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MC, ‘반도체 동맹’ 핵심 축 등장…한국의 선택은
대만의 반도체 기업 TSMC가 미국과 일본의 기업들과 협력을 강화하며 ‘반도체 동맹’의 핵심 축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 같은 동맹의 배경에는 정보기술(IT)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려는 미국의 노림수가 숨어 있지만 미·일·대만과 중국 가운데 어느 한쪽 편을 들기 힘든 한국의 경우 난감한 상황이 예상되고 있다.

대만의 TSMC(臺積電)는 세계 최대 반도체 위탁생산(foundry) 업체다. 파운드리는 설계를 하지 않고 팹(fab: fabrication의 줄임말)을 통한 반도체만 생산하는 업체로, 팹리스(fabless) 업체와 반대된다. 반도체업계에서 팹은 공장을 의미하는데, 공장 없이 설계만 전문으로 하는 기업을 팹리스라고 부른다.

대만 시장조사기관 트렌스포스에 따르면 TSMC는 2020년 기준 세계 파운드리 시장에서 점유율 54%를 차지하며 압도적인 1위를 기록했다. TSMC의 지난해 매출은 1조3393억 대만달러(약 52조5540억 원)로 역대 최대 실적을 올렸다.

TSMC는 대만 반도체업계의 대부라는 말을 듣고 있는 장중머우(모리스 창, 89) 전 회장이 세운 회사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기계공학과 석사학위와 스탠퍼드대 전기공학과 박사학위를 취득한 장 전 회장은 1955년 미국 실바니아전자에 들어가 반도체업계에 입문한 뒤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에서 25년간 일하며 부사장까지 지냈다.

1985년 대만 정부 산하 공업기술연구원(ITRI)의 책임자로 영입돼 대만으로 귀국한 장 전 회장은 2년 뒤인 1987년 56세 나이에 TSMC를 설립해 최고경영자(CEO)로 일하다가 2018년 6월 은퇴했다. 장 전 회장은 퇴임사에서 “앞으로 10년 이후에도 세계는 지금처럼 TSMC를 필요로 할 것”이라면서 “중국의 반도체 산업이 상당히 발전해도 TSMC를 뛰어넘지 못할 것이다”고 밝혔다.

TSMC, 화웨이 버리고 미국 기업과 밀월
TSMC가 승승장구하고 있는 비결은 무엇보다 기술력이다. 반도체 산업은 크게 메모리반도체, 시스템반도체, 파운드리 세 분야로 나뉜다. 메모리반도체는 데이터 저장용 반도체로 한국의 삼성전자가 세계 1위다. 시스템반도체는 연산, 처리를 담당하는 ‘두뇌’ 격으로 미국의 인텔이 세계 최고다. 파운드리는 TSMC가 세계 최대다.

장 전 회장은 반도체 산업의 설계와 생산을 분리시킨 인물이다. 그는 반도체 생산 공정 개발과 생산 설비의 비용이 급증하는 것을 지켜보며 미래에는 반도체 설계와 생산이 분업화할 것으로 예상하고 파운드리라는 비즈니스 모델을 최초로 고안했다.

그가 TSMC를 창업할 당시 세계 반도체 산업은 미국 IBM, 일본 도시바 등 종합 반도체 기업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종합 반도체 기업이란 반도체 설계와 생산을 모두 맡는 기업을 말한다. 그는 TSMC를 창업한 이후 31년간 한 우물을 파면서 기술력 개발에 총력을 기울여왔다. TSMC는 그동안 10nm(나노미터, 1nm=10억 분의 1m), 7nm 등의 개발을 선도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앞선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는 “파운드리 업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오로지 기술 리더십을 계속 유지해가는 것이다”고 강조했다.

장 전 회장의 후계자인 류더인(66) 회장도 이른바 ‘무어의 법칙(Moore’s Law)’을 거론하면서 TSMC가 잘나가는 비결은 압도적인 기술력이라고 밝혔다. 인텔의 창업자 고든 무어가 제시한 무어의 법칙은 ‘반도체 집적회로의 성능은 18개월마다 2배로 증가한다’는 이론이다.

파운드리 업체 중 7nm 이하 미세공정 기술은 TSMC와 한국의 삼성전자만 보유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7nm부터 3nm 개발 고지를 선점했다. 삼성전자는 2022년부터 3nm를 양산할 계획이다. 하지만 TSMC는 삼성전자를 제치고 지난해 초 세계 최초로 5nm 양산에 돌입했고 올해 3nm를 시험 생산하고 내년 하반기부터는 본격 양산에 들어갈 계획이다. TSMC는 또 지난해 하반기 2nm 연구·개발(R&D)을 공식화했다. 대만 정부는 신주 남방과학기술단지에 있는 TSMC 2nm 팹에 대한 환경영향 평가를 승인했다.

TSMC의 또 다른 비결은 미국 반도체 업체들과의 협력관계를 꼽을 수 있다. TSMC는 지난해 미국 정부의 요청에 따라 세계 최대이자 중국 최대인 중국 통신장비 업체 화웨이와 거래를 중단했다. 화웨이는 당시 TSMC의 2대 고객이었다. TSMC가 화웨이와 거래를 단절한 것은 대만 정부와 미국 정부의 밀월관계에서 비롯됐다.

차이잉원 대만 총통은 지난해 9월 18일 총통 관저에서 1979년 단교 후 대만을 방문한 미국 최고위급 국무부 관리인 키스 크라크 경제차관을 환영하는 만찬 행사를 가졌다. 대만과 미국의 정부 고위관리들이 참석한 이 자리에 대만 민간인이자 기업인으로선 유일하게 장 전 TSMC 회장이 초대받았다. 차이 총통은 “크라크 차관 취임 이후 대만과 미국 관계를 촉진하는 데 앞장선 탁월한 공헌에 감사한다”며 “앞으로도 함께 노력해 계속 인도·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안정, 번영에 긍정적인 효과가 계속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당시 장 전 회장과 크라크 차관의 만남은 대만과 미국의 ‘반도체 동맹’ 구축을 위한 예고편이었다. 크라크 차관은 트럼프 정부가 추진해온 IT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려는 전략을 주도해온 핵심 인물이었다. 특히 미국의 전략은 중국의 ‘아킬레스건’인 반도체를 글로벌 공급망에서 제외시킨다는 것이다. 미국의 이런 전략이 성공하려면 중국에 반도체를 대량 공급해온 TSMC의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장 전 회장은 트럼프 정부의 요청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TSMC는 화웨이와는 거래 중단 이외에도 “2024년까지 미국 애리조나주 챈들러에 120억 달러를 투자해 5nm 파운드리 팹을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챈들러는 세계 최강인 인텔의 반도체 제조의 본거지다. 인텔을 비롯해 애플, 퀄컴, 엔비디아, AMD 등 미국 반도체 업체들은 TSMC에 대규모 물량을 주문하고 있다.
TSMC, ‘반도체 동맹’ 핵심 축 등장…한국의 선택은
TSMC, 전년 대비 투자
규모 60% 이상 증액


미국 반도체 업체들은 매출의 15%를 차지하던 화웨이 물량보다 훨씬 많이 TSMC와 거래하고 있다. 특히 미국 정부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대만 정부와 TSMC를 전폭 지원하고 있다. 이에 따라 TSMC는 올해 급증하고 있는 물량을 공급하기 위해 최대 280억 달러(약 30조7400억 원)를 투자할 방침이다. TSMC의 의도는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하면서 경쟁사인 삼성전자(시장점유율 16.4%)와의 격차를 더욱 벌리겠다는 것이다. 웬델 황 TSMC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올해 투자 규모를 최소 250억 달러, 최대 280억 달러로 책정했다”고 밝혔다. 이는 지난해 투자 규모인 172억 달러에 비해 60% 이상 증액된 것이다. 황 CFO는 “투자 확대는 수요 증가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다”고 강조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TSMC는 바이든 정부에서도 미국 반도체 업체들과의 관계를 더욱 강화할 것으로 전망된다는 것이다.

바이든 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 자국 반도체 업체들과 TSMC의 협력관계를 구축해 ‘반도체 동맹’을 맺고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막는 것이 기술패권 경쟁에서 승리하는 방안이 될 수 있다. 바이든 정부는 또 TSMC는 물론 대만 정부와 협력해 반도체 기술이나 장비 등이 중국으로 유출되는 상황을 봉쇄할 수도 있다.

바이든 정부는 트럼프 정부와 마찬가지로 ‘화웨이 때리기’에 적극 나서고 있다. 바이든 정부는 화웨이를 ‘신뢰할 수 없는 공급업체’로 규정했다.

미국과 대만 정부는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 이후 처음 열린 고위급 경제회담에서 반도체 공급망을 재구축하기로 합의했다. 맷 머레이 미국 국무부 무역정책협상 부차관보와 왕메이화 대만 경제부 장관은 2월 6일 화상으로 진행된 양국의 고위급 경제회담에서 이같이 결정했다.

당시 회담에는 미국에서 퀄컴 등 기업들의 고위 간부와 재계 단체들의 대표들이, 대만에서는 TSMC와 미디어텍 등의 고위 간부들이 각각 배석했다. 양국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 공급 부족 사태를 빚고 있는 차량용 반도체 생산과 공급에 협력하기로 했다. 미국 기업과 재계 단체 대표들은 ‘반도체 동맹’ 구축을 위해 미국과 대만 간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TSMC, 일본에 자회사 신설 등 협력 강화

더불어 눈에 띄는 점은 TSMC가 200억 엔(약 2123억 원)을 투자해 도쿄 인근인 이바라키현 쓰쿠바시에 반도체 R&D 회사를 설립하는 형태로 일본에 처음 진출한다는 것이다. TSMC가 일본에 신설하는 자회사는 반도체 후(後)공정 가운데 하나인 패키징 작업과 관련한 기술 개발을 담당할 계획이다.

TSMC는 일본 자회사 설립 등과 대규모 투자를 위해 총 90억 달러(약 1조 원) 규모의 회사채까지 발행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관련해 니혼게이자이신문은 “TSMC가 앞으로 일본에 파운드리 공장을 설립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면서 일본 정부가 TSMC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왔다고 보도했다.

TSMC는 대만에서 이미 일본 기업들과 활발하게 협력해왔다. 도쿄 일렉트론, 신에쓰화학, JSR, 스크린 세미콘닥터 솔루션, 섬코 등 일본 업체들은 모두 TSMC의 주요 부품 공급업체들이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반도체를 전략 산업으로 보고 있으며 보조금 등을 지급해 TSMC와 일본 기업들과의 협력 강화를 지원할 방침이다.

TSMC가 미국과 일본에 반도체 파운드리 공장과 R&D 시설을 가동한다면 미국 정부가 구축하려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반도체 동맹’이 실현될 수 있다. 이 경우 TSMC는 미국·일본·대만의 ‘반도체 동맹’에서 핵심 축이 될 것이 분명하다.

TSMC로서도 미·일 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경쟁사인 삼성전자를 제치고 파운드리 시장에서 독주 체제를 완전히 굳힐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한국 반도체 업체들은 난감한 입장이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 SK하이닉스는 중국 우시·충칭에 반도체 공장을 가동하고 있기 때문에 미·일·대만과 중국 가운데 어느 한쪽 편을 들기 힘든 상황이다.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