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시장은 기업사냥터나 다름없다. 특히 경영권을 노린 적대적 M&A는 생사를 건 혈투가 벌어진다. 최근 국내 3위 그룹인 SK는 소버린의 공격에 통째로 날아갈 뻔했다. 70년 민족기업임을 자부하는 진로는 골드만삭스에 무장해제당한 채 법정관리로 넘어갔다. 이밖에 코스닥에 등록된 상당수의 기업들이 M&A시장에 매물로 나와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이 싸움터에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다. M&A 부티크로 불리는 전문중개업자와 변호사, 공인회계사, 금융기관 등이 함께 어우러져 밀고 당기는 게임을 벌인다. 이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곳이 전략가들이 모인 부티크다. 많아야 20명 내외로 활동하는 이들은 보통 전직 금융인 출신이거나 해외유학파들이다.현재 40여개의 부티크가 우호적 또는 적대적 M&A의 브레인으로 참여한다. 이중 국내에서 처음으로 설립된 곳은 (주)프론티어M&A이다. 국내 1호답게 ‘M&A 사관학교’로 불린다. 40여개의 부티크 중 10여곳이 이 업체 출신들이 설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93년 이 회사를 설립한 성보경 회장은 국내 M&A업계에서 ‘적대적 M&A의 대가’로 통한다.95년 삼성 등 5대그룹 M&A 가능성 제기성회장의 ‘적대적 M&A게임’ 전적은 화려하다. 업무 특성상 모두 밝히기는 곤란하지만 적대적 M&A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적대적 M&A에 의한 경영권분쟁이 있었던 OB맥주, 한화종금, 미창석유, 한농, 금양, 대구종금 등의 적대적 M&A에 의한 경영권 분쟁에 참여했다.지난 95년에는 M&A의 필요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만든 <월간 M&A designtimesp=24006>라는 잡지를 통해 삼성, (주)선경(현 SK글로벌) 등 당시 5대그룹도 적대적 M&A의 무풍지대가 아니라는 보고서를 내 주목을 받았다.최근 홍역을 치른 SK의 경우 당시 이 보고서로 주가가 폭등하기도 했으며, 증권시장의 지주회사 테마군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당시 주력기업인 (주)선경을 공격, 총발행 보통주식의 30% 정도의 지분만 확보하면 선경그룹 총자산의 70~75%에 해당하는 약 17개 계열사의 경영권을 장악할 수 있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킨 것이다. 또 업계의 필독서로 통하는 (96년), 등 5권의 전문서적을 냈다.그가 국내에서 생소한 M&A를 처음 접한 것은 대학시절(서울시립대)이다. 뉴욕주립대에서 M&A를 강의하다가 서울시립대로 옮긴 허창수 교수를 통해 M&A 매력에 푹 빠진 것.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공부하고 싶어도 한국에는 자료가 거의 없었다.할 수 없이 외국서를 구입해 독학을 했으나 한계는 뚜렷했다. 그의 말대로 “당시에는 인터넷이 발달되지 않은 시절이기 때문에 필요한 책을 찾고, 주문하고 배송받는 데 3개월 이상이 소요”됐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유학길에 오른다. 88년의 일이다. 유학길에서 그는 마침내 자신의 재능을 발견했다.캘리포니아주립대와 컬럼비아대 MBA과정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 것이다. 당시 M&A 전문회사 등이 개최한 ‘M&A시뮬레이션 게임’ 평가에서 1등을 독차지했다. 물론 피나는 노력의 덕분이었다. 유학 중에 하루 3~4시간 이상 수면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한 달 동안은 매일 코피를 흘리면서도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 그가 더듬은 유학시절이다. 다행히도 열매의 단맛을 빨리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미국 M&A전문회사들의 스카우트 표적이 됐기 때문이다.결국 적대적 M&A를 전문으로 하는 NAIC에 몸을 담았다. 그는 단숨에 고액연봉자로 신분상승에 성공했다. 연봉 30만달러를 받았다. 당시 대졸자 연봉은 2만5,000~3만달러 수준에 불과했다.그는 그곳에서 전략무기와 금융분야 팀장을 차례로 맡았다. 그는 “미국의 투자금융회사에서 가르치는 6개월간의 교육이 평생 공부한 것보다 더욱 도움이 됐다”는 말로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에 대해 일침을 놓기도 했다.그는 “전략무기분야는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다”고 말했다. 당연히 세계 각지(30여개국)를 돌아다니면서 기업사냥에 나섰다. 당시 쌓은 네트워크는 지금도 큰힘이 된다. 성회장은 “전세계 16개국 45개 회사와 M&A글로벌네트워크를 만들어서 운영 중”이라고 귀띔했다.그러나 90년대 초반은 미국경기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을 때였다. 이 무렵 국내로 돌아왔다. 귀향은 무척 힘들었다. 국내 최초로 부티크를 차렸지만 M&A라는 용어조차 생소한 분위기였다. 게다가 부정적인 인식까지 겹쳐 일거리를 구하기 힘들 정도였다.당연히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전세로, 사글세로 옮겨 다니는 고역을 겪기도 했다. 그의 첫 작품은 94년 손을 댄 S건설회사. 당시 증권가의 유명인사들인 피스톨 박, 라이플 장 등이 한무대에서 뛰었다.이때부터 적잖은 돈을 벌면서 서서히 이름도 알려졌다. 이후 OB맥주와 한화종금 등의 경영권 분쟁에 뛰어들면서 ‘냉혈인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OB맥주는 대표적인 ‘공격’ 사례다. 95년 자도주 제도가 폐지되면서 코너에 몰린 지방소주사 금복주, 무학, 대선주조 등 3사의 의뢰를 받아 OB맥주의 경영권 싸움에 뛰어들었다. 반면 ‘방어’에 나선 경우도 적잖았다.그 가운데 한화종금이 그의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다. 당시 모 상호신용금고 회장 등 연합세력의 공격을 받은 한화종금은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했고, 결국 성회장에게 경영권 방어를 의뢰한 것. (주)프론티어M&A는 “매년 15건 정도의 우호적인 M&A를 성사시키고 있다”고 밝혔다.요즘 그의 시선은 바다를 건넜다. 일본과 동남아에 있는 일본기업이 출자한 회사들이 타깃이다.지난해부터 일본을 주목한 이유에 대해 “해외투자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한 나라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일본기업들이 10년 이상 장기불황에 시달리면서 해외에 투자한 기업들을 싸게 팔고 있다는 것. 그중에 하나는 일본의 골프장이다.그는 “2,400여개의 골프장 중 부도난 곳이 600여개에 달할 정도로 매물이 많다”며 “30~40개 정도의 골프장과 호텔을 인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일본 골프장 인수에 대한 기대감은 무척 높다. “일생에 몇 번 안되는 최대의 기회이자 투자금융업무의 성공모델이 될 것”이라고 힘줘 말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그는 일본의 인수 대상 골프장을 70여개 확보하고 있으며, 이미 몇 개는 인수계약을 체결한 상태라고 한다. 그리고 동남아지역의 경우 “지금 작업 중”이라며 더 이상 밝히기를 꺼려했다.그리고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갖춘 국제투자금융회사를 우리나라에 설립하는 것은 그의 꿈이다. 벤치마킹 대상은 골드만삭스다. M&A는 냉정한 승부의 세계다. 치밀하고 발빠른 전략이 승부를 가른다. 그래서 늘 ‘지독한’ 긴장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그는 “하나의 딜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99개의 소중한 것이 떨어져나가는 고통을 이겨내야 한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자녀출산 때도 분만실 앞에서 노트북으로 일했다”고 할 정도이다. 반면 보람은 역시 ‘승리’했을 때다.쾌감지수가 천장에 닿을 정도라고. 취미는 골프다. 핸디15 수준으로 올해 싱글진입이 목표다. 드라이버샷 비거리가 280~300야드 정도의 장타자다. 힘들 때는 해남 대흥사 일지암을 찾는다. 일지암은 한국다도의 성지로 초의선사가 계시던 곳이다. 그곳에서 여연 스님과 함께 바둑과 다도로 마음을 달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