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가 표준화 가장 앞서, 발효 시 법적 구속력…한국도 상반기 중 K택소노미 윤곽 나온다

[ESG 리뷰] 이슈
2015년 10월 마이클 혼 폭스바겐 미국법인 대표가 미국 하원에서 열린 폭스바겐의 디젤차량 배기가스 조작사건 관련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해 선서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5년 10월 마이클 혼 폭스바겐 미국법인 대표가 미국 하원에서 열린 폭스바겐의 디젤차량 배기가스 조작사건 관련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해 선서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의 환경 운동가 제이 웨스터벨트는 1983년 당시 피지섬의 한 호텔에서 메모 하나를 보게 된다. ‘환경 보호를 위해 수건을 재사용해 달라’는 내용과 함께 녹색 재활용 마크가 찍혀 있었다. 언뜻 보면 환경 보호를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제이 웨스터벨트는 호텔이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실질적인 일을 하지 않으면서 생색 내기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녹색으로 이미지를 세탁한다’는 뜻의 ‘그린 워싱’이란 단어를 꺼내 들었다.

2015년 폭스바겐의 ‘디젤 스캔들’과 같이 무늬만 환경인 그린 워싱은 기업에 막대한 피해를 안기기도 한다. 글로벌 친환경 컨설팅 기업인 캐나다 테라초이스는 기업의 그린 워싱을 7개로 유형화했다. 친환경적 속성에 초점을 맞춰 홍보하지만 다른 속성이 미치는 전체적인 환경 여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상충 효과 감추기’, 내용은 친환경이 아니면서 재활용되는 용기에 담아 친환경 제품이라고 표기하는 ‘모호한 주장’, 유사 이미지를 부착해 인증 제품인 것처럼 위장하는 ‘부적절한 인증 라벨’ 등이 대표적인 그린 워싱이다.

그린 워싱을 방지하고 기업의 투명성을 강화하기 위한 국제적 노력은 유럽연합(EU)을 중심으로 가속화되고 있다.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관련 규제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제도화되고 있다. EU는 2014년 기업의 ESG 정보 공개를 의무화하는 비재무 정보 보고 지침(NFRD)을 제정했다. 지난 3월에는 지속 가능 금융 공시 제도(SFDR)가 나왔다. 자산 운용사는 투자 결정 과정에서 지속 가능성을 분류해 공개해야 한다. 한편 환경·인권에 대한 공급망 실사도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규제의 근간에는 녹색 분류 체계인 택소노미(taxonomy)가 있다. 2020년 EU에서 택소노미 초안이 마련됐고 2022년 공식 사용될 예정이다.
무늬만 ‘친환경’ 걸러낸다...ESG 공시·녹색 금융의 기준 ‘택소노미’
무엇이 녹색이고, ESG인가?

택소노미는 ‘무엇이 녹색이고 무엇이 ESG인가’에 대한 답이다. 환경적으로 지속 가능한 경제 활동을 업종에 따라 정의하고 판별하는 분류 체계다. 그린 워싱을 막고 지속 가능한 경제 활동에 자금이 흘러가는 것을 촉진하기 위해 마련됐다. EU 집행위원회는 2018년 3월 ‘지속 가능 금융 행동 계획’을 발표하며 ESG 제도의 재정비를 선언했다. 그중 첫째 액션 플랜이 택소노미에 해당한다.

택소노미는 녹색 금융과 저탄소 사회 전환의 출발점으로 통한다. 세계은행은 녹색 금융 분류 체계의 주체와 용도에 대해 정리한 바 있다. 녹색 금융을 판별하기 위한 택소노미는 은행과 금융회사, 투자자와 금융 감독 기관, 녹색 채권 발행자, 정책 입안자 등 다양한 주체를 대상으로 한다.

주요 국가와 기관은 녹색 경제 활동을 규정하는 분류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EU는 지속 가능 금융 행동 계획 발표 이후 2020년 3월 지속가능 금융에 관한 기술 전문가 그룹(TEF)이 택소노미 개발을 위한 권고 사항을 담은 보고서를 발표했다. 또 기후 변화 이니셔티브(CBI)의 기후 채권 택소노미, 국제표준기구(ISO)의 녹색 융자 택소노미가 있고 중국과 일본에서도 국가 단위의 분류 체계를 비교 분석하고 있다.

그중 EU 택소노미는 가장 먼저 만들어져 표준화됐다. 유사한 분류 체계 중 가장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내용을 포함하는 것이 특징이다. 임소영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다른 택소노미는 녹색 채권 발행과 같이 구체적인 목적을 두고 있는 경우가 있는 반면 EU 택소노미는 전체 산업을 포괄하고 종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며 “유럽 그린딜의 포괄적이고 지속 가능한 경제 개혁서 중요한 조력자 역할을 하며 기업과 산업의 활동을 이끌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ISO 택소노미가 구속력을 갖지 않은 데 반해 EU 택소노미는 규정(regulation) 법규라는 특징이 있다. 규정은 법적 구속력을 가지며 발효되는 순간 모든 회원국에 직접 적용된다. 국내법으로 전환하지 않더라도 모든 EU 국가에서 동일한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금융 분야에서 SFDR 규정과 연동돼 대표적인 글로벌 녹색 지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현영 사단법인 두루 변호사는 “임의적인 판단이 아니라 녹색 분류 체계의 기준에 따라 비재무 정보를 공시하면서 두 규정이 맞물려 파급 효과를 낼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무늬만 ‘친환경’ 걸러낸다...ESG 공시·녹색 금융의 기준 ‘택소노미’
EU 택소노미의 특징과 쟁점

EU 택소노미는 크게 6대 환경 목표와 4대 판단 조건으로 구조를 이루고 있다. 먼저 환경 목표에선 기후 변화 리스크 완화, 기후 변화 리스크 적응, 수자원과 해양 생태계 보호, 순환 경제로의 전환, 오염 물질 방지와 관리, 생물 다양성과 생태계 복원 등 6대 분야로 산업을 구분한다. 4대 판단 조건은 성과 기준에 해당한다. 6대 환경 목표 중 하나 이상에 상당 수준 기여하면서 나머지 환경 목표들에 대해 중대한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 또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다국적 기업 가이드라인이나 유엔 기업과 인권에 관한 지침 원칙과 같은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장치를 준수해야 한다. 이와 함께 기술 선별 기준(TSC)에 부합할 것을 요구한다. 이 조건을 동시에 충족해야 한다.

특히 둘째 조건인 다른 환경 목표에 중대한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DNSH(Do No Significant Harm) 단서가 기업들에는 부담으로 다가온다. 6대 환경 목표 중 하나를 상당 수준 충족하더라도 나머지 5가지 영역에서 악영향을 끼치지 않아야 한다. 기후 변화 대응 기술이라면 기후 변화 완화, 순환 경제, 수자원 등을 고려해야 한다. 실질적 기여보다 DNSH 기준이 더 많아지는 셈이다. 여기에 각 분야별로 기술 선별 조건을 따지면서 “EU 택소노미는 너무 어렵다”는 반응이 나온다. 책임 투자 원칙(PRI)은 EU 택소노미를 분석하는 보고서를 내면서 펀드 적용 시 문제점을 지적하며 DNSH의 숫자가 많아 주객이 전도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또한 펀드나 채권 등에 필요한 프로젝트별 정보가 부족한 점에서 명확한 평가가 어렵다는 의견을 전했다.

6대 환경 목표 중 핵심은 기후 변화에 있다. 현재 기후 변화 리스크 완화, 기후 변화 리스크 적응 등 2가지 영역에 대해서만 세부 지침이 나온 상태다. 지난해 기술 문건이 초안으로 나온 데 이어 지난 4월 21일 2가지 환경 목표에 대한 법안 초안이 EU 집행위원회에서 채택돼 발표됐다. 유럽 의회와 이사회에서 동의하거나 반대하지 않으면 법률로서 발효하게 된다. 여기서는 특히 원전과 천연가스가 논란이 됐다. 택소노미에서 배제되면 미래 지속 가능성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만큼 기후 변화 완화는 각 산업별로 이슈가 첨예하게 대립한다. 원자력은 지난해 택소노미에 포함하는 방향의 보고서가 나와 기대를 모았지만 천연가스와 함께 결정이 유보됐다. 또한 농업은 유보됐고 바이오 에너지는 기준을 좀 더 검토하기로 했다.

EU 택소노미는 채권을 발행하는 금융회사뿐만 아니라 기업들에도 실질적인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EU 관내 일반 기업들도 택소노미에 따라 환경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활동이 전체 매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의무적으로 공시하는 방안이 법안에 명시되면서다. 친환경 산업으로 자금 유입을 가속화하면서 기업들은 비즈니스 포트폴리오 전략을 고심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향후 관전 포인트는 6월 발표되는 탄소 국경 조정세와의 연계 가능성이다. 그 기준에 택소노미가 활용될 가능성이 높게 제기된다. 임대웅 UNEP FI 한국대표는 “구체적인 기준이 제시되면서 충족하지 못하면 낙인 효과가 생기지 않을까 우려된다”며 “금융 상품과 공시를 넘어 무역까지 영향력이 확산될 수 있다”이라고 말했다.

한국도 올 상반기 중 ‘K택소노미(한국형 산업 분류 체계)’ 수립을 예고하고 있다. 각계의 의견 수렴을 거쳐 6월 중 공개할 예정이다. 한 금융 전문가는 "현재의 투자 기준 등을 보면 자동차의 핸들을 만들어 납품하는 중소기업은 가솔린 차에 납품하면 반녹색 기업이 되고 수소 차에 납품하면 녹색 기업이 될 수 있다"며 "이 부분에 대해 다같이 고민할 수 있는 투자의 분류 기준이 하루빨리 마련돼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K택소노미는 EU 택소노미를 참고하면서도 적용성 관점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법률적 해석과 기술적 대응이 필요한 사안인 만큼 K택소노미는 쉽게 도입해 점차 수준을 높여 가는 형태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 업계 관계자는 “온실가스 감축 기준은 EU 택소노미가 글로벌하게 수렴될 것으로 보이지만 DNSH는 자국법에 해당하는 만큼 국내 환경법을 따라야 한다”면서 “대기 오염 등 일부 법률은 한국이 EU보다 더 강력해 무조건 EU 택소노미와 일부 충돌하도록 제정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향후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방안이다.

택소노미가 무역 장벽으로 작용할 우려가 나오는 가운데 한국 기업들에는 위기이자 곧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전망에도 힘이 실린다. 한국 기업들은 배출권 거래제에 2015년부터 대응하면서 온실가스를 줄이는 노력을 다각도로 해왔다. 반면 중국 등 추격자들은 높은 기준을 충족하기에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현주 기자 char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