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움을 주는 술’에서 ‘친구·직장동료간의 암호’로

진로의 일본 현지법인인 진로재팬(사장 김태훈)은 서울 본사의 복덩어리다. 부채사슬을 벗어나지 못한 서울 본사가 법정관리에 묶인 몸이 됐지만 일본시장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진로재팬은 상황이 영 다르다. 진로 소주가 단일브랜드로 재팬 넘버원의 왕좌에 오른 것은 이미 옛날이야기이고 매출, 순익 등 회사 경영상태를 나타내는 지표도 모조리 ‘청신호’다.한국에 관심을 가진 일본인이라면, 그리고 소주와 불고기의 맛에 푹 빠진 일본인이라면 술이야기는 십중팔구 ‘진로’라는 이름 두 글자로 시작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상품으로 확실한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 성공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일본에서 비즈니스 최일선을 뛰는 한국주재원들 사이에서는 진로의 성공신화가 부러움의 대상이다. 아무리 두드리고 때려도 좀처럼 열리지 않는 일본시장을 진로는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니 어찌 부럽지 않으냐는 이야기다. 까다롭고 자국 상품에 대한 사랑이 유별난 일본 소비자들을 사로잡은 진로재팬의 사례는 일본시장 개척의 교과서나 다름없다는 게 이들의 지배적 평가다.한해에 약 500만 상자의 소주를 일본에 팔고 있는 진로재팬은 그러나 지금까지의 성적에 만족하지 않고 최근 두 가지의 더 큰 실험에 돌입했다. 브랜드 컨셉의 과감한 전환과 고객층 다변화를 겨냥한 신제품 투입이 바로 그것이다.노란 바탕에 붉은 컬러로 ‘JINRO’라고 쓰여진 제품을 일본시장에 팔아온 진로재팬은그동안 브랜드 컨셉의 중심축을 ‘즐거움을 주는 술’에 맞춰왔다. ‘서민의 술’ ‘누구나 부담 없이 함께 나눌 수 있는 술’이라는 한국시장에서의 컨셉과 달리 좀더 고품격 이미지를 풍기면서 즐겁게 마실 수 있는 제품이라는 것을 강조해 온 것이다.하지만 지난 5월부터 전파를 타기 시작한 신작 TV CF를 계기로 진로재팬은 브랜드 업그레이드에 승부수를 던졌다. 즐거운 술이라는 기본 컨셉을 확장, 직장동료와 친구들이 모인 자리를 빛내고 더욱 즐겁게 만들어주는 술이라는 방향으로 점프를 시도했다. ‘진로’라는 두 글자는 여러 사람들이 모인 자리의 키워드이며 이 키워드가 있으므로 동료애도 깊어지고 자리는 기쁨으로 넘쳐난다는 컨셉이다.이를 위해 진로재팬은 신작 TV CF의 핵심 슬로건으로 ‘Let’s Jinro’를 내세웠다. 친구, 동료들만이 아는 즐거운 암호라는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친구 사이를 더 가깝고 즐겁게 만들어준다는 컨셉을 설정하고 방영을 시작한 CF는 소비자들로부터 폭발적 인기를 끌어모으며 진로재팬의 의도가 적중했음을 보여주었다.홈파티편과 오피스편, 그리고 위를 올려다보는 남자편 등 모두 3편으로 구성된 새 CF는 5월 말 실시된 일본의 CM인덱스 조사에서 주류 CF 94편 중 1위에 올라 경쟁업체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조사대상이었던 총 4,200여편 중에서도 6위라는 눈부신 성과를 차지했다.진로재팬과 광고를 제작한 하쿠호도사는 ‘Let’s Jinro’라는 슬로건을 앞세워 진로 소주야말로 친구와 친구, 동료와 동료 사이를 이어주는 암호(촉매제)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 젊은 소비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보고 있다.TV 노출 후 2주 정도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서도 거리 곳곳에서는 진로의 신작 CF에 등장하는 모델들의 댄스를 따라하는 젊은이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는 것이 진로재팬측의 설명이다. 일선 업소들에서는 진로를 주문하는 소비자들에게 종업원들이 CF에 나오는 진로 댄스를 연출하며 서비스하는 곳도 생겨났을 정도였다고 최창락 마케팅팀 차장은 말하고 있다.진로재팬의 브랜드 컨셉전환은 경쟁업체들의 추격을 벗어나는 한편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는 일본의 소주붐을 겨냥, 타깃 고객층을 확대하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되고 있다.일본 주류시장 맥주에서 소주로일본 소주업체들은 ‘즐거운 술’에 컨셉을 맞춘 진로가 초고성장 가도를 달리자 이에 대응하기 위한 제품을 연이어 투입하면서 광고전략도 유사한 방향으로 설정, 진로의 차별성을 희석시키는 데 주력해 왔다.86년 도쿄사무소 설립, 88년 현지법인 승격의 발자취가 보여주듯 일본시장 본격 진출 후 20년도 채 못된 기간에 일본 열도를 평정한 진로의 괴력 앞에 이들은 위기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진로재팬의 브랜드 확장은 말하자면 일본업체들의 집중포화와 견제를 벗어나는 한편 성장엔진을 보다 추진력이 강한 것으로 바꿔 단 포석이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진로재팬의 신작 TV CF는 20대 전후의 젊은 주당들이 중심이 된 소주 붐에 포커스를 맞춰 타깃 고객층을 한층 밑으로 끌어내리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 불황터널의 한복판을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본시장은 위스키는 물론 맥주소비가 눈에 띄게 줄어드는 반면, 상대적으로 값이 싼 소주로 수요가 대이동 중이다.소주의 수요증가는 특히 소주에 과즙을 섞어 만든 캔제품이 주도하고 있으며 맥주가 주력제품인 기린 등의 대형 메이커들도 저마다 소주시장에 앞다퉈 뛰어들고 있다.20대 후반의 회사원 스에다케 도모에씨는 “친구들과 만날 때 예전에는 맥주를 주로 마셨지만 요즘은 소주에 과일을 섞은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주변에 부쩍 늘어났다”고 말했다. 아침 출근길에 지나치는 아파트 앞 쓰레기통에서도 지난해 말부터는 캔소주가 캔맥주 못지않게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을 볼 때가 적잖다고 그는 덧붙이고 있다.타깃 고객을 젊은층으로 끌어내리려는 진로재팬의 포석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승부수는 맛과 패키지를 철저히 일본시장의 특성에 맞춘 신제품 투입이다. 진로재팬이 7월1일부터 일본 전역에서 판매에 들어간 ‘Chamisul’은 한국의 참진이슬로 소주를 연상시킬 만큼 이름이 비슷한 제품이다. 대나무숯으로 여과해 잡맛을 제거한 제조공정도 참진이슬로와 일부 닮아있다.그러나 ‘Chamisul’의 패키지와 맛은 완전히 일본적이다. 일본 소비자들의 눈과 혀에 맞춰 패키지를 달리하고 맛도 차별화했다. 초록색 바탕에 영어로 쓰여진 제품이름은 시판 중인 일본 소주들을 연상시키며 산뜻한 이미지를 뿜어낸다.한국의 진로 소주나 중년남성들에게 타깃의 무게가 실렸던 기존의 일본 판매용‘Jinro’와는 다른 분위기다.광고모델도 지금까지와 패턴을 바꿨다. 일본이나 한국 모델이 아닌 제3국의 외국 모델을 앞세워 진로를 마시는 즐거움을 강조해 왔으나 ‘Chamisul’은 한국 모델로 승부수를 띄웠다. 한국의 신예스타로 각광받고 있는 영화배우 최지연을 모델로 기용, 깨끗한 맛과 신선감 넘치는 패키지가 모델이미지와 자연스럽게 조화되도록 했다.신감각파 소주를 표방하는 ‘Chamisul’은 담백하고 깔끔한 것을 선호하는 일본인 소비자들의 식문화를 최대한 고려했다. 톡 쏘는 한국적 맛과 달리 깨끗한 뒷맛을 내면서도 은은한 풍미를 담을 수 있도록 증류주 원액을 첨가해 제조, 내용물의 고급화를 함께 시도했다.진로재팬의 변신실험이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둘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업체간의 제살 깎아먹기식 출혈판매로 전체 이미지를 스스로 실추시키고 있는 소주메이커들의 무한경쟁에 제동을 거는 효과는 적잖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30대 이후의 남성적 이미지가 강했던 브랜드에도 젊음을 불어넣어 여성, 젊은 남성들을 신규고객으로 끌어들이는 효과 또한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진로재팬은 병뚜껑 안쪽에 인쇄된 판다 마크를 찾아내면 1만엔 상품권을 증정하는 ‘2003마리 판다곰 찾기’ 행사를 ‘Chamisul’ 시판에 맞춰 7월1일부터 시작, 한여름 소주시장을 뜨겁게 달궈놓고 있다.최창락 차장은 “2003년은 진로의 일본공략에 새 지평이 열리는 한해가 될 것”이라며 “모든 소비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소주가 되도록 고감도 마케팅을 밀어붙일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