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내용까지 심사하는 채점제 도입…남미도 통신 속도 개선 등 모바일 환경 개선
[비즈니스 포커스] ‘판호’는 중국 정부의 콘텐츠 심사를 통과해야 받을 수 있는 고유 식별 번호(ISBN)로, 중국 내 게임 유통 허가증의 역할을 한다. 그런데 판호 발급이 2017년 이후 꽉 막혀 버렸다. 중국이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 보복으로 한국 게임에 대한 판호를 사실상 주지 않고 있는 것이다.지난해 연말부터 두 개의 게임이 판호를 발급받으며 상황이 바뀔 것이란 기대감이 조심스레 생겨났다. 하지만 최근 중국이 새로운 채점 제도를 시행하면서 판호 발급이 더 어려워질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급격히 성장 중인 중국 게임 시장은 한국 게임업계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시장이다. 여기에 중국 수출이 주춤한 틈새를 타 한국 게임 시장에서 중국 게임의 영향력이 높아진다는 점도 우려할 만한 요소다.
내자 판호도, 중소기업도…막막해진 中 진출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은 4월 21일 ‘위클리 글로벌’에서 중국이 판호를 위해 새로 도입한 ‘게임 심사 채점제’를 소개했다.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 선전부는 지난 3월 ‘게임 심사 채점 세칙’ 문서를 배포했고 중국은 4월 1일부터 새로운 채점 제도를 시행해 판호 검사를 진행해 왔다. 게임 심사 채점제는 게임이 최종 심사를 마친 후 심사에 참여한 전문가들이 해당 게임에 대해 점수를 매기는 것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채점된 점수가 판호 획득에 영향을 주고 3점 이상을 받아야 판호 승인이 될 수 있고 동일 조건에는 4점 또는 4점 이상의 게임을 우선순위로 승인한다고 밝혔다.
게임 심사 채점제는 ‘관념 지향’, ‘원조 창작’, ‘제작 품질’, ‘문화적 의미’, ‘개발 정도’ 등 5가지 항목에 대해 채점하고 5개의 점수를 종합해 최종 점수를 계산한다. 이 중 ‘관념 지향’은 게임 주제, 플레이어의 역할, 메인 플레이 방식 등이 사회주의 핵심 가치관에 부합하는지 심사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러한 심사 기준에 따라 2017년 이후 사실상 빗장이 잠겼던 중국 게임 수출이 더 어려워질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중국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게임 내 사회주의 가치관과 중국 문화를 알리는 요소를 집어넣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바뀐 채점 방식으로 단 한 가지 항목에서 0점을 받으면 ‘탈락’되기 때문에 사실상 모든 기준을 충족해야만 판호를 받을 수 있다.
한국은 2014~2016년 중국에 48개의 게임을 수출했지만 2017년 3월 이후부터 단 한 건도 수출하지 못했다. 그 후 지난해 컴투스의 ‘서머즈워 : 천공의아레나’가 판호를 발급받은 것에 이어 올해 2월 한국 게임 개발사 핸드메이드가 만든 모바일 게임 ‘룸즈 : 풀리지 않는 퍼즐’이 판호를 발급받았다. 이에 따라 올 초만 해도 한국 게임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는 것 아니냐는 조심스러운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운 채점 제도 소식이 전해지자 향후 게임의 중국 수출이 더 어려워질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전문가들도 판호 발급의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다. 이미 중국의 ‘문화판 동북공정’이 진행됐고 판호 심사 수정은 한국 기업엔 악재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한국게임학회장을 맡고 있는 위정현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는 “판호 발급은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여기에 ‘내자 판호’ 또한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판호는 중국 내 회사가 신청하는 내자 판호와 외국 기업이 대상인 외자 판호로 구분된다. 내자 판호를 발급받을 때 중국은 게임의 지식재산권(IP)이 한국산인지 아닌지 확인하곤 했다.
위정현 교수는 “과거에는 한국 IP를 갖고 중국 개발자들이 개발하는 것을 크게 제재하지 않았는데 최근엔 내자 판호에서도 엄격하게 확인하고 있다”며 “실제로 게임이 중국 내에서 완전하게 개발된 것인지 엄밀히 보고 있어 과거보다 판호 발급이 더 어려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새로운 채점제는 중소 게임사들엔 큰 타격이 될 것으로 보인다. 대기업은 해외 시장 전담 마케터를 통해 해외 진출에 대응하지만 중소 게임사들은 그러한 여력도 없다. 김정태 동양대 게임학부 교수는 “중소 게임사들의 중국 진출이 더 힘들어지는 상황”이라며 “이미 한한령 때문에 중국 시장을 포기하고 전략적 수정에 들어간 중소 게임사들이 많다”고 말했다.
과거와 확연히 달라진 중국 게임의 질
지난해 게임사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팬데믹(세계적 유행)으로 인한 언택트(비대면) 산업의 성장으로 큰 수혜를 봤다. 하지만 증권가에서는 게임업계의 실적이 이미 최고점을 지나 매출과 이익이 정체됐다고 판단한다. 2010년대 초 모바일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이 성장하던 시기가 게임업계 업황의 절정이었다는 것이다. 엔씨소프트와 넷마블 등 주요 게임사들도 MMORPG가 흥행하던 2016~2017년 성장 속도가 가장 빨랐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더 늦기 전에 한국 게임사들은 새로운 시장에 눈을 돌려야 할 필요성이 커진다. 한국 게임사들은 중국 외에도 해외 법인, 해외 퍼블리셔들과의 협업 등을 통해 다양한 시장에 진출해 왔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 시장의 비율이 높은 편이다. 지난해 연간 매출액 2조원을 돌파한 엔씨소프트의 매출액을 지역별로 살펴 보면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은 여전히 한국이었다. 엔씨소프트에 따르면 지역별 매출액은 한국 2조130억원, 북미·유럽 944억원, 일본 548억원, 대만 359억원으로 집계됐다.
대체 시장으로 꼽히는 곳은 동남아와 남미 등이다. 특히 동남아는 ‘한류 열풍’을 기반으로 게임 IP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망 시장으로 꼽힌다. 실제로 동남아는 최근 한국 게임 기업들이 심혈을 기울이는 시장이기도 하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간한 ‘2020 대한민국 게임백서’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 게임의 주요 수출 국가 비율에서 중국(40.6%) 다음으로 높은 지역은 동남아(11.2%)였다. 그 뒤를 이어 일본(10.3%), 대만(9.8%), 북미(9.1%)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김정태 교수는 “동남아 중에서도 한국 정서가 어우러지는 베트남·태국·말레이시아 등을 주목해야 한다”며 “남미는 그간 환경이 받쳐주지 않았지만 5세대 이동통신(5G) 시대의 돌입과 롱텀에볼루션(LTE) 속도가 빨리지면서 공략할 만한 곳이 됐다”고 설명했다. 또 유럽 중에서는 한국 게이머들처럼 ‘득템’에 관심이 많은 성취가형 게이머들이 많은 독일을 유망 시장으로 꼽았다.
한편 판호 사태를 계기로 중국 게임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꿔야만 한다는 의견도 있다. 중국 게임은 이미 침투 수준을 넘어 2010년대 들어 한국 시장에서 대등하게 경쟁하고 있다. 일부 게임들은 한국 게임에 견줘 봐도 그래픽이나 프로그램적인 완성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다. 중국 게임의 수준이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졌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게임업계에서도 신규 게임을 만드는 것과 함께 외국 게임을 한국어에 접목해 퍼블리싱하는 것이 활발해졌다. 즉 게임의 국적을 따지기보다 이미 ‘무한 경쟁 체제’에 돌입한 지 오래라는 것이다. 김정태 교수는 “내부적으로 게임사들도 콘텐츠 다변화와 디테일에 초점을 맞춰야 하고 외부적으로는 중국 시장을 뚫기만 하면 노다지가 펼쳐질 것이라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명지 기자 mj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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