을 축으로 한 2003년 문제는 임대료 급락과 함께 빌딩 소유주들의 입주업체 쟁탈전을 점입가경의 거친 싸움으로 변질시키고 있다. 도쿄의 상징으로 꼽히는 황거 주변 마루노우치지역의 경우 버블경제가 한창이던 시절에는 평당 10만엔을 불러도 사무실을 얻기 힘들었으나 이제는 최고급 빌딩도 5만엔을 넘지 않을 정도로 임대료가 추락해 있다.전문가들은 5개 구에서 조금만 외곽으로 나가면 평당 1만엔 남짓에도 사무실을 골라잡을 수 있다며 임대료 하락 추세가 더욱 두드러질 것이라고 보고 있다.오피스 공급과잉 현상이 뚜렷해지면서 도쿄 도심은 보다 싼값에 쾌적한 근무환경을 찾아 사무실을 옮기는 기업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와 함께 이사 행렬이 연쇄적으로 이어지면서 빌딩 소유 업체들은 빈 사무실을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 초긴장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전자ㆍ정보통신업체인 후지쓰는 마루노우치에 있는 본사 사무실을 최근 긴자 부근에 신축 오픈한 초대형 시오도메빌딩으로 5월 중 옮기기로 확정하고 한창 이삿짐을 꾸리고 있다.후지쓰가 들어 있던 사무실 7개층은 다른 회사가 들어오기로 결정됐으나 건물주는 새 입주자 선정과 임대료 흥정에서 적잖은 애를 먹었음이 물론이다.도쿄의 새 명물로 록본기에 들어선 매머드 인텔리전트 빌딩 ‘록본기힐즈’는 미국계 금융기관인 골드만삭스가 들어오기로 확정된 상태지만 최근 입주자를 끌어당기는 과정에서 동업 타사들과 불편한 관계를 면치 못하게 됐다. 한 라디오방송국을 입주시키기 위해 방송국과 먼저 손을 대고 있던 미쓰이부동산을 따돌리는 바람에 원치 않는 비난을 사게 된 것이다.기업들 싼 곳 찾아 이사 행렬일본 최대 부동산업체인 모리트러스트가 2,800억엔의 사업비를 들여 조합재개발 방식으로 신축한 록본기힐즈는 메인 타워의 임대면적만도 약 5만5,000평에 이를 만큼 ‘재팬 넘버원’을 자랑해 공사 초기부터 적잖은 화제를 뿌렸다.4월25일 정식 오픈하는 이 빌딩의 예정 입주율은 4월 초 80%를 넘어 타 빌딩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지만 모리트러스트는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다. 임대면적 자체가 워낙 넓은 까닭에 20%만 사무실이 비어도 어지간한 10층짜리 빌딩 전체가 텅 빈 것이나 마찬가지의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미쓰이부동산은 올해 안으로 긴자 인근 등 도심 2곳에 초대형 빌딩을 완공할 예정이나 입주사 문제를 놓고 심각한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계열사인 미쓰이화학과 스미토모화학의 통합작업이 4월 초 백지화되면서 신통합회사의 본사가 들어오기로 했던 10개층의 새 주인을 찾아야 하는 난제에 부닥쳤기 때문이다.미쓰이부동산측은 “이미지와 공신력이 높아 입주사 확보에 전혀 고민을 하지 않았는데 의외의 골칫거리를 안게 됐다”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기업들의 이사행렬은 같은 계열 울타리 속에서도 활발히 이어지고 있다. 미쓰비시중공업은 오는 4월 말부터 ‘골든위크’(일본의 5월 초 황금연휴) 기간을 이용해 시나가와역 부근에 신축한 자체 빌딩으로 본사를 옮길 계획이다.지금까지는 계열사인 미쓰비시지쇼 소유의 빌딩에 세를 내고 살았으나 자기 집을 마련한 이상 더 이상 불필요한 돈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사용 중인 빌딩의 새 입주사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중공업측은 “다른 계열사 사정을 봐줄 때가 아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자신들이 들어가지 않으면 빈 공간을 메울 수 없게 된 판에 주변 사정을 어떻게 다 고려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모리트러스트는 올해 도쿄 도심에 공급될 연면적 3,000평 이상의 대규모 신축빌딩이 사상 최대에 달할 것으로 점치고 있다. 신축빌딩들의 완공시기가 묘하게 맞물리면서 2002년보다 무려 73.6%나 늘어난 약 65만평의 사무용 공간이 새로 시장에 쏟아지게 됐다는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사상 최대치였던 지난 94년의 약 55만평을 10만평이나 웃도는 규모다.하늘을 찌를 듯 올라가는 첨단 인텔리전트 신축빌딩은 도쿄의 스카이라인을 바꿔 놓고 있다. 장기불황에 골병든 일본경제의 선입견을 갖고 도쿄 도심의 하늘을 바라본 외부인들이라면 십중팔구 일본경제의 침체를 의심하고도 남을 일이다.그러나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리고 대란이 남길 고통과 흔적은 분명해졌다. 경제가 단숨에 호전돼 수요가 급작스레 늘어나지 않는 한 오피스 공급 과잉의 상처를 일본 부동산 시장이 어떻게 치유할 것인지 관심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