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시나트라, 남성용 로퍼 ‘모델 175’ 사기 위해 매장 문 열리기 전 비서 보내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구찌④
1959년 구찌의 홀스빗 로퍼를 신고 있는 알랭 드롱.
1959년 구찌의 홀스빗 로퍼를 신고 있는 알랭 드롱.
구찌가 로퍼 신발 제작을 시작한 것은 가족 중 제화업계 종사자가 있는 공장 직원의 제안이 계기가 됐다. 이 로퍼는 1950년대 초반에는 이탈리아에서 14달러 정도에 팔렸다. 미국 뉴욕에선 처음에는 잘 팔리지 않았다. 당시 미국에선 칼날처럼 뾰족한 스틸레토 굽이 유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기를 얻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세련된 여성들이 가격대가 적당하고 굽이 낮은 모카신의 멋과 편안함에 눈뜨게 되면서다. ‘모델 360’으로 불렸던 구찌 최초의 여성용 로퍼는 부드럽고 탄력 있는 가죽을 바탕으로 홀스빗 장식이 추가됐다. 그중 솔기를 두드러지게 바느질한 윗부분은 코끝으로 갈수록 좁아지다가 다시 넓어지는 형태를 보였다.

1968년 첫 모델에서 다소 수정된 ‘모델 350’이 탄생했다. 이 구두가 인기를 얻으면서 여기저기에서 모조품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소위 신분의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정장용에 더 적당한 모델 350은 얇은 금색 사슬이 들어간 스택 힐(가죽 원피를 쌓아 올려 굽 모양으로 다듬은 것)과 발등 부분에 금색 장식이 된 것이 특징이었다. 송아지가죽·도마뱀가죽·타조가죽·악어가죽·돼지가죽·뒤집은 송아지 가죽·에나멜 처리된 가죽 등 7가지 가죽으로 만들어진 이 구두는 독특한 분홍 베이지색 등 다양한 색상으로 매장에 나왔다. 패션 평론가 히비 도시는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에 “구찌가 새로 출시한 모카신 로퍼를 구입하기 위해서라도 로마를 방문할 가치가 있다”라고 쓸 정도로 유행했다.
여성 홀스빗  레더 로퍼
여성 홀스빗 레더 로퍼

1969년까지 미국 내 10개 매장에서 ‘모델 350’ 구찌 로퍼 신발은 약 8만4000켤레가 팔렸다. 이 가운데 뉴욕 매장에서만 2만4000켤레가 나갔다. 구찌는 의류 디자인 브랜드인 에밀리오 푸치와 함께 뉴욕에 자체 매장이 있는 소수의 이탈리아 브랜드 중 하나였다. 푸치의 화려한 그래픽 프린트 제품들은 조르지니가 개최한 살라비앙카 패션쇼에 힘입어 명성을 떨쳤다. 이 때문에 패션에 관심 있는 뉴욕 사람들 사이에서 ‘구찌-푸치’라는 유행어가 나돌기 시작했다.

일부 패션업계 관계자들은 구찌 로퍼가 1970년대를 거쳐 1980년대 초반까지 대유행하자 어리둥절했다. 기성 트렌드로 유행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레블론의 부사장이자 구두 애호가인 폴 올라드는 1978년 뉴욕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구찌의 모카신 로퍼는 이탈리아제 페니 로퍼(쉽게 신고 벗을 수 있는 간편화로, 영국에서 구두 장식 틈에 동전을 끼우는 것이 유행하면서 유래한 이름)에 불과합니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로퍼, 모조품 만들어질 정도로 인기…미국 중상류층에 ‘신분 상승’ 브랜드로 유명
신고 다니기 편하고 스커트·바지에도 잘 어울려

창업자인 구치오 구치의 첫째 아들 알도는 이 로퍼가 부유한 이탈리아 사업가의 부인들이 여행용으로 신으면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1인치 미만으로 굽이 낮아 신고 다니기가 편한 데다 스커트나 바지에도 잘 어울려 다양한 용도로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32달러인 구찌 로퍼는 부담 없이 살 수 있으면서도 사회적 신분의 상징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패션 칼럼니스트 유지니아 셰퍼드는 “구찌 로퍼는 패션을 사랑하는 여성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비밀처럼 공유됐고 사교 클럽의 휘장처럼 착용했다”라고 썼다. 편안한 근무용 구두지만 세련돼 보이는 데다 가격도 적당했던 이 제품은 출시되자마자 비서와 사서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이 구두를 산 로건 벤틀리 레소나는 그런 인기 때문에 문제도 있었다고 지적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로퍼를 구하기 위해 매장을 찾는 바람에 뒷전으로 밀려난 느낌을 받는 단골손님들이 불쾌해 했어요.”

알도는 다시 한 번 수완을 발휘했다. 1968년 가을 세인트레지스 호텔과 계약하고 담배와 신문 가판대 공간을 넘겨 받아 구두 전용 매장으로 개조했다. 그 덕분에 뉴욕의 직장 여성들은 널찍한 공간에서 구두를 신어 볼 수 있었다. 또 기존 고객들은 5번가의 본 매장을 더 여유 있게 이용할 수 있었다. 구찌 로퍼는 워싱턴의 변호사와 로비스트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었다. 심지어 국회 의사당이 ‘구찌 쇼핑몰’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1985년 구찌 로퍼는 다이애나 브릴랜드가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기획한 전시회에 출품됐고 현재도 영구 소장품으로 보관돼 있다.
여성 웹 로퍼
여성 웹 로퍼
구찌는 남성 고객들을 위한 ‘모델 175’라는 남성용 로퍼도 다시 디자인해 내놓았다. 이미 구찌 로퍼를 40켤레 소장한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가 매장 문이 열리기도 전에 한 켤레를 더 사기 위해 비서를 보냈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구찌는 남성용 벨트와 장신구, 운전용 슬리퍼를 제작했을 뿐만 아니라 새롭게 디자인한 남성용 가방에 ‘서류 가방(document carrying case)’이라는 이름을 붙여 출시했다.
1953 남성 홀스빗 레더 로퍼
1953 남성 홀스빗 레더 로퍼
정치 거물 배리 골드워터·그레고리 펙 등 단골 고객

영화배우 레드 스컬턴은 밤색 악어가죽 서류 가방을, 피터 셀러스 감독은 소형 악어가죽 서류 가방을 애용했다. 로렌스 하비는 술병과 술잔, 얼음통을 담을 수 있게 안주머니가 달린 ‘음주용 브리프케이스(bar briefcase)’를 의뢰했다. 유명 뮤지션인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는 베벌리힐스 매장에 있는 것과 똑같은 흰색 가죽 소파 한 쌍을 구매했다. 그 외에도 운동선수 짐 킴벌리, 출판계 거물 넬슨 더블데이, 모험가 허버트 후버 3세, 기업가 찰스 레브슨, 상원의원 배리 골드워터도 구매 대열에 합류했다. 조지 해밀턴, 토니 커티스, 스티브 매퀸, 제임스 가너, 그레고리 펙, 율 브리너 같은 영화배우들도 구찌의 고객이었다.

1970년대가 되기 전 구찌의 가방과 구두가 유럽과 미국 두 대륙에서 신분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함에 따라 구찌는 기성품 부분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50년에 걸친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유럽과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주요 도시에 구찌의 직영 매장 10곳이 문을 열었다. 벨기에 브뤼셀에서는 구찌 최초의 프랜차이즈 매장을 알도의 아들 로베르토가 관리했다. 존 F. 케네디 당시 미국 대통령이 알도를 ‘초대 주미 이탈리아 대사’라고 부를 정도로 구찌의 고전적이고 세련된 스타일은 미국에서 대유행했다.

자료=사라 게이 포든 ‘하우스 오브 구찌(다니비앤비)’ 등 참조

류서영 여주대 패션산업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