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텔 앞세워 자국 내 공급망 복원 나선 미국...삼성, 파운드리 분사·IPO 등 대응 전략 시급

[스페셜 리포트]
사진=한국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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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냉전 시대에 산업의 쌀 반도체가 ‘무기’로 떠올랐다. 배타적인 반도체 공급망을 새롭게 건설하고자 하는 미국은 지금까지 지켜 왔던 시장주의를 포기하며 파격적인 지원을 시작했다. 전통적인 미국 동맹국의 반도체 업체들 역시 새로운 환경을 맞이했다. 그 중심에 한국이 있다. 반도체 산업에서 승자의 조건을 확보하는 극소수의 국가만이 제4차 산업혁명의 주도국으로 번영을 누리게 된다. 미·중 패권 경쟁으로 달라진 반도체 판도를 조명했다. (참고도서 '반도체 투자 전쟁_김영우 작)
갈림길에 선 반도체 코리아
전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수요와 공급이 배분돼 왔던 반도체 공급망이 재편되고 있다. 세계 강국은 자국의 앞마당에 반도체를 심기 위해 혈안이다. 미국은 그 어떤 국가도 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의 지원으로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중심을 미국으로 옮기려 하고 있다. 선봉에 과거의 반도체 제국 인텔이 서 있다.

중국 역시 반도체 굴기를 포기할 수 없다. 미국의 제재에 사방이 가로막혔지만 내수를 통해 위기 돌파에 나섰다. 자체적으로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지 못한다면 세계 첨단 산업을 석권하겠다는 중국의 꿈이 무너질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의식이 깔려 있다.

‘반도체 강국’ 대한민국 또한 미·중 갈등 속에 반도체 산업의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전문가들은 반도체 공급망 재편 시기에 한국 수출의 버팀목인 반도체 산업이 위기에 처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미국
“팹리스 중심국에서 공급망 중심국으로”
‘77% 대 10%.’

2020년 미 반도체산업협회(SIA)는 놀랄 만한 보고서를 발표한다. 2030년 중국이 전 세계 반도체 생산 능력의 24%를 차지하며 세계 반도체 산업의 패권을 차지할 것이란 내용이다. 2등은 대만(21%), 3등은 한국(19%) 그리고 일본(13%) 순이었다. 반면 미국은 10%로 5위, 유럽은 8%로 6위에 머물렀다. 이 전망치로 보면 반도체 산업에서 아시아가 77%를 차지하는 동안 미국과 유럽은 고작 ‘기타’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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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산업의 쌀’로 비유되는 반도체는 TV·스마트폰·자동차·컴퓨터 등 우리 생활에 필수적인 전자 기기 대부분에 중요 부품으로 들어간다. 그뿐일까. 인공지능(AI)·양자컴퓨터·무선통신·사물인터넷(IoT) 등 미래 산업을 주도할 핵심 기술에도 반도체가 필요하다. 반도체 없이는 제4차 산업혁명을, 즉 미래 경제를 주도할 수 없다.

이전까지 미국은 민간 기업이 기술 투자를 주도해 정부의 반도체 연구·개발(R&D) 투자는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4%에 불과했다. 반면 중국은 정부 주도로 반도체 R&D에 투자하며 전체 투자의 70%에 육박한다. 이에 SIA는 백악관에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다.

‘헬스케어·통신·클린에너지·컴퓨팅·수송을 비롯한 무수한 영역에 걸쳐 기간산업의 발전을 뒷받침하는 것이 반도체다. 국내 반도체 제조에 대한 지원금과 연구에 과감한 투자를 진행함으로써 대통령과 연방의회는 미국 경제와 일자리 창출을 다시 활성화할 수 있고 국가 안전과 반도체 공급망을 강화할 수 있다.’

속내는 또 있다. ‘국가 안보’다. 과거 반도체의 제왕이었던 인텔이 몰락하고 미국의 제조 경쟁력이 하락하는 지난 5년간 미국은 대만의 TSMC에 파운드리를 의존했다. 2020년 3분기 기준 TSMC에서 차지하는 북미의 비율은 59%였고 4분기에는 73%까지 치솟았다. 미국 국가인공지능안보위원회(NSCAI) 위원장을 맡고 있는 에릭 슈미트 전 구글 회장은 “지나친 대만 의존도로 미국 기업과 군의 힘을 키워 주는 초소형 전자공학이 우월적 지위를 상실하기 직전”이라며 위기감을 토로했다. SIA와 NSCAI의 의견은 하나로 모였다. ‘미국 내 반도체 기지 건설의 필요성’이다.

미국의 투자 시계는 빠르게 움직였다. 바이든 정부는 반도체 육성 전략에 대규모 예산을 배정했다. 최대 40%의 투자 세액 공제, 파운드리 구축을 위한 건당 최대 30억 달러(약 3조5000억원)의 보조금 지급, R&D에 총 120억 달러 지원 등 연방 정부 차원의 자금 폭격이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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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 정부를 등에 업고 과거의 제왕 인텔도 지난 3월 파운드리 비즈니스로의 복귀를 선언했다. 2024년까지 200억 달러(약 23조원)를 들여 미국 내 2개의 반도체 공장을 짓겠다고 밝혔다. 이어 지난 7월 공격적인 투자 맵을 내놓았다. ‘아마존’과 ‘퀄컴’을 고객사로 유치했고 현재 7나노 수준인 양산 기술을 4년 내에 2나노 수준으로 향상시킨다는 기술 계획을 발표했다.

세계 파운드리 시장 1위인 대만 TSMC와 2위인 삼성전자가 현재 5나노급 반도체를 생산 중이고 2023년 3나노 공정 제품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추격자 인텔의 이날 로드맵은 선전포고와 다름이 없었다. 여기에 네덜란드 장비 업체인 ASML의 차세대 제품인 하이 NA(Numerical Aperture)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를 확보했다고 밝혔다. EUV는 노광 공정에서 사용하는 신기술로, 차세대 반도체의 핵심 기술로 꼽힌다. 이 기술을 ASML이 독점 생산하고 있기 때문에 업계에서는 “EUV 확보가 곧 시장점유율을 결정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파운드리 재도전자 인텔의 강력한 ‘한 방’이다. 김영우 SK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책 ‘반도체 투자 전쟁’에서 “미국 정부로서는 인텔을 포기할 수 없다”며 “만약 기대와 달리 인텔이 제조 경쟁력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대만의 TSMC 팹이 아닌 미국의 TSMC 팹에서 제품을 생산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썼다.

미국의 파운드리 육성 정책은 설령 미국 기업이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공급망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오히려 파운드리 역량을 가진 글로벌 기업을 자국 영토에 끌어오는데 당근과 채찍을 쓰고 있다. 이러한 요구에 TSMC가 미국 애리조나 주에 369억 달러(약 42조원) 규모의 공장을 건설하기로 했고 삼성전자 역시 미국 오스틴 공장에 170억 달러(약 20조원) 규모의 추가 투자를 결정했다.

미국의 최종 목표는 반도체의 모든 공급망을 미국 내에 두겠다는 것이다. 김영우 리서치센터장은 “TSMC와 삼성전자에 이어 인텔까지 미국에 새로운 공장을 짓는다면 미국은 2024년까지 시스템 반도체 산업의 생태계를 미국 중심으로 조성할 수 있다”며 “반도체 산업에서의 압도적인 경쟁력 격차를 유지 또는 확대해 미래의 주도 산업에서 중국을 제압하는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전략으로 반도체 육성 정책을 이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3세대 반도체 내수 구축으로’
중국 역시 벼랑 끝 전술이다. 2015년 ‘반도체 굴기’를 내세우며 사실상 가장 빠르게 자국 우선주의를 시도했지만 미국 제재에 길이 막혔다. 2019년 중국의 화웨이와 하이실리콘을 제재함으로써 글로벌 시장에서 밀어냈고 이로 인해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를 포함한 반도체 설계 부문에서 중국 경쟁력은 현저하게 약화됐다. 파운드리조차 네덜란드의 ASML과 계약할 수 없게 함으로써 중국은 고성능 칩을 위탁 생산하는 하이엔드 분야에 진입이 불가능해졌다. 김 센터장은 “현재 미국은 중국을 상대로 반도체 설계, 고성능 칩에 대한 위탁 생산, 최고 성능의 반도체 장비 반입을 모두 막는 초고강도 제재를 가하고 있다”며 “이러한 추세가 지속된다면 중국 반도체 기업들이 글로벌 플레이어로 성장하기는 상당히 힘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중국도 반도체 굴기를 포기할 수 없다. 중국 산업 중 자립도가 가장 낮은 영역 중 하나가 바로 반도체 산업이기 때문이다. 2013년부터 반도체 수입액이 원유 수입액을 넘어서며 수입액 1위를 차지하고 있고 중국 내 반도체 수요가 계속 증가하는 가운데 중국의 반도체 수지 적자도 2020년 마이너스 2337억 달러로 2010년보다 두 배 증가했다. 특히 시스템 반도체 칩 설계 분야인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시장에서 미국 기업의 점유율이 70%라는 점은 미·중 무역 전쟁 상황을 감안할 때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반도체를 잡지 못하고선 중국 체제를 이어 나가기가 어렵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대표적 통치 이념인 ‘중국몽(中國夢 : 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을 의미)’의 실현을 위해 핵심 전략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반도체 육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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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의 반도체 육성 전략이 먹히지 않는 상황에서 중국은 ‘쌍순환’이란 슬로건을 내세웠다. 국내 순환을 중심으로 국내·국제 대순환을 상호 촉진한다는 의미로, 외부 시장 의존도를 낮추고 내수 중심으로 경제 구조를 개편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중국의 반도체 자급률은 15.9%에 불과하고 반도체의 해외 의존도뿐만 아니라 반도체 제조를 위한 소재·장비의 해외 의존도도 높은 수준이다.

쌍순환을 위해 중국은 올해 ‘14차 5개년 계획 및 2035 중·장기 목표’를 발표하고 반도체를 중점 과학기술 분야로 선정했다. 특히 미국의 제재를 피하기 위해 중국의 약점인 설계 소프트웨어(EDA), 고순도 소재, 중요 제조 장비와 제조 기술, 절연 게이트 양극성 트랜지스터(IGBT), 초소형 정밀 기계 기술(MEMS), 첨단 메모리 기술, 실리콘 카바이드(SiC)와 질화갈륨(GaN) 등 3세대 반도체 개발에 힘을 쏟을 계획이다. 미국이 현재 제재하고 있지 않은 새로운 반도체 분야인 3세대 반도체를 집중 공략하겠다는 것이다. 중국은 이미 지난해 8월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한 새로운 세제 지원책을 발표하고 올해부터 본격 시행에 들어갔다.

대규모인 국가반도체기금뿐만 아니라 중국판 나스닥인 커촹반도 2019년부터 반도체 기업들의 주요 자금 공급원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 중국 정부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고 있는 회사는 창신메모리(CXMT)와 기가디바이스다. 창신메모리는 허페이에 D램 팹을 짓고 20K 제품을 생산 중이다. 공정은 19나노다. 올해 하반기에는 17나노 공정으로 업그레이드할 계획이고 기가디바이스는 6월 19nm DDR4 D램 양산을 시작했다.

중국 반도체 장비 기술력도 상승해 상하이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이큅먼트(SMEE)는 연말 28nm 반도체 생산이 가능한 노광 장비 출시를 계획 중이다. 장비 양산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 일부 노광 장비 수입이 대체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인재 확보에도 거대 자원을 투입하고 있다. 중국 최고의 명문대인 칭화대는 지난 4월 반도체 단과대학을 설립한다고 발표했다. 정부 지원은 무제한이다. 산·학·연이 ‘원 팀’이 돼 반도체 전쟁에서 다시 승기를 잡겠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거대한 반도체 수요 시장을 보유한 중국이 규모의 경제를 활용한 게임 체인저가 될 잠재력에 주목하고 있다. 연원호 세계지역연구센터 중국경제실 중국경제통상팀 부연구위원은 “내수 시장에서 중국산 반도체 소비가 안정적으로 증가될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중국 정부는 내수를 통해 수익성을 확보하고 반도체 품질 개선을 꾀하는 전략을 갖고 있다”며 “지난해 TSMC의 중국 내 매출은 83억 달러로, 만약 TSMC의 성숙 노드 매출을 SMIC가 상당 부분 잠식한다면 중국 내 반도체 자급률이 크게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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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향후 3년 위기를 기회로 바꿔야”
미·중 갈등에 고민이 커진 것은 이들의 반도체 동맹국들이다. 특히 파운드리 시장 1~3위를 차지하는 대만의 TSMC와 한국의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새로운 환경을 맞이하게 됐다.

먼저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에서 점유율 54%를 차지하는 대만의 TSMC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시작했다. 미국 애리조나 주에 360억 달러 규모의 공장 설립 계획을 발표한 데 이어 지난 4월 28억 달러를 들여 중국 난징 공장을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난징 공장은 최첨단 미세 공정 생산 라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는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도울까 우려된다’며 대만에 압박을 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TSMC는 미·중뿐만 아니라 일본과 독일에도 반도체 공장 건설을 검토 중이다.

한국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반도체 산업에서 보유하고 있는 초격차를 유지하지 못한다면 글로벌 역학 구도에서 가지고 있는 지정학적 중요성도 약화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특히 인텔의 진입으로 하이엔드 파운드리 구도가 현재 TSMC와 삼성전자의 양강에서 인텔까지 3강 구도로 바뀔 수 있다고 긴장하고 있다.

김영우 센터장은 위기를 기회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만약 삼성전자가 TSMC와 인텔보다 미국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거나 미국이 국가 안보와 연계해 원산지 규정을 강화한다면 상대적으로 어려워질 수도 있지만, 향후 3년간 파운드리 산업이 높은 가치로 평가받을 수 있다”며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사업을 분사해 미국 나스닥에 상장하고 기업공개(IPO)를 통해 새로운 투자 재원을 마련하는 방안을 고려하거나 전 세계적으로 수요가 급증할 화합물 반도체 부문에도 진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계에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가석방으로 경영 복귀 길이 열리면서 삼성전자의 투자 시계가 빨라질 것에 기대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애리조나 주에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기로 했지만 아무런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양산 시기는 2023년을 목표로 한다. 인텔과 미래를 약속한 ASML과의 만남도 추진해야 하는 등 이 부회장의 어깨가 무겁다. 단, 가석방 상태로 경영활동에 정상적으로 복귀하려면 법무부 승인을 받아야 한다.

미국의 제재를 피하면서 한·중 간 협력할 수 있는 분야를 발굴하는 것도 과제다. 연원호 부연구위원은 “미국이 현재 제재하고 있지 않은 새로운 반도체 분야(3세대 반도체) 또는 미국의 관심이 적은 범용 반도체 분야를 생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미 반도체 산업은 국가 차원의 무한 경쟁에 돌입했다. 기존의 경쟁력 유지와 함께 반도체 공급망상 필수불가결한 새로운 핵심 기술을 확보하기 위한 R&D 강화에 나서야 한다. 연 연구위원은 “인재 유출 방지와 적극적인 인재 확보는 물론 전략적인 R&D 투자로 비교 우위 분야의 초격차 유지와 새로운 선도적 핵심 기술·공정(choke-point) 개발을 통한 경쟁력 유지가 중요한 시점”이라고 조언했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