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초 비트코인 법정화폐 채택 법안 통과…
갱단에 상납 피한 최선의 선택지이자 장기적 우상향 확신의 결과

[비트코인 A to Z]
'비트코인을 받는다'는 현수막을 붙여놓은 엘살바도르의 한 상점. 로이터연합뉴스
'비트코인을 받는다'는 현수막을 붙여놓은 엘살바도르의 한 상점. 로이터연합뉴스
6월 초 엘살바도르가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채택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언론들은 엘살바도르가 작은 나라이고 국제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이유를 들어 의미를 축소했다. 나입 부켈레 엘살바도르 대통령이 비트코인을 법정 통화로 활성화하기 위해 필요한 설비를 확충하기 위해 세계은행에 요청한 자금 지원이 거절당했고 국제통화기금(IMF)이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사용하면 법적인 문제를 비롯해 여러 가지 충돌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냈다는 사실만 크게 부각됐다.

초창기 비트코이너들은 비트코인이 발명된 이유가 사하라 남쪽의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남미와 같이 국민 다수가 금융 서비스에 접근하지 못하는 사회를 위해서라고 믿었다. 즉 성인의 70%가 은행 계좌가 없는 엘살바도르가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채택한 사건은 비트코인 발명 12년 만의 역사적인 쾌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비트코이너들조차 가격이 불안정한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삼는 것은 아무래도 시기상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엘살바도르는 매우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다. 부켈레 대통령의 돌발 행동도 이런 특수한 조건을 고려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격 불안정에도 법정화폐 채택, 왜?

엘살바도르는 오랜 내전에 이어진 조폭들의 발흥으로 정상적인 상태와 거리가 먼 사회다. 내전은 30년 전에 봉합됐지만 평화의 대가는 정부의 기능 장애였다. 서로 잔인하게 잡아 죽이던 적들이 같은 정부에서 일하는 처지에 놓였다. 경찰의 20%는 우익 군부 출신들, 20%는 좌익 게릴라 출신들의 몫으로 할당됐다. 오래 지속된 잔인한 전쟁 중에 쌓인 씻어 내기 어려운 앙금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공동의 과업을 이루는 것은 애초에 기대하기 어려웠다.

정부가 무기력에 빠져 있는 동안 급속하게 세를 확장한 것이 폭력단들이다. 미국의 뒷골목과 교도소에서 단련된 뒤 엘살바도르로 추방된 이들은 천적이 없는 초원에 방목된 맹수처럼 번성했다. MS13과 18번가(Barrio 18)가 대표적이다. 다국적 조폭들의 성숙한 생태계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지하 세계에서도 마체타라는 긴 칼로 상대를 난도질하는 것 때문에 마피아조차 이들과의 조우를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엘살바도르를 내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었던 양대 정당들은 선거판에까지 갱들을 끌어들였다. 골목을 지배하는 것이 이들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었다. 갱들은 자기 영역의 시민들이 경쟁 조직의 영역에 넘어갔다 오면 간첩 행위를 했다고 간주해 살해한다. 10명 중 단 한 명만 살해해도 공포가 미치는 영향력은 막강하다. 갱들은 자신과 손잡은 정당을 밀기 위해 자기 구역의 시민들이 상대 당 선거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원천 봉쇄할 수 있었다.

갱과 뒷거래하고 정권을 잡은 후 태도를 바꿔 범죄와의 전쟁을 벌인 적도 있다. 그러자 교도소에 수감된 갱의 보스가 버스 운행을 중지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명령을 어긴 버스 운전사는 살해 당했다. 심지어 승객과 함께 버스를 불태우기도 했다. 정부는 물밑에서 보스들과 평화 협정을 추진했다. 비록 공식적인 협정은 아니었지만 정부는 보스들을 보다 편안하고 외부와 수시로 소통할 수 있는 교도소로 옮겼다. 갱은 뒷거래의 대가로 살인율을 파격적으로 낮췄다. 갱들은 정치적 거래의 기술을 습득했고 뭔가를 얻어내고 싶으면 살인율을 높여 정부에 타격을 가했다.

600만 명의 나라에서 6만 명이 갱단의 조직원이라는 통계가 말해주듯 폭력단의 영향력은 사회 깊숙이 침투해 있다. 특히 학교는 이들이 새로운 조직원을 발굴하고 단련시키는 텃밭이다. 어린 나이에 갱단의 일원이 되면 또래 친구들의 대접이 달라진다. 그만큼 불우한 가정에서 학대 받는 아이들이 또래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돼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갱단에 가입할 확률이 높다. 갱단의 조직원이 점찍은 여학생에게는 누구도 접근할 수 없게 된다. 한 번 갱단에 가입하면 벗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갱단과 엮이면 선택지는 미국으로 탈출하는 것뿐이다.

불법으로 국경을 넘기 위해서는 코요테라고 불리는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때 지불하는 돈의 3분의 1 정도가 갱들에게 상납된다. 갱에게 시달려 국외로 탈출하는데 그 수수료의 일부를 갱들이 갈취하는 시스템이다. 미국으로 이주한 이들이 엘살바도르의 가족들에게 송금하는 금액이 국내총생산(GDP)의 20%가 넘는데 갱들의 마수는 여기에도 미친다. 마을마다 심어 놓은 조직원이 미국으로 월경한 가족이 있다는 사정을 이미 파악하고 있다가 상납금을 통보하면 그만이다.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채택하면 미국에 있는 가족이 비트코인으로 보낼 수 있다. 부켈레 대통령은 200만 명에 달하는 이주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 송금 수수료를 아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한들 갱들의 집요한 갈취를 피할 수는 없다. 갱들은 구체적인 대상을 지목하고 살해 협박하는 가장 원초적인 수단을 사용하기 때문에 절세하는 기술 따위로 기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부켈레 대통령은 수도권 도시들의 시장직을 통해 정치적 자본을 축적했다. 30대였던 그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소통에 능하며 이벤트를 터뜨려 화제의 중심이 되는 것을 선호한다. 양당 구도를 깨고 대통령에 당선될 만큼 국민적 지지를 받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경제 성장은 그의 임기가 시작된 2019년 이후 하락세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코로나19 마비 상황에서 국민을 구난하기 위해 취한 파격적인 조치 때문에 지지도는 오히려 올라갔다. 갱단과 뒷거래해 살인율을 낮췄다는 언론 기사에도 정면으로 대응하는 식인데 감옥의 폭력 단원들을 알몸으로 포개 놓은 사진을 유포했다. 당시 코로나19의 팬데믹(세계적 유행)으로 온 세계가 접촉에 민감한 시기였기에 전 세계 언론은 그 사진에 경악했다. 비트코인 법정화폐도 실질적인 경제 지표가 국민의 기대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선을 돌리기 위한 정치적 꼼수일 수도 있다. 그 덕분에 그는 자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 미디어의 주목을 받는데 일단 성공했다.
엘살바도르의 ‘비트코인 법정화폐’ 실험…“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라”[비트코인 A to Z]
우상향 확신에 기댄 어려운 도박

아무리 정치적인 이벤트라고 할지라도 대통령 스스로 비트코인이 장기적으로 우상향한다는 확신이 없다면 선택하기 어려운 도박이었을 것이다. 사용하고 휴대전화에 남은 비트코인 가격이 오르게 되면 오늘보다 내일 재산이 늘어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게 된다. 우상향한다면 평균적으로 경험하게 될 일이다. 사소하지만 문턱이 낮아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긍정적 자극이 엘살바도르 청년들에게는 결정적인 처방이 될 수 있다. 대통령이 단기적으로 노리는 것은 어쩌면 내일의 더 나은 가치를 위해 오늘을 참고 인내해야 한다는 진부한 미덕조차 SNS에 자랑할 수 있는 시각적인 이벤트로 눈앞에 펼쳐 놓는 것인지 모른다.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범죄와의 전쟁과 같은 강경책 일변도가 그의 인기의 원천이 아니다. 시장 시절 그는 청년들에게 미래를 위해 오늘을 투자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점수를 받으면 장학금을 주거나 공공 일자리와 비슷한 프로젝트를 창출해 청년들이 매일 정해진 과업을 완수해 성취감에 취하도록 했다. 어린 학생들이 폭력단에 합류하는 근본 원인이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기 때문이라고 진단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폭력단이 제공하는 자극적인 일탈 대신 미래에도 도움이 되지만 당장 흥분되는 자극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정치인이다. 단기적인 성취감이라도 결국 젊은이들의 시선이 미래를 향하게 되면 폭력단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청년들이 줄어들게 될 것이라는 착상이다. 그가 제3지대에서 설립을 주도한 당의 이름마저 이런 파격적인 생각을 담아 ‘새로운 생각(New Ideas, Nuevas Ideas)’으로 지었다.

갱단의 말단 행동 대원으로 폭력을 일삼는 청년들의 공통점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니 쉽게 죽이고 자기 스스로도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위험을 생각없이 감수한다. 엘살바도르의 청년들이 한국의 청년들처럼 비트코인과 암호화폐의 투자 열풍에 빠져든다는 것은 한국의 맥락과는 크게 다를 수 있다. 한국 청년들에게는 한탕주의로 해석될지 몰라도 엘살바도르의 청년들에게는 약물과 폭력 대신 짜릿한 투자 경험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을 키우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비트코인이 장기적으로는 우상향할 것이기 때문에 부켈레 대통령의 실험도 평균적인 청년들 사이에서는 긍정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오태민 ‘비트코인은 강했다’, ‘비트코인 지혜의 족보’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