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이전‘수출 1,000억달러 시대, 수출한국 빛낸 히트상품’ ‘세계화 대상’ ‘시장개방 되더라도 경쟁력 있을 만한 추천종목’….영창악기는 95년 한 해에만 이처럼 다양한 수식어를 달고 다녔던 회사다.1956년에 고 김재섭 회장이 신향피아노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영창악기는 창립 당시만 해도 종업원 10명 남짓의 작은 업체였다.국내 최초의 피아노 생산업체였지만 한 달 동안 만들어내는 물량이래야 12∼13대에 불과했다. 이처럼 소규모 조립업체에 지나지 않았던 신향피아노는 63년 외자도입법이 생기면서 본격적인 피아노제조업체 형태를 갖추게 됐고 회사명도 영창악기제조로 바꿨다.이후 90년대 중반 영창악기의 연간 생산량은 약 14만대에 달했다. 상업광고에 출연하지 않던 오스트리아 빈소년합창단이 영창피아노 광고에 등장한 것도 이때다.미국 로스앤젤레스와 캐나다 토론토 등에 판매법인을 두고 보스턴에는 연구개발센터를 설치하는 등 수출역군으로서의 면모를 십분 발휘했다. 중국을 일찌감치 차기시장으로 보고 현지공장도 세웠다.90년에는 미국 전자악기업체 ‘커즈와일’을 인수해 디지털 사업부문도 갖추게 됐다.우리나라가 외환위기를 맞은 98년 전까지만 해도 세계 3대 피아노메이커로 자타가 인정했다고 회사측은 자랑한다.▷1998년 9월지난 98년 9월 영창악기의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은 이 회사를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대상 기업으로 선정하고 채권금융기관협의를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노조의 반발로 부분파업과 직장폐쇄 등 분규를 겪게 된다.그리고 이듬해 4월, 결국 채권단 회의에서 워크아웃 동의가 이뤄졌다. 다행히 2000년 말 주요 시중은행들의 부실판정 대상 기업 처리결과에서 영창악기는 회생판정을 받았다. 그야말로 기사회생의 기회를 얻게 된 것.이후 영창악기는 워크아웃 ‘모범생’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99~2000년에 걸쳐 733명의 인원을 감축해 연간 인건비를 110억원 줄였다. 미국과 캐나다, 유럽 등지의 해외법인을 정리하고, 공장도 팔았다.▷ 2002년 6월한때 6,000명에 이른 적도 있었던 영창악기의 직원수는 이제 1,000명 남짓으로 크게 줄었다. 경영진은 2001년 말까지의 인력감축을 끝으로 “구조조정을 마무리했다”고 선언했다.결국 2002년 상반기 들어 워크아웃 졸업에 대한 기대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창악기 주가는 연일 상한가. 거래량도 부쩍 늘기 시작하면서 2002년 5월 영창악기 채권단은 워크아웃 졸업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실사를 벌였다. 마침내 외환은행은 6월 말에 이르자 영창악기의 워크아웃 졸업이 확정됐다고 밝혔다.워크아웃 졸업 한 달 후인 7월에는 김재섭 회장의 아들인 김재룡 전무가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2002년 12월영창악기가 99년부터 전략적으로 제휴한 독일 스타인웨이는 90% 이상의 세계 유명 연주회장이 보유한 세계 최고급 피아노 브랜드다.제휴가 시작된 뒤 영창악기는 스타인웨이사에 1,700여대를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으로 수출해 왔다. 2002년 말이 되면서 2년에 걸쳐 팔아온 것보다 더 많은 숫자인 2,000대를 2003년의 목표치로 잡았다. 따라서 이 시점이야말로 제휴가 본격화되는 순간이다.내친김에 아예 ‘고급화’를 회사운영 방침으로 정했다. 저가의 가정용 업라이트 피아노 중심이던 내수시장에서 영창피아노는 단순히 ‘영창’ 브랜드 하나로 통해왔다. 이런 이미지를 버리고 브랜드 다각화에 본격 착수하게 된 것이다.이 시기부터 영창악기의 피아노는 판매가 최고 1억원에 이르는 최고급 ‘프렘버거’, 그 아래 고급 브랜드 ‘웨버’, 중고급인 ‘영창’, 중저급의 ‘버그만’으로 브랜드 다양화를 지향하고 있다.▷2003년 4월‘아직도 배가 고프다.’직원 1,000여명을 줄여가며 3년 10개월 만에 워크아웃을 졸업했던 영창악기는 올해 초 또다시 ‘가슴아픈’ 구조조정을 거쳐야 했다.지난 3월 말까지 명예퇴직신청을 받아 300명을 감원했다. 디지털피아노부문인 커즈와일을 분사하면서 30여명이 또 줄었다. 결국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1,010명에 이르던 직원은 680명으로 줄어들었다. 4년 만에 전체 직원의 65%가 회사를 떠난 것이다.디지털피아노부문은 고가제품 판매와 함께 이 회사의 차기주력분야 중 하나.자본금 80억원 규모로 세운 자회사 커즈와일의 상품력 강화를 위해 삼성전자 출신의 우성근 영업관리·총괄 상무를 영입했다.우상무는 “커즈와일의 경우 기술력은 세계적 수준이지만 상품성이 뒤처져 국제무대에서 실력발휘를 제대로 못하고 있다”며 “국내와 미국으로 제한돼 있는 판매망을 1국 1판매망 체계로 바꿔나갈 계획”이라고 의지를 보였다.▷ 2003년 6월지난 6월 말 충청남도 보령군 대천시청 문화예술회관은 작은 행사를 가졌다.1,000석 규모의 연주회장에 새로 들여온 피아노의 성능을 테스트하기 위해 시청 관계자들과 전속합창단을 초대한 것. 한마디로 품평회를 겸한 소규모 공연을 가졌다.이날 공연의 주인공은 콘서트홀의 90%를 ‘꽉 잡고’ 있다는 독일산 ‘스타인웨이’가 아닌 한국산 ‘프렘버거’였다.최고급 피아노 브랜드로 알려져 있는 스타인웨이가 아닌 국산 브랜드 영창피아노 제품이 관에 납품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안성주 영업팀장은 “중국 제품이 몰려오고 있어 저가제품만으로는 승부가 나지 않는다”며 “따라서 고급제품에 승부수를 건 우리의 전략이 먹혀들고 있는 것”이라고 평가했다.그는 또 “이날 연주를 맡았던 문화예술회관 반주자가 ‘내가 쳐본 피아노 중 최고’라고 평가해 가슴이 뭉클했다”고 자랑했다.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1억원짜리 피아노’ 프렘버거 풀콘서트그랜드피아노는 95년부터 영창악기 고문을 맡아온 프렘버거씨의 기술노하우가 담긴 제품이다. 프렘버거 가문은 7대째 피아노제작을 해왔다. 1800년대 만들어진 프렘버거 피아노는 현재 비엔나 음악박물관에 전시돼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아무리 고가제품이지만 이 제품 1대의 납품에 이토록 큰 의미를 두는 이유는 전세계적으로 연주회장에는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들어가 있는 게 정설처럼 돼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납품실적이 없어 어려움이 많았던 영창악기는 따라서 대천시청 납품을 위해 그야말로 눈물겨울 정도의 노력을 기울였다.신수정 서울대 교수 등 유명 음악가들을 영창악기 자문위원으로 위촉했다. 소비자들에게 제품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네 차례에 걸쳐 제품시연회를 가졌다.지난해에는 서울 쉐라톤 워커힐, 대구 파크호텔, 서울 신라호텔에서, 그리고 올해 서울 여의도 영산아트홀에서 시연회를 가졌다. 같은 수준의 스타인웨이 제품에 비해 가격경쟁력이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스타인웨이의 풀콘서트그랜드피아노는 1대당 가격이 1억5,000만원에 이른다.프렘버거는 가정용의 경우 한대에 500만원, 연주용 그랜드 피아노의 경우에는 3,000만원 정도다. 이 중 고객의 주문을 받아 생산하는 최고급 제품이 바로 이 풀콘서트그랜드피아노다.95년 수출용으로 개발을 시작했지만 국내 시장에서도 고급화 바람이 불면서 내수판매에 자신을 얻어 출시하게 됐다. 가정용의 경우 내수시장에서 올 상반기에만 700대 이상 팔리는 등 고급피아노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한편 지난 7월2일, 영창악기에서 분사된 커즈와일 사무실에는 고사상이 푸짐하게 차려졌다. 분사 일주일을 맞아 성공을 기원하는 고사를 지낸 것. 김재룡 영창악기 사장이 이 회사의 대표를 겸임하고 있다. 디지털피아노분야는 고급화 전략 못지않게 김사장이 신경 쓰는 분야다.‘1억원짜리 피아노 팔아치우고 디지털피아노분야 분할로 전문성 높이고…’앞으로 영창악기는 세계 최고급 브랜드 프렘버거 피아노의 인지도를 높이고 고급피아노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마케팅력을 집중할 계획이다.제2의 도약을 위해 눈물겨운 4년 10여개월을 보낸 영창악기의 부활의 연주는 이미 시작됐다.INTERVIEW / 김재룡 영창악기 사장“한 번 뚫린 구멍은 계속 커지죠”“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부모가 자녀를 위해 피아노 1대 사주는 게 큰 선물이었죠. 요즘은 PC가 이를 대신하고 있지만요.”악기업체들에 내수시장은 이미 매력이 없다는 게 김재룡 영창악기 사장(44)의 분석이다. 영창악기의 주요 아이템인 피아노의 경우 소득이 높아질수록 가정용 업라이트피아노보다 공연용 그랜드피아노의 수요가 커지기 마련이라는 것. 따라서 업라이트피아노의 판매비중이 높은 우리나라 시장은 이미 쇠락기에 접어든 셈이라고 판단하고 있다.실제로 영창악기가 워크아웃에 들어간 98년을 기준으로 비교해 보면 이전에는 업라이트 8,000여대와 그랜드피아노 80여대가 월 평균 실적이었지만 요즘은 업라이트피아노 2,000여대와 그랜드피아노 80여대가 팔리고 있다는 것. 최근의 경기부진을 감안할 때 상대적으로 그랜드피아노의 판매비중이 높아진 셈이다.김사장은 이번 프렘버거 피아노 납품을 두고 “악기시장이 매우 보수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관납품에 성공한 것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라고 소감을 밝혔다.“피아노란 항상 95점 상태로 출시되는 제품”이라는 김사장은 “제품 자체보다 출시 이후 관리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국내 제품을 선택하는 것도 일종의 지혜”라고 설명했다.따라서 국내 시장에서 고가제품의 경쟁력이 충분히 있다고 판단되지만 역시 보수성이라는 시장 특성상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한 번 생긴 구멍은 커지기 마련”이라며 프렘버거 납품에 의미를 부여했다.경영자로서 2차에 걸쳐 진행된 구조조정과정이 가장 힘들었다는 김사장은 “올해는 해외법인을 정상화시키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