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밥 붐에 지난해 식기세척기 판매 276% 증가…새 수요 만들며 TV·냉장고 등 제치고 성장 주역으로

[스페셜 리포트]
약 21조원. 글로벌 시장 조사 업체 Gfk가 조사한 지난해 한국의 가전 시장 규모다. 전년(18조5000억원) 대비 약 14% 커져 20조원을 넘어섰다. 흥미로운 것은 시장의 성장을 주도하는 제품들이 이전과는 크게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과거엔 TV·냉장고·세탁기·에어컨 등과 같은 소수의 ‘백색 가전’이 시장의 판을 키우는 주요 품목들이었다.

최근에는 달라졌다. 식기세척기·의류관리기·로봇청소기 등 소비자들에게 새롭게 인기를 끌기 시작한 가전제품들의 판매량이 급증하면서 전체 시장의 성장을 견인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삶의 질을 높여 주는 ‘신(新)가전 전성시대’다
.
삶의 질 ‘업그레이드’…신가전 전성시대
지난해 한국 가전 시장은 이례적으로 두 자릿수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한층 진보된 기술로 재탄생한 백색 가전의 선방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소비자 니즈를 충족시키는 다양한 신가전들이 인기를 끈 것이 주된 요인으로 꼽힌다.

김윤태 Gfk 가전담당 부장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 따른 ‘집콕’ 현상과 갈수록 심해지는 미세먼지 문제로 ‘편리함’과 ‘위생’이라는 새 트렌드가 나타났다”며 “여기에 부합하는 신가전들이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아 높은 판매량을 기록한 것이 시장의 고성장을 이끌었다”고 진단했다.

한 가전업계 관계자 역시 “집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진 가운데 ‘삶의 질’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하는 도구로 신가전이 부각되고 있다”며 최근의 시장 흐름을 짚었다.

신가전이 잘 팔리면서 모처럼 시장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성장의 한계를 보였던 가전업계도 신성장 동력을 마련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평가다.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최근 가전 부문에서 좋은 실적을 거둘 수 있었던 것도 신가전의 ‘힘’이 컸다.
식기세척기 시장 폭풍 성장신가전 중에서도 가장 빠르게 시장 규모를 확대하고 있는 대표 제품으로는 단연 식기세척기를 꼽을 수 있다.

수치로도 나타난다. 롯데하이마트에 따르면 지난해 식기세척기 매출액은 신가전 중 가장 돋보였다. 전년 대비 약 150% 정도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Gfk가 직접 온·오프라인 채널에서의 가전제품 매출 추이를 조사한 결과도 비슷하다. 식기세척기 매출액 성장률은 276%로 집계돼 주요 제품군 가운데 1위에 올랐다.
식기세척기는 지난해 가장 많이 팔린 신가전이다.
식기세척기는 지난해 가장 많이 팔린 신가전이다.
식기세척기가 폭발적인 성장을 보이는 이유는 간명하다. 집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늘면서 대세가 된 것이 ‘집밥’이다.

끼니를 해결할 때마다 설거지가 쌓여 갈 수밖에 없다. 가사 노동에 지친 소비자들이 결국 가사 노동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식기세척기를 구매한 것으로 풀이된다. 물론 여기에 기술력의 진보도 한몫했다는 설명이다.

사실 식기세척기는 역사가 오래된 가전제품이다. 이미 1990년대 미국과 유럽 등 해외 국가에서는 식기세척기가 널리 보급됐다. 한국 시장에도 2000년대부터 해외 기업의 제품들이 수입돼 판매됐다. 하지만 대중화에는 실패했다. 가장 큰 문제는 서구권 국가들과의 ‘식문화’ 차이에 따른 세척력이었다.

이를테면 서구권 국가들은 주로 편평한 접시에 음식을 담아 먹는다. 반면 밥과 국이 주식인 한국은 다르다.

오목한 형태의 공기를 사용하다 보니 식기세척기를 사용해도 구석구석 음식 찌꺼기가 제거되지 않는 경우가 빈번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과거 고급 빌라나 아파트에선 빌트인 형태로 수입산 식기세척기가 주방에 들어갔지만 공기가 잘 닦이지 않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국 식기세척기를 그릇을 보관하는 ‘수납장’ 정도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향상된 기술력을 접목해 등장한 제품들이 출시되면서 이런 불만들을 단숨에 잠재웠다. 삼성전자·LG전자·SK매직 등은 연구·개발(R&D)을 통해 기존의 제품들보다 세척력이 훨씬 뛰어난 제품을 내놓는 데 성공했다.

소비자들도 빠르게 반응했다.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대략 2018년 정도부터 식기세척기를 구매하는 소비자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사라질 뻔했던 시장이 다시 태동기에 접어든 것이다. 그리고 지난해 코로나19의 수혜를 톡톡히 누리며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
삶의 질 ‘업그레이드’…신가전 전성시대
한 업계 관계자는 “최근 들어서는 신혼부부들이 반드시 구매해야 하는 가전 중 하나로까지 식기세척기가 손꼽히고 있어 계속해 시장 규모가 커질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흥행이 시작된 지가 얼마 되지 않아 아직까지 식기세척기의 보급률은 10%대 미만인 것으로 추정돼 이 같은 전망에 더욱 힘이 실린다.

이런 식기세척기와 함께 신가전 ‘쌍두마차’라고 불릴 정도로 의류관리기도 요즘 잘 팔린다. 의류관리기의 역사도 식기세척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꽤 오래됐다.

2011년 LG전자가 ‘스타일러’ 제품을 출시하며 포문을 열었다. 매일 빨 수 없는 옷을 깨끗하고 쾌적하게 관리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무려 9년 동안 R&D에 집중하며 선보인 야심작이었다. AI 업그레이드 된 로봇청소기 각광 출시 초기만 하더라도 시장의 반응은 차가웠다. 100만원이 넘는 가격에 세탁소를 완벽하게 대체할 제품도 아니어서 ‘굳이 비싼 돈을 주고 살 필요가 있느냐’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LG전자의 의류관리기 '트롬 스타일러'. 경쟁사들 보다 한발 앞서 의류관리기를 출시하며 시장을 선점했다.
LG전자의 의류관리기 '트롬 스타일러'. 경쟁사들 보다 한발 앞서 의류관리기를 출시하며 시장을 선점했다.
소비자들의 생각이 변화하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미세먼지였다. 해를 거듭할수록 미세먼지 문제가 심각해지는 가운데 스타일러가 외출 시 옷에 묻은 보이지 않는 미세먼지를 제거하는 데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이에 힘입어 맥을 못 추던 스타일러 판매도 서서히 늘어났고 LG전자는 2015년 더 개선된 성능을 가진 2세대 모델을 선보였다.

점차 시장이 커질 조짐을 보이자 경쟁사들도 가만있지 않았다. 삼성전자와 코웨이 역시 만반의 준비 끝에 2018년 의류관리기 제품을 내놓으며 시장의 판을 키웠다.
삼성전자의 로봇청소기 ‘비스포크 제트 봇 AI’. 자율주행 자동차에 활용되는 라이
다(LiDAR) 센서를 탑재했다.
삼성전자의 로봇청소기 ‘비스포크 제트 봇 AI’. 자율주행 자동차에 활용되는 라이 다(LiDAR) 센서를 탑재했다.
당시 삼성전자는 ‘에어드레서’를 선보이면서 “앞으로 이 시장이 폭발적으로 커질 것”이라고 출시 배경을 밝히기도 했는데 결국 그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지난해 의류관리기의 연간 판매량은 50만 대를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의류관리기 대당 가격을 약 100만원이라고 예상하면 시장 규모는 최소 5000억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청소기도 신가전 열풍에 힘입어 다시 한 번 주목받고 있다. 유선 청소기에서 무선 청소기로 전환되는가 싶더니 최근에는 로봇청소기가 대세로 떠오르는 모습이다.

이런 변화를 주도하는 것은 역시 삼성전자와 LG전자다. LG전자는 지난해 로봇청소기 ‘LG 코드제로 M9 씽큐’를 출시했다. 기존 로봇청소기와 달리 주행용 바퀴 대신 물걸레를 달았다.

2개의 물걸레가 회전하며 바닥을 닦으며 이동하는 신개념 로봇청소기다. 70만 장의 사물 이미지를 사전에 학습한 인공지능(AI) 딥러닝 기술을 통해 집 구조를 스스로 파악하는 것도 강점이라는 설명이다.

여기에 맞서 삼성전자는 올해 강화된 AI를 탑재한 ‘비스포크 제트 봇 AI’를 출시했다. 자율주행 자동차에 활용되는 라이다(LiDAR) 센서를 탑재한 것이 특징이다. 주변 공간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장애물을 피해 집 안 구석구석을 청소해 준다.

한 업계 관계자는 “기술의 발전으로 그동안 사용하는데 다소 불편함을 느꼈던 로봇청소기의 성능이 향상됐다”며 “무선 청소기가 최근 인기를 끌었던 청소기 시장에도 큰 변화가 예상된다”고 말했다.

신가전 시장 선점 경쟁도 치열“언제 어떤 계기를 통해 새로운 가전제품이 뜰지 예측하기 어렵다.” 한 업계 관계자는 앞으로 새롭게 뜨는 신가전이 과연 무엇이 될지 묻는 질문에 이같이 답변했다. 다만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신가전의 경우 먼저 시장에 진출하는 기업이 선점 효과를 누릴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기업들이 그간 쌓은 기술력을 활용해 소비자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제품들을 속속 선보이기 시작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으로 풀이된다.

LG전자의 캡슐 맥주 제조기 ‘LG 홈브루’가 좋은 예다. 캡슐 커피 머신이 대중화된 것처럼 수제 맥주 역시 머지않아 많은 이들이 집에서 즐기게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판단에 따라 선보인 제품이다. LG전자는 홈브루의 정확한 판매 수치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다만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판매량이 전년 대비 크게 늘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는 최근 신발관리기 ‘비스포크 슈드레서’를 출시했다. 의류관리기처럼 신발의 냄새와 보이지 않는 세균들을 제거해 깔끔하게 관리해 주는 제품이다.
삼성전자가 최근 선보인 신발관리기 ‘슈드레서’. LG전자도 곧 신발관리기를 선보일 예정이다.
삼성전자가 최근 선보인 신발관리기 ‘슈드레서’. LG전자도 곧 신발관리기를 선보일 예정이다.
의류관리기 시장에서 선점 효과를 톡톡히 누리는 LG전자를 의식해 한 발 먼저 제품을 출시했다는 분석이다. 앞서 LG전자 역시 신발관리기 출시를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집에서 채소를 직접 키워 먹을 수 있는 식물재배기도 최근 많은 기업들이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눈독을 들이는 분야다. LG전자와 SK매직은 올해 관련 제품 출시 할 것이라고 예고한 바 있다.


▶돋보기
김치냉장고부터 의류건조기까지…시대에 따라 바뀐 신가전
삶의 질 ‘업그레이드’…신가전 전성시대
‘신가전’은 소비자들에게 큰 인기를 얻으며 기존에 없던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제품들을 일컫는다. 시대별로 그 의미가 계속 변화한 것이 특징이다. 이를테면 지금은 연간 100만 대 이상이 팔려 나가며 ‘필수 가전’이 된 김치냉장고와 공기청정기도 한때는 신가전으로 불렸었다.

김치냉장고는 1990년대를 대표하는 히트 상품이자 신가전이었다.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진동하는 김치 냄새가 고민이었던 소비자들을 겨냥해 나온 것이 바로 김치냉장고다. 출시 초기에는 판매량이 저조했지만 실제로 사용해 본 사람들이 체감한 ‘효과’가 어느 순간 빠르게 입소문을 타며 불티나게 팔려 나가기 시작했다.

현재는 김치를 좋아하는 한국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가전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시장 규모만 2조원에 육박한다.

2010년대에는 공기청정기가 있었다. 뒤늦게 빛을 본 사례로 꼽힌다. 가정용 공기청정기가 시중에 본격적으로 판매된 시기는 2000년대 초반이다. 하지만 오랜 기간 동안 소비자들에게 큰 반응을 얻지 못했다. ‘공기 질’에 대한 관심도가 크지 않았던 것이 이유였다.

반전의 계기가 마련된 것은 2010년께부터다. 미세먼지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것이 배경으로 작용하며 공기청정기 구매 붐이 일었다. 이제는 공기청정기를 갖고 있지 않은 가정을 쉽게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김치냉장고와 마찬가지로 공기청정기 역시 이제는 신가전이 아닌 필수 가전으로 분류된다. 연간 300만 대 이상이 팔려 나가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의류건조기가 필수 가전 대열에 합류했다. 2016년 연간 10만 대 판매에 불과했던 의류건조기는 지난해 150만 대가 넘는 판매량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의류건조기 역시 공기청정기와 마찬가지로 미세먼지의 심각성이 판매가 늘어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한 업계 관계자는 “미세먼지 증가로 바깥 공기가 통풍이 잘되게 해 빨래를 말리는 것을 찝찝해 하는 소비자들이 늘어난 것이 의류건조기의 판매 증가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김정우 기자 enyo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