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거스 디턴의 경고를 흘려들을 수 없는 이유

[서평]
미국 덮친 ‘절망사’, 과연 미국만의 문제인가
앵거스 디턴·앤 케이스 지음 | 이진원 역 | 한국경제신문 | 2만2000원

여기 거대한 미스터리가 하나 있다. 산업이 발전하고 과학·기술 수준이 높아지면 자연히 국가 전체의 부가 커진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국민의 건강 수준이 올라가고 기대 수명이 높아지는 것이 상식이다. 기대 수명의 증가와 사망률의 하락은 20세기 동안 인류가 이룩한 진보 중 가장 위대한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미국은 이 위대한 성취의 증거였다. 그런데 멈춤 없이 상승 곡선을 그리던 이 지표가 최근 몇 년 전부터 이상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미국 내 백인 중 45세에서 54세 사이에 해당하는 백인 연령층의 사망률이 높아진 것이다. 보통 이 시기는 생활과 소득 등에서 가장 안정적인 시기인데 말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2015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경제학자 앵거스 디턴과 프린스턴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앤 케이스는 이 미스터리를 추적한다. 죽어 가는 이들은 누구일까.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 죽음을 막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절망의 죽음과 자본주의의 미래’의 공저자이면서 경제학자 부부인 두 사람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이 파국에서 예외인 나라는 없다”

두 저자는 1999년부터 2017년 사이 미국 중년 백인층의 사망률에 돌연 반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즉 꾸준히 하향 곡선을 그리던 사망률의 흐름이 계속 유지됐다면 죽지 않았을 백인의 수가 60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한다. 2017년 사망자 추정치는 15만8000명인데 사망자는 매일 대형 여객기 3대가 추락해 승객 전원이 죽는 사고가 발생하는 것과 같다. 지금 미국에서 죽어 가고 있는 이들은 ‘힐빌리의 노래’에 등장하는 사람과 꼭 닮아 있다. 제조업의 부흥과 함께 좋은 시절을 보내기도 했지만 제조업 경제가 무너지면서 생활의 축이 무너진 사람들이다. 교육 수준과 소득 수준이 낮다. 당연히 뉴욕과 캘리포니아처럼 돈과 사람이 모이는 대도시가 아니라 쇠락한 제조업 중심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이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연유로 죽음에 이르게 될까. 죽지 않아도 됐을 사람을 죽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두 저자는 죽음의 원인을 자살, 약물 중독, 알코올 중독 등 질환에서 발견하고 ‘절망사(deaths of despair)’라고 이름 붙인다. 절망감, 박탈감, 삶에 대한 의미 상실, 미래에 대해 기대할 수 없는 상황, 소외감이 이들을 죽음으로 이끌었다. 둘은 이 비극의 참상을 각종 통계 자료를 바탕으로 세세하게 보여주는데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절망사를 초래하는 근본 원인을 찾아간다. 즉, 절망사의 ‘원인의 원인’으로 파고든다.

관심받지 못한 사람들의 죽음을 세상에 드러냈다는 것과 죽음의 원인을 정교하게 분석했다는 데 이 책의 미덕이 있다. 심층 원인에 대한 분석은 자본주의 시스템, 사회 구조에 대한 해부로 나아가는데 두 사람은 소득 불평등, 경기 침체 등 경제적 요소에서 절망사의 원인을 찾는 식의 손쉬운 결론과 거리를 둔다. 불평등 등 경제적 요소가 끼친 영향을 배제해서는 안 되지만 그게 왜 전부가 아닌지 하나하나 논증해 간다. 동시에 사회적·문화적 요소를 중요하게 다룬다.

나아가 두 저자는 절망사라는 단서에서 출발해 미국의 경제 시스템과 사회 전반을 해부하고 문제의 근본 원인을 파고들어 우리가 보다 더 공정한 세계로 가기 위해 필요한 해법을 제시한다. 불평등과 불공정, 능력주의와 교육 양극화, 경기 침체와 실업, 거대 제약 회사의 횡포와 취약한 의료 시스템, 독과점과 정경 유착, 공동체 붕괴와 가족 해체까지 한국의 상황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은 여러 문제와 그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담겨 있다.

“오랫동안 가장 많은 미움을 받았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제일 먼저 고통을 겪었지만 교육 수준이 낮은 백인들이 그다음 후보였다. 이 고통이 이어 고학력 집단으로 옮겨 갈 것이란 상상이 그저 터무니없는 일은 아니다.” 4부의 도입부에 쓰인 말이다. 절망사라는 유행병이 아직 저학력·저소득 백인층에 머물러 있지만 지금 손쓰지 않는다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될지 모른다는 경고다. 앵거스 디턴은 한 인터뷰에서 “어느 나라도 스스로 예외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한국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이고 중년·고령층의 빈곤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 책을 다른 나라 얘기로 흘려들을 수 없는 이유다.

김종오 한경BP 출판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