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61시간 일한 A 씨, 입원 중에도 노트북으로 업무…"업무상 요인이 병세 악화시켜"

[법알못 판례읽기]
과로‧스트레스로 병세 악화…대법 "업무 연관성 뚜렷하지 않아도 산재 인정"
일하던 도중 중병에 걸렸거나 그로 인해 사망에 이르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이때 어느 범위까지 산업 재해로 볼 수 있을까.

질병과 업무상 상관관계가 쉽게 파악되지 않는 사례는 부지기수다. 이를 두고 법정 소송까지 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회사는 물론 노동자와 근로복지공단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입원 치료를 받던 노동자가 충분한 휴식을 갖지 못한 채 업무에 복귀해 병세가 악화돼 사망에 이르게 된 경우 근로복지공단이 유족 급여와 장의 비용을 지급해야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제1부(주심 박정화 대법관)는 노동자 A 씨의 산업 재해 보상보험법에 따른 유족 급여와 장의비 지급을 청구했다가 거절당한 A 씨 유가족에게 근로복지공단이 해당 급여와 비용을 지급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고 3월 11일 밝혔다.1심 “과로·스트레스로 병세 심해졌다면 업무 관계 있어”A 씨(사망 당시 50세)는 한 택배회사의 지방센터 운영과장으로 2009년부터 근무해 왔다. 근무 5년 차 되던 2014년 9월 그는 건강검진을 통해 단백뇨 진단을 받았다.

이후 병원에 입원해 신장 조직 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는 ‘미만성 막성 사구체신염이 있는 신증후군’이었다. 신증후군은 신장에 문제가 생겨 소변에 다량의 단백질이 배설되는 것을 가리킨다. 원래 빠져나가지 말아야 할 단백질이 혈관에서 소변으로 빠져나가는 이상 질환이다.

의사는 A 씨에게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는 소견을 내렸다. 하지만 A 씨는 회사에 복귀해 근무를 재개했다. 병세는 심해졌다. 결국 같은 해 12월 병가를 내고 병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기에 이르렀다. 건강이 쇠약해진 A 씨는 이듬해인 2015년 2월 폐렴으로 사망했다.

A 씨의 배우자는 근로복지공단에 산업 재해 보상보험법에 따라 유족 급여와 장의비 지급을 청구했다. 하지만 공단은 A 씨의 사망 원인이 된 질병이 업무와 관련한 병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며 급여 등을 지급하지 않기로 처분했다.

공단의 이 같은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던 A 씨 유족 측은 행정 소송을 냈다. 1심을 맡은 서울행정법원은 A 씨 유족 측의 손을 들어줬다. 공단의 유족 급여와 장의비 부지급 처분을 취소하라고 한 것이다.

1심 재판부는 질병의 주된 발생 원인이 업무 수행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더라도 업무상의 과로나 스트레스가 질병의 주요 발생 원인에 겹쳐 병세를 일으키거나 악화시켰다면 그 사이에 인과 관계가 있다고 봤다.

재판부는 “그 인과 관계는 반드시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입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며 “A 씨가 침상에서 안정을 취하며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도 계속 업무를 처리하던 중 업무와 휴직 처리, 상사와의 갈등 등 관련 스트레스에 노출되면서 상병이 자연 경과 이상으로 악화돼 사망에 이르게 됐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판시했다.

실제로 A 씨의 근무 기록에 따르면 그는 질병을 진단받았던 시기에 1주일 평균 61시간을 일했다. 그해 추석 직전에는 13일 동안 휴일 없이 하루 평균 11시간 이상 일했다. 입원 치료 기간 중에도 병원에 업무용 노트북을 가져와 일했다.

치료가 길어지면서 A 씨와 센터장 간 불화가 있다는 소문이 돌자 휴대전화 메모장과 수첩에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적어 놓거나 ‘산재 문의, 노동부 질의(인신공격)’와 같은 문구를 남기기도 했다.대법 “자연 진행 속도 넘었다면 업무 연관 있어”근로복지공단은 1심에 불복했다. 2심인 서울고등법원은 근로복지공단 측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보고 A 씨 유족 측에 급여와 장의비를 주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했다.

A 씨를 죽음에 이르게 한 질병은 업무상 과로나 스트레스와는 상관이 없다는 게 2심 재판부 판단의 근거였다.

재판부는 “대한의사협회에 사실을 조회한 결과 A 씨가 진단받은 막성 사구체신염의 발병 원인은 특별한 원인 없이 나타나는 ‘특발성’인 경우가 성인에게서 가장 많다”며 “이에 따라 A 씨 질병의 발생 원인을 알 수 없거나 혈액 내 존재하는 자가 항체에 의해 이 사건 질병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사망 직전에 진단받은 폐렴에 대해서도 유사한 판단을 내렸다. 의료 전문인들의 소견에 비춰 볼 때 과로 또는 스트레스 때문에 A 씨의 직접 사인인 폐렴이 발생했다고 볼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면역이 약해져 폐렴이 걸리는 과정을 두고서도 업무와의 연관성을 찾기 힘들다고 간주했다. “개인적인 신체적 요인이 기본적이고 주요한 원인”이라고 판시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 같은 판단을 다시 뒤집었다. 휴식이 필요한 질환을 가진 상태에서 장시간 근로 등으로 육체적·정신적 과로가 누적된 상황에 주목했다.

대법 재판부는 과학적 데이터에 집중했다. “대한의사협회의 사실 조회 회신에 따르면 A 씨의 상병은 매우 다양한 임상 경과를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면서도 “연구 결과에 비춰 볼 때 A 씨의 질환으로 진단받은 환자가 진단 후 3개월 이내에 사망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실제 한 일본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A 씨의 질병을 가진 사람 949명을 약 7년간 추적 관찰한 결과 이 기간 동안 사망한 환자의 비율은 4.3%였고 20년 이후에도 환자가 생존해 있는 비율은 90%를 넘었다. 이에 비춰 재판부는 “질병이 자연적인 진행 속도를 넘어 급격히 악화돼 합병증까지 발생, 사망에 이르렀다면 유족이 합당한 급여를 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A 씨가 의사의 소견을 따르지 않고 업무에 즉시 복귀한 것도 직장 내 업무 부담 때문이었다고 강조했다. 치료 기간 중 연가 처리 문제로 상사와의 불화 소문이 퍼져 스트레스를 받은 것도 업무와의 관련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게 요지였다. 이에 재판부는 “업무상 요인 외에는 이 사건 상병이 발병해 급격하게 악화될 만한 요인을 찾기 어렵다”며 2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돋보기] 행정법원 “출근길 교통사고도 산재”출근길에서 일어난 사고로 인해 사망했다면 유족들이 이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까. 대답은 ‘받을 수 있다’이다.

설령 자신의 차를 타고 직접 운전하던 중 교통사고가 났더라도 법원은 근로복지공단이 유족에게 유족 급여와 장의비를 지급해야 한다고 봤다. 반드시 업무상 부상이나 스트레스로 인해 사망에 이르지 않았더라도 보상받아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지난해 1월 서울행정법원은 2017년 11월 본인 소유의 화물차를 타고 출근하다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B 씨의 유족에게 공단이 유족 급여와 장의비를 지급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앞서 2016년 헌법재판소는 업무상 재해 범위를 ‘사업주가 제공한 교통수단이나 그에 준하는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등 사업주의 지배 관리하에서 출퇴근 중 발생한 사고’로 한정한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 제37조 제1항 제1호 다목이 헌법상 평등 원칙에 위배된다며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국회는 문제의 조항을 삭제하고 ‘통상적인 경로와 방법으로 출퇴근하는 중 발생한 사고’를 업무상 재해에 포함한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개정안엔 시행 일자를 2018년 1월 1일로 한다는 부칙이 포함됐다. 공단이 유족 급여와 장의비 지급을 거절한 것은 B 씨의 사망이 이 시행 일자에 앞섰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헌재는 2019년 산재보험법 개정안을 2018년부터 시행하기로 한 조항이 헌법에 불합치한다는 판단을 내린 바 있다. ‘산재보험법 개정안은 2016년 헌법 불합치 결정이 내려진 때로 소급 적용돼야 한다’고 명시한 것이다.

사고 당시 B 씨는 회사가 비용을 제공하는 숙소를 출발해 회사가 비용을 지원하는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회사 동료를 차에 태우고 출근하고 있었다.

해당 사건을 맡은 행정법원 재판부는 이 같은 상황을 언급하며 “B 씨가 자기 소유 차량을 이용한 것은 업무에 필요한 개인 공구를 운반할 목적도 있었다”면서 “B 씨를 업무상 재해 대상에서 배제한 공단의 결정은 위법하므로 취소돼야 한다”고 판결했다.

안효주 한국경제 기자 j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