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명 직원 60명으로 줄여”
“중소기업이 망하면 기업주는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중소기업인의 체감경기를 묻자 조영승 삼성문화인쇄 사장(70)은 되레 느닷없는 질문을 하나 던졌다.“자살을 하거나 만신창이로 살아가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조사장의 이 비장한 자문자답은 중소기업인들의 요즘 심정을 모두 설명해주고 있었다.경기침체 여파로 기업의 체감경기가 나빠졌다.최근 기업들의 경기변화에 대한 기대를 나타내는 기업경기실사지수(BSI)가 급락했다. 중소기업은 말할 것도 없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가 조사한 중소제조업체의 4월 평균 가동률은 69.5%로, 69.3%를 기록한 99년 5월 이후 47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조사장은 중소기업 경영자로서 인력난 속에서 경기침체를 가장 실감한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젊은 사람들은 눈 씻고 찾아봐도 몇 명 안됩니다. 최근 5~6년 사이에 160명이던 직원을 60명으로 줄였어요. 하지만 직원을 내보낸 것보다 안타까운 것은 현재 30대 이하의 젊은 직원이 10% 정도뿐이라는 사실이죠.”대학교 1학년 때 학교 인쇄물을 만들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50여년간 인쇄사업에 매달려 온 조사장은 구인난에 대한 불만을 거듭 토로했다.“사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는 불경기가 올 수밖에 없는 여건인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얻을 수 있는 자원이라면 ‘사람’뿐인데, 요즘처럼 노동시간은 짧고 인건비는 비싸면 어려움을 어떻게 피하겠습니까.”삼성문화인쇄는 미국과 일본, 러시아, 몽골 등지에서까지 인쇄물 주문을 받아 제작해 온 회사로 매출의 30%를 수출물량에 의존할 정도였다. 하지만 인건비가 커지면서 수출경쟁력을 잃고 있다.그에 따르면 인쇄기계를 다루는 기능직 종사자들의 월급은 대기업 사무직 직원들 못지않게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소기업의 인력난은 심화되고 있다. 조사장은 ‘청년실업’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현실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특히 이 회사는 20년간 근무한 사원이 장기근속에 해당되기 어려울 정도로 나이가 많은 사원이 많다. 물론 장기근속자가 많은 만큼 첨단설비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평균 10년 이상의 숙련된 고급인력을 보유하고 있는 장점도 있다.“수주산업은 신뢰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매출은 괜찮은 편입니다. 하지만 인건비 부담 해소와 ‘젊은 피’ 수혈의 필요성은 간절히 느끼죠.”더욱이 인터넷의 발달로 인쇄물량 자체가 줄어든데다 진입장벽이 낮은 업종의 특성은 불황의 골을 깊게 하는 요인이 된다.인터뷰를 마무리할 때쯤 그는 돌연 사람 인(人)자를 종이에 적으며 “이게 무슨 글자냐”고 물었다. “이 글자는 두 획이 서로 받쳐줘야 온전한 글자를 이루죠. 사람은 서로를 받쳐줄 수 있는 배려가 기본이라는 겁니다. 경제가 ‘줄기’라면 인간 본연의 자세는 뿌리입니다. 이게 우선되면 경기도 좋아지지 않을까요?”취업재수생 - 서동욱청년 백수 양산 “서류 통과도 어렵다 ”한여름 더위가 맹위를 떨친 6월4일 낮, 서울 여의도 대신증권 로비에는 신입사원 공개채용에 응시하려는 20대의 발길이 분주했다. 원서접수 마감일인 이날, 고민 끝에 원서를 들고 왔다는 서동욱씨(가명ㆍ28)를 만났다. 지난해 2월 명문 K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2~3개월 잠깐의 직장생활을 제외하고는 이날처럼 원서접수창구를 돌며 1년여를 보냈다고 말했다.“실력도 안되고 운도 없고…. 무엇보다 사람을 뽑는 데가 드무니 어떡합니까. 줄잡아 100군데 정도 원서를 넣어봤으니까, 취업재수생이 아니라 취업백수생(百修生)이라고 불러주시죠.”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자조섞인 말을 하는 그에게 지난 1년은 혹독한 시련의 나날이었다. 군제대 후 2000년 1학기에 복학해 한 학기를 다니다 캐나다에 어학연수를 다녀올 때까지만 해도 앞날에 대한 두려움은 별로 없었다.졸업 후에는 한 달 만에 대기업 계열 정보통신회사에 취직, 비교적 매끄럽게 인생이 풀리는 듯했다. 그러나 2개월 남짓한 직장생활 동안 서씨는 “이 일이 아닌데…”라는 생각만 했다. 결국 “전공을 살려 금융사에서 일하자”고 마음먹고 사표를 던졌다. 하지만 지금까지 입사시험만 100번 넘게 봤을 뿐, 별 진전이 없는 상태다.“지금처럼 취업난이 심각해질 줄 알았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적성에 맞지 않아도 다녔을 겁니다. 하지만 지난해 상반기에는 취업경기가 비교적 좋았었고 언론에서도 채용규모가 확대될 것이라고 보도했었어요. 요즘은 서류전형만 통과해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니까요.”그나마 5월부터 신규채용 기업이 늘어나 숨통이 트였을 뿐, 이 시기를 타지 못하면 오는 10월 시즌까지 꼼짝없이 ‘놀아야’ 한다는 게 서씨의 걱정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기업들이 신입사원은 76년 1월1일 이후 출생자로 응시제한을 두고 있어 올해 승부를 보지 못하면 정말 낭패를 볼 수도 있다.서씨가 말해주는 친구 이형찬(가명ㆍ28)의 사례도 갑갑하긴 마찬가지다. 제대 후 복학과 함께 행정고시 준비에 들어간 이씨는 꼬박 2년6개월 동안 고시에 매달리다 지난해 졸업과 함께 포기를 선언했다.이후 한 TV홈쇼핑 PD로 취직해 ‘인생계획 수정’에 성공하는 듯했지만 3개월 동안 거의 매일 새벽 퇴근을 거듭하다 몸과 마음 모두 탈진하고 말았다. 처음 유통업 쪽으로 방향을 잡았던 그는 이제는 업종에 상관없이 신입사원 뽑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는 신세가 됐다.“워낙 취업희망자가 많이 몰리다 보니, 예전에 중요하게 여겼던 자기소개서는 읽지도 않는 곳이 많아요. 심지어 취업전문업체에 서류전형을 맡겨 버리고 학점과 토익점수로만 시험 대상자를 고르는 기업도 늘고 있어요. 3.5점 안팎의 평범한 학점에 900점 미만의 토익점수로는 서류통과조차 힘들다는 이야기죠.”설상가상으로 삼성 등 몇몇 기업은 당해연도 졸업생 혹은 졸업예정자를 응시대상으로 정해 취업재수생의 입지는 약해져만 가고 있다. 실제로 지난 4월 현재 20대의 실업률은 7.2%로, 전체 실업률 3.3%의 두 배가 넘는다.숫자로만 따지면 33만5,000명에 달하고 전체 실업자의 44%를 차지하는 비중이다. 취업 대신 대학원 등에 진학한 사람까지 감안하면 실제 20대 실업자 규모는 훨씬 어마어마하다는 분석도 나온다.그럼에도 불구하고 20대 실업 문제는 당분간 풀릴 조짐이 없다. 한국경영자총협회의 조사에 따르면 경제성장률이 1% 하락할 때마다 실업자는 7만여명이 증가한다. 적어도 6%대의 경제성장이 이뤄져야 20대 신규 노동력을 흡수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것.올해 경제성장률은 3~4%대에 그칠 전망이어서 취업시장 전망은 어둡기만 하다.“두말 할 필요 없이 경기가 좋아지는 게 급선무죠. IMF 위기 때보다 더 어렵다는 말이 엄살만은 아니라는 게 취업시장에서 그대로 나타나지 않습니까? 100대1의 경쟁률이 ‘보통’이 되고, 나이 서른을 코앞에 둔 대졸 청년들이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는 현실이 정상은 아니잖아요?”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정주 리크루트 사장은 “불황으로 기업들이 상반기 채용을 하반기로 미루고 있지만, 연간 채용인원은 지난해에 비해 30.4% 감소한 규모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박수진 기자 sjpark@kbizweek.com자영업자 - 임명자 원조목포낙지 사장“임대료는 오르는데 매출은 절반”서울 서대문역 부근에서 산낙지전문점을 운영하고 있는 임명자 사장(54)은 요즘 근심이 많다. 올해 초만 해도 그럭저럭 수익을 내다가 4월 들어 손님이 절반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5월에는 급기야 70만원의 적자를 내고 말았다.“예전에는 점심시간에 손님이 줄을 서서 기다렸는데 요즘에는 테이블이 차기만 하면 고맙다니까요. 저녁 술손님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낮 12시에 점심장사를 시작해서 12시30분에 손님들이 빠져나가면 그날 장사를 다 한거나 다름없어요.”임사장은 원래 광화문 근처의 대형빌딩에서 식당을 경영했다. 점심시간에 2회전을 할 정도로 장사는 잘됐지만 저녁 술손님이 없어 수익은 기대에 못미쳤다. 저녁장사를 할 요량으로 터전을 옮긴 지 3년 동안 요즘처럼 힘든 때가 없었다고 임사장은 말한다.매출이 떨어진 것 외에도 걱정거리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5월에는 월세마저 올랐다. 장사가 되지 않으니 양해해 달라고 사정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같은 건물 2층의 중국집은 월세를 감당할 수 없다며 가게문을 닫고 말았다.“우리뿐이 아니에요. 가게를 비우고 떠난 사람들이 주변에 여럿 돼요. 장사가 잘되는 점포라 해도 우리보다 조금 괜찮다뿐이지 썩 좋지 않아요.”비용을 줄이고 싶어도 여의치 않다고 임사장은 말했다. 오히려 야채 같은 부자재값이 올라 비용이 증가했다는 것. 특히 올 봄 양파값이 세 배 가까이 올라 부담이 컸다고 한다. 손님이 없어 버려지는 반찬도 만만치 않다.“아끼려야 아낄 곳이 없어요. 사람을 줄일 수도 없잖아요. 저까지 4명이 일을 하는데 한 명이라도 없으면 점심시간에 손님을 받을 수가 없으니까요.”신용카드를 이용하는 손님이 많아지는 것도 반갑지 않다. 수수료 3%도 버겁다는 것이다. “현금이라곤 1만원도 구경하지 못할 때가 있어요. 전에는 그래도 20% 정도는 현금결제였는데 최근에는 거의 100% 신용카드 결제예요. 재료 사느라 은행가서 현금을 인출할 때 참 속상합니다.”임사장은 앞으로가 더 걱정이라고 한숨을 쉰다. 휴가철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휴가철에는 통상 매출이 절반에 머무른다는 것.“그러잖아도 주5일제 때문에 토요일 장사를 못하는데 휴가철까지 겹치면 어떻게 가게를 유지할지 까마득해요. 여름철에는 반찬과 재료가 잘 상해서 그것도 근심거리고.”수익은커녕 현상 유지도 어렵지만 장사를 접을 생각은 없다고 임사장은 잘라 말했다.“장사꾼이 자리를 자꾸 옮기면 안돼요. 여름이 지나고 찬바람이 불면 손님도 많아질 테니 버틸 때까지 버텨야죠.”변형주 기자 hjb@kbizweek.com동대문시장 상인 - 소복영 웅직물 사장“가게 권리금 사라진 지 오래”2003년 6월3일 오전 11시30분, 동대문 종합쇼핑타운 측면 도로. 한낮의 뜨거운 햇볕 아래 오토바이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이 장관이었다. 오토바이 주차장으로 사용되는 듯한 공간 전체에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고, 빈자리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바쁘게 원단을 실어나르고 있는 오토바이는 몇 대 되지 않았다.A동에서 D동까지 모두 네 동, 앙드레김 의상실의 디자이너들도 여기서 원단을 구해간다는, 단일품목(원단)으로는 동양 최대 규모의 상가라는 동대문 종합쇼핑타운이지만 시장 특유의 활기가 느껴지지 않는다.“원래는 이 시간이 가장 바쁠 때거든요. 그런데 지금 손님이라고 해봐야 겨우 몇 사람 돌아다니고 있잖아요. 가게문 열어놓고 매일 놀다 들어가요.”상가 C동에서 ‘웅직물’을 운영하고 있는 소복영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30년째 같은 곳에서 가게를 하고 있는 베테랑이지만 불황에는 그도 뾰족한 수가 없다고 했다.“가게 한 칸에 권리금 2,000만원, 3,000만원씩 붙었는데 지금은 권리금이 전혀 없어도 임대가 안되고 있어요. 한 1년쯤 전부터 슬슬 장사가 안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바닥이야.”보통 뒷줄의 2평짜리 가게는 보증금 2,000만원에 월세가 200만원 가량 된다. 여기에 관리비 40만원까지 더해 매달 지출은 꼬박꼬박 나가서 문을 여는 만큼 고스란히 손해를 보고 있다. 넓은 통로변에 있는 앞줄 가게들은 보증금과 월세가 1억원에 1,000만원 가량 되므로 부담이 더 크다.한창 경기가 좋았던 때 이런 가게는 권리금만 몇 억원씩 했었다. 그래도 물건이 나오기가 바쁘게 서로 임대하려고 경쟁이 치열했고, 그에 따라 권리금도 부르는 게 값이었지만 모두 옛이야기다.한창 장사가 잘됐을 때는 하루에도 수천만원의 매출을 올리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하루 수십만원도 어렵다. 소사장은 “그래도 우리 가게는 사정이 나은 편”이라면서 “석달 전에 문을 연 건너편 점포는 아직 개시도 못했다”고 귀띔했다.A동에서 D동까지 모두 네 개의 건물에 갖가지 원단을 파는 점포들이 들어서 있다. 여기서 팔리는 원단은 옷, 커튼, 침구, 가방 등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 경기 영향을 가장 민감하게 받는 품목 중 하나라고 한다.이 상가는 오후 7시부터 오전 10시까지 문을 여는데, 요즘은 대부분의 상인들이 오후 9시쯤에 나와서 오전 3~4시면 접고 귀가하는 게 보통이다. “나와 봐야 할일이 없는데 뭐 하러 뻗치고 있겠냐”고 소사장이 탄식했다.이곳은 주로 무역회사와 수출 보따리상들, 그리고 흔히 ‘시장제품’이라고 하는 동대문 남대문의 패션상가에서 옷을 만들어 파는 상인들이 고객이다. 경기가 나빠지면서 이 고객들의 구매패턴도 달라졌다.“예전에는 옷감을 롤단위로 가져갔거든. 지금은 그렇게 안해. 정확히 주문받는 수량에 맞춰 필요한 만큼만 끊어가요. 옷 50벌 주문받으면 30마만 딱 잘라 주세요 해서 가져가지.”원단가격은 늘 그대로인데 원사가격은 계속 오르고 있는 것도 마진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라고 했다. “콩값은 비싸지는데 두부값이 노상 그대로인 것과 똑같다”는 것이었다. “그럼 부가가치가 높은 고급원단 위주로 취급하는 건 어떻겠느냐”고 하자 그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 불황인데 고급원단을 많이 찾겠어? 요즘은 디자이너들도 죄다 조금이라도 싼 원단만 고르려고 해요.”소사장은 “언제쯤 다시 경기가 회복될 것 같은가”는 질문에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이제 이 장사는 사양산업이에요. 여기서 원단 한 마 제작원가가 2,000원 하는데 중국에서는 800원에 만들어 와. 그러니 경쟁이 되겠어요?”김수연 기자 soo@kbizweek.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