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텔, ASML 차세대 노광장비 확보에 성공…TSMC·삼성전자 양강 체제 흔들리나
[비즈니스 포커스] ‘인텔이 돌아왔다(Intel is back).’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3월 인텔의 파운드리 시장 재진출을 선언하며 ‘인텔이 돌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인텔은 이제 새로운 인텔(The old Intel is now the new Intel)”이라며 2025년까지 성능 면에서 다시 1위를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예고했다. 그리고 4개월이 흐른 7월 27일 인텔의 공격적인 로드맵이 상세하게 그려졌다.
인텔은 이날 온라인 기술 전략 설명회를 열고 초미세 공정 반도체 개발 로드맵과 차세대 반도체 장비 도입 계획을 발표했다. 2024년에는 ‘인텔 20A’라고 이름 붙인 2나노미터 수준의 반도체를 생산하고 2025년에는 1.8나노미터 수준인 ‘인텔18A’를 양산한다는 내용이었다. 세계 파운드리 시장 1위인 대만 TSMC와 2위인 삼성전자가 현재 5나노미터급 반도체를 생산 중이고 2023년 3나노미터 공정 제품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추격자 인텔의 이날 로드맵은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었다. 인텔의 도발, 장비 쟁탈전 격화파운드리 업체 중 2나노미터를 언급한 것은 인텔이 처음이다. 후발 주자인 인텔은 올해 7나노미터급 반도체 생산을 계획하고 있다. 현재 기술만 놓고 보면 5나노미터급 반도체를 생산 중인 삼성전자와 TSMC보다 크게 뒤처진 수준이다.
이에 경쟁사보다 떨어지는 양산 기술력을 하루아침에 높이기 어렵다며 4년 후 인텔의 계획에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겔싱어 CEO는 “대규모 기술 투자, ASML 등 선두권 반도체 장비 업체와의 협업, 수십 년간 쌓은 노하우 등을 통해 목표를 반드시 달성할 것”이라며 “기술 개발은 끝낸 상황”이라고 일각의 우려를 일축했다.
인텔의 자신감은 극자외선(EUV) 장비 확보에서 나왔다. 이날 인텔은 로드맵을 발표하며 네덜란드 장비 업체인 ASML의 차세대 제품인 하이(high) NA EUV 노광 장비를 확보했다고 밝혔다. 겔싱어 CEO는 “ASML과의 협력을 강화해 차세대 EUV 제품인 하이 NA EUV를 업계 최초로 공급받을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EUV는 반도체를 제조하기 위해 광을 이용해 기판에 미세한 회로 패턴을 그리는 핵심 기술인 노광 공정에서 사용하는 신기술이다. 기존의 불화아르곤 레이저보다 10분의 1 미만의 짧은 파장을 갖는 극자외선을 이용해 반도체 회로 패턴을 그리기 때문에 10나노미터 이하 공정에서 필수적으로 사용된다. EUV가 도입되지 않으면 반도체 제조사들은 점점 더 엄청난 복잡함에 직면하게 되고 이는 곧 반도체의 품질 저하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차세대 반도체의 키를 EUV가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문제는 이 EUV 광원을 이용한 노광 장비를 개발 생산하는 기업이 네덜란드 장비 업체인 ASML 하나란 점이다. 최첨단 EUV 노광기의 가격은 대당 2000억원을 호가한다. 이는 한국의 장비 업체 5~6위 정도 되는 회사의 연매출과도 맞먹는 수준이다. 자본 투자의 압박보다 더 큰 것은 출하량이다. ASML이 독점 생산하기 때문에 연간 생산량이 30대 정도에 그친다. 삼성증권이 추정한 EUV 장비 출하량에 따르면 2020년 31대, 2021년 40대(추정) 수준이다. 이에 전문가들은 “EUV 확보가 곧 시장점유율을 결정한다”고 말한다. 실제 파운드리 업체들은 해당 장비를 공급받기 위해 혈안이다. 삼성전자의 이재용 부회장이 지난해 ASML 본사를 찾아가 EUV 장비 공급을 직접 챙겼을 정도로 중요한 승부처다. 오죽하면 ASML의 수식어조차 ‘반도체 슈퍼 을(乙)’, ‘해가지지 않는 기업’이다.
증권사마다 추정치가 상이하지만 대략 대만의 TSMC가 2021년 기준으로 25~28대, 삼성전자가 9~15대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후발 주자인 인텔은 2~3개로 추정됐지만 양 사 간 이번 협력으로 보다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인텔이 확보한 NA EUV 장비는 ASML이 반도체 회로를 더욱 미세하게 그리기 위해 NA 수치를 한층 끌어올린 차세대 제품으로 현재 개발 중이다. 2023년 시제품이 공개될 예정인데 아직 시제품도 공개되지 않은 제품을 인텔이 2025년 업계 최초로 도입한다고 발표한 것은 초미세 공정 기술력을 확보해 후발 주자의 약점을 상쇄하고 1위 사업자로 도약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으로 풀이된다.
장비 경쟁만 공격적인 게 아니다. 인텔은 파운드리의 ‘큰손’인 퀄컴도 첫 고객사로 확보했다. 퀄컴은 세계 최대 통신칩 설계 전문 업체(팹리스)로 파운드리 시장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사업자다. 겔싱어 CEO는 이날 “오늘 공개한 혁신은 인텔의 파운드리 첫 고객인 퀄컴에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며 “인텔의 파운드리 서비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나는 TSMC, 쫓는 인텔, 위기의 삼성전자 반도체 수급난으로 각국이 ‘반도체 자국주의’에 들어간 것도 인텔에는 호재다. 인텔은 ‘자국 반도체 육성’을 계속 언급하며 미국 고객사 유치에 힘을 쏟고 있다. 이미 지난 3월 겔싱어 CEO가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파운드리 고객사로 아마존·구글·마이크로소프트·퀄컴·애플 등을 끌어올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중 퀄컴이 첫 고객으로 자리했다. 이들 기업을 기존 고객사로 가진 TSMC와 삼성전자에는 고객사를 분산해야 하는 뼈아픈 소식일 수밖에 없다.
업계에선 이번 인텔의 승부수로 2025년 파운드리 반도체 시장의 판이 달라질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현재 파운드리 시장은 대만의 TSMC, 한국의 삼성전자가 양분하고 있다.
시장 조사 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기준으로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점유율은 TSMC(대만) 55%, 삼성전자(한국) 17%, UMC(대만) 7%, 글로벌파운드리(미국) 5%, SMIC(중국) 5% 순이다. 인텔은 현재 순위권에 없지만 향후 퀄퀌과 아마존 칩을 양산하면서 매출이 발생하면 시장점유율이 오를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의 위치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TSMC를 따라가기도 벅찬 상황에서 추격자 인텔이 무서운 기세로 쫓아오고 있는데 총수 부재마저 장기화되며 삼성전자뿐만 아니라 한국 반도체 산업에 위기감이 돈다는 우려다. 앞서 대한상공회의소를 비롯한 경제5단체와 종교계 등에서는 이 부회장이 미국 반도체 파운드리(위탁 생산) 투자를 매듭짓는 등 경영 현안이 산더미라는 점을 감안해 특별 사면을 청와대에 촉구한 바 있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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